65화
나는 얼른 모퉁이를 돌아 건물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나이 지긋한 사용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우람한 체격의 사내 한 명과 아까 본 하녀 중 한 명이 현관으로 나왔다.
“하녀장이 뭘 찾으라고 했다고?”
“주방장님과 함께 현관 위에 있는 조각상이 잘 있는지 살펴보라고 하셨어요.”
“조각상은 갑자기 왜?”
주방장이라 불린 사내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마담께서 숨을 잘 못 쉬셔서 저보고 살펴보고 오라고 하셨어요.”
“마담께서 아프시다고?”
사내의 가는 눈매가 크게 벌어졌다.
“네.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셔서 저희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어요.”
“허허. 이거 큰일이군.”
“주방장님, 저 빨리 올라가 봐야 해요.”
“그래, 알았다.”
건물 밖으로 완전히 나온 두 사람이 현관 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 저기 지금, 조각상이 없어진 게 맞죠? 제 눈이 이상한 게 아니지요?”
“그래, 내 눈에도 보이지 않는구먼.”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이.”
하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경악 어린 탄성을 내질렀다.
“이상하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안나, 너는 무슨 소리 못 들었냐?”
주방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못 들었어요. 조각상이 제법 컸었는데 어떻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까요?”
“소리나 진동이 나지 않은 건 둘째치고 애초에 여기는 아무나 못 들어오잖아.”
“맞아요. 허가 받지 않는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두 사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니 분명 소리도, 진동도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나이 많은 사용인은 어떻게 안 거지?’
혹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던 건가?’
미심쩍은 점이 많았지만 일단 뒤로 미뤄두었다.
지금 내겐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으니까.
『00 : 19 : 57 』
현재 남은 매개체는 7개.
저들이 눈치를 챘으니 더욱 빨리 해결하고 도망가야 한다.
“안나, 맞은편 건물에도 조각상이 없어진 것인지 살펴보고 와.”
“네, 알겠어요.”
주방장의 지시에 안나라는 하녀가 빠르게 달려갔다.
잠시 후 안나가 숨을 가쁘게 쉬며 되돌아왔다.
“주방장님! 저기에도 조각상이 없어요.”
“허어, 이거 큰일이로군요. 빨리 하녀장에게 알려야겠다.”
두 사람이 다급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다른 하녀가 달려 나왔다.
“샐리, 어디 가.”
“마담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셔서 하녀장님께서 전령새를 가져오라고 하셨어.”
“이거 상황이 심각한가 보군. 전령새까지 사용하려는 거 보니.”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샐리라는 하녀가 반대편 건물 쪽으로 달려갔다.
“우리도 얼른 올라가 보자.”
“네.”
주방장과 안나라는 하녀도 이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이런 전령새라니.’
빨리 해치우고 튀어야겠어.
정원은 물론 건물 앞쪽도 확인했으니 이젠 뒤편을 살펴볼 차례였다.
나는 거의 달리듯이 외벽을 돌며 매개체를 수색했다.
다행히 건물 뒤편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숨겨져 있던 매개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목표 : 오염의 매개체 (6/12)』
해머로 매개체를 가루로 만들 때마다 시스템창에서도 숫자가 올라갔다.
7, 8, 9, 10, 11.
이제 남은 건 딱 하나.
『 00 : 07 : 02 』
내게 남은 시간은 7분 남짓.
‘하나 남았는데.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내가 명성을 올리기 위해 투자한 게 얼마인데. 그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었다.
‘은의 망토’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한 후 귀족 여인이 머물고 있는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용인들의 태도로 보아하니 이 궁의 주인은 은발의 여인이다.
이 궁을 숨긴 이유도 그 여인과 관계되어 있을 터.
그러니 오염의 매개체도 그 여인과 가까운 곳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까 하녀장이라는 이가 내려다 본 곳이 3층이었지.’
나는 냅다 3층으로 뛰어갔다.
주방장과 하녀 한 명이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는 걸 보니 그곳이 은발의 여인이 머무는 곳인 모양이었다.
역시나 장미 문양이 새겨진 방문 한가운데에 검은 돌이 박혀 있었다.
‘곤란한데.’
사용인들이 버젓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문을 박살내 버리면 당연히 난리가 날 텐데 이를 어쩐다.
‘어쩌긴 뭘 어째?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은의 망토’ 지속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여기서 미적거리다간 바로 감옥행이었다.
해머를 붙잡은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후아후아.
심호흡을 크게 하며 적당한 힘으로 해머를 휘둘렀다.
안 그러면 문이 박살날 테니까.
손으로 떨림이 전해지며 검은 돌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문의 중앙이 움푹 패었다.
“어?”
방문 앞에 서 있던 주방장과 하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나는 냅다 줄행랑을 쳤다.
“하녀장님!”
뒤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지만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00 : 03 : 15 』
별궁만 벗어나면 돼.
여기서만 잡히지 않으면 된다.
계단의 손잡이에 올라타 죽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별궁 밖으로 뛰었다.
『히든 퀘스트 ‘숨겨진 궁을 찾아라!’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정화석 6개가 지급됩니다. 레벨이 +10 되었습니다.』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떴지만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여기서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별궁의 결계를 통과하고서도 죽어라 달렸다.
『00 : 00 : 59 』
‘젠장.’
나는 1분도 채 남지 않은 타이머를 보며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달렸다.
『00 : 00 : 34 』
:
『00 : 00 : 10 』
9, 8, 7, …… 3, 2, 1.
『시간제한으로 인해 ‘은의 망토’ 스킬이 해제됩니다.』
시스템 알림음이 들린 순간 바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리 후궁 처소들이 비어 있다고는 하나 한복판을 가로질러 다니면 혹시라도 경비병들 눈에 띌 지도 모르니까.
비어 있는 별궁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윽.”
어찌나 단단한 것과 부딪힌 것인지 눈앞에서 별이 튀었다.
‘뭐야!’
이마를 문지르며 짜증스럽게 고개를 든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밤하늘을 닮은 검은 머리, 녹음을 닮은 눈동자.
연회복이 아닌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분명 황태자였다.
나와 꽤나 세게 부딪힌 탓인지 그도 제 가슴을 매만지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네가 거기서 왜 나와?’
황당함도 잠시.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일단 내빼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달리지도 못하고 앞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내 앞을 가로막은 근위대장이 나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 상해를 입히시고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제가 무슨 상해를……. 이건 그냥 사고잖아요.”
나도 다쳤다고. 지금 머리가 깨진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란 말이야.
나는 뾰족하게 눈을 뜨며 대꾸했다.
“……케인 영애?”
그때 뒤에서 클로디안의 의문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하아, 젠장. 하필 왜 황태자와 부딪힌 거냐고.’
지금 무도회장에 있어야 할 사람이 도대체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억지로 몸을 돌렸다.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아, 인사는 생략하지.”
클로디안이 휙휙 손을 내저었다.
“그보단 영애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그러는 전하께서는 왜 여기에 계시는 건데요?”
카밀라는 어디다 두고 여길 와 있는 거야? 여기는 황태자궁 근처도 아니잖아.
클로디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곳은 내궁이다. 아바마마께서 영애에게 출입을 허가했을 리는 없고 나 또한 영애의 출입을 허가한 적이 없지.”
머리를 팽팽 돌려봤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클로디안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해 보이는 것이 영 수상해.”
그가 턱을 매만지며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다.
늘 웃는 모습을 봐서 그런가.
딱딱하고 굳은 표정이 낯설면서도 은근히 무서웠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게, 저…….”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연 순간.
클로디안이 갑자기 나를 끌어당기며 별궁 외벽에 붙어 섰다.
“쉿.”
귓가로 간질이는 낮은 음성에 순간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클로디안이 나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당혹감에 멍하니 있던 나는 다가오는 인기척들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하나가 아니야. 못해도 열댓 명은 되었다.
게다가 발소리를 죽인 채 몸을 숨기고 이동하는 것이 실력자들이었다.
만약 내가 레벨이 50이 넘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은신에 능한 자들이었다.
‘암살자들인가?’
어째서 황궁에 암살자들이.
만약 암살자들이 아니라면?
설마 나를 쫓으러 온 것인가?
저들이 향하는 방향의 끝엔 숨겨진 별궁이 있었다.
‘아까 하녀장이 전령새를 가지고 오라고 했었지.’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곳이니 근위대를 동원할 순 없을 터.
혹시 황실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무사들인가?
범상치 않은 실력자들이 나를 쫓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때 마치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클로디안이 내 어깨를 다독거렸다.
불행히도 그의 배려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애초에 클로디안을 믿지 않으니까.
이전 회차에서 나를 죽인 사람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나를 추궁할 게 분명해. 진실을 밝혀낼 때까지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겠지.’
그곳에 다녀온 건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이 알려진 순간 어느 누구도 나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어떡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갈 때쯤 클로디안이 나를 풀어주었다.
기감을 세워보니 주위에 더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자들이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몸을 숨기고 있던 근위대장 미첼 경이 작게 속삭였다.
‘그림자?’
역시 황궁 소속 무사들이었나?
“오늘은 돌아가야겠군.”
잠시 그림자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클로디안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늘만큼 좋은 기회를 찾긴 어려울 겁니다.”
“그렇겠지. 3대 행사가 모두 끝났으니.”
마뜩잖은 표정으로 미간을 매만지던 클로디안이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영애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사실대로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럴수록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림자들까지 움직인 이상 이대로 덮을 수 없게 되었거든.”
클로디안의 녹안이 스산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