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여기서부터는 황비나 후궁들이 사용하던 별궁들이 모여 있는데 지금은 모두 비어 있었다.
언젠가부터 황제들이 후궁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비어져 있다 보니 지금은 일 년에 두어 차례 점검만 하는 실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혹여 지나다니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 건물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조심히 움직였다.
긴가민가할 정도로 옅게 느껴지던 악취는 내궁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짙어졌다.
단순히 오물로 인한 악취가 아니었다. 그보단 사체에서 나는 썩은 내에 더 가까웠다.
죽음의 냄새.
언젠가 맡아본 냄새였다.
그때 그 돌 제단에서.
순간 발이 땅에 박힌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 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자 비릿한 피 맛이 나며 정신이 번쩍 났다.
‘이럴 시간이 없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애런이 나를 찾아 나설 지도 모른다.
최대한 후각에 신경을 집중하며 계속 내궁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악취가 진동하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궁 끝자락, 황궁의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이름 모를 별궁.
그곳이 악취의 진원지였다.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나?’
내궁 끝까지는 와 본 적이 없던 터라 이전에도 있던 곳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회색 벽으로 이루어진 별궁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담쟁이덩굴이나 흔한 들풀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내궁을 걸어오며 배경처럼 들려왔던 풀벌레 소리도 이 별궁 주변에선 들려오지 않았다.
깊은 바다에 잠긴 것처럼 무거운 적막만이 내려앉은 곳이었다.
‘숨겨진 곳이라고 했는데 왜 내 눈에는 보이는 거지?’
여기가 아닌가?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이곳만큼 악취가 심한 곳은 없었는데.
나는 슬쩍 별궁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대공저를 통과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젤리 같은 막을 통과하는 느낌?
다만 대공저를 통과할 때는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면 여긴 매우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이곳이 맞아. 그렇다면 내가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보이는 건가?’
나는 별궁을 눈으로 훑으며 주의 깊게 살폈다.
다른 별궁들과 달리 관리되지 않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특별히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런 큰 궁을 숨겨놓은 거지?’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대공이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대공의 신력은 이렇게 불쾌하지도 악취가 나지도 않으니까.
‘그럼, 도대체 누구지?’
황제? 황태자?
지금으로선 두 사람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이곳을 숨겨 놓은 이유가 뭘까?’
의문을 품은 채 별궁 내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결계로 보이는 걸 통과하자 이전까지 들리지 않던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비어 있는 게 아니었어?’
분명 바깥에서 볼 때는 암흑에 휩싸인 듯 불빛 하나 보이지 않고 인기척도 없었는데.
나는 황급히 그늘진 곳으로 몸을 숨겼다.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한 명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별궁 벽에 바짝 몸을 기대었다.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라고는 하나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녀?’
얼핏 하얀색이 스쳐지나가기에 힐끔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복장의 젊은 여성 두 명이 보였다.
검은색 원피스에 하얀색 에이프런. 분명 하녀들의 복장이었다.
‘하녀들이 이 밤중에 왜?’
청소를 하러 왔다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때 마치 나를 재촉하듯 시스템창이 깜박거렸다.
『00 : 31 : 35 』
나는 얼른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별궁 안쪽으로 들어가니 두 개의 건물이 아담한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가로등이 정원을 밝히 비추고 있었다.
죽은 땅처럼 황폐했던 별궁 주변과는 달리 이곳은 아기자기하게 꽃과 잔디로 꾸며져 있었다.
마치 바깥과는 다른 세계 같았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꽃이 만발해 있음에도 꽃향기는 전혀 나지 않고 악취만 진동한다는 점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못 느끼는 건가?’
조금 전 지나간 하녀들을 떠올려 보니 그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것 같다.
정원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신 스킬을 사용하고 있다고는 하나 안심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최대한 건물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외곽으로 돌고 있는데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인은 굽이치는 은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누구지?’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음에도 고아한 자태가 느껴졌다.
“마담, 날이 서늘합니다.”
그때 나이 지긋한 사용인이 다가가 그 여인에게 숄을 걸쳐주었다.
“고맙네.”
여인이 사용인을 향해 몸을 돌리자 그제야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여인은 30대 후반쯤 되어 보였는데 가냘프고 청순한 외모였다.
말투나 걸음걸이, 손짓 하나조차 우아한 걸 보니 귀족임이 분명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귀족이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지나쳤을 만도 한데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못 본 캐릭터였다.
“오늘 수확제가 열렸겠네.”
여인이 외궁이 있는 방향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뒤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사용인이 그 여인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이런 구석진 별궁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이지 않나.
저 여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설마 감금시켜 놓은 건 아니겠지?’
별궁 너머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슬퍼 보이는 게 영 미심쩍었다.
황태자?
아니야.
올해 스무 살인 황태자보다 나이가 많은 데다 자유연애를 부르짖던 사람이 굳이 연인을 숨겨둘 리가 없었다.
그럼, 황제?
황태자보단 가능성이 컸지만 납득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와 황후가 금실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다.
황태자도 황후의 소생이지 않나.
만약 후궁을 들이고 싶었다면 당당하게 들이면 될 터. 이렇게 숨겨둘 이유가 없었다.
그때 타이머 창이 경고하듯 깜박거렸다.
『00 : 29 : 58 』
타이머를 살펴보니 스킬 사용 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벌써 시간이…….’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30분 이내에 매개체 12개를 찾고 이 별궁을 벗어나야 한다.
그뿐인가? 내궁 출입문까지 통과할 때까지 스킬을 유지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도대체 매개체는 어디에 있는 거야?’
정이십면체의 검은 돌을 찾으라고 했는데.
검은 돌, 검은 돌.
시스템의 힌트를 읊조리며 바닥을 쳐다보았지만 잔디로 뒤덮여 있어 돌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어. 이건 뭐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잖아.’
일순 짜증이 솟구쳤다.
엔딩을 보는 순간 반드시 시스템을 때려 부수고 말리라.
오늘도 몇 번째일지 모를 다짐을 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돌의 크기가 얼마만한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정원이 제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돌이 있을만한 환경이니까.
‘아까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이 돌길이었던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여자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정원 한가운데에서부터 사방으로 이어진 길이 색색의 조약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저 곳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문제는 은발의 여인과 사용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점인데.
혹시라도 가까이 다가갔다가 이상함을 눈치채면 어떡하나 싶어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곳부터 살펴봐야 하나?’
그때 여인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여인은 정원을 벗어나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와아, 다행이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다시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더 이상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좋았어.’
얼른 달려가 조약돌로 포장된 길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양한 색깔의 조약돌이 모여 있었지만 그 중 검은색은 보이지 않았다.
‘왜 검은색만 없는 거야?’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으로 정원의 중앙에 이르렀는데.
‘……있다.’
방금 전까지 여인이 서 있던 그 자리에 성인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돌이 박혀 있었다.
이게 정십이면체인가?
바닥에 박혀 있어 정확한 모양을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맞는 것 같았다.
바로 해머를 소환하자 미스릴의 차가운 감촉과 함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지난번 모울링 퀘스트에서 결정석을 획득한 덕분에 얼마 전 아다마스 해머를 강화한 참이었다.
파괴력이 30% 높아졌고 손잡이는 두 배로 늘어나 자유자재로 길이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해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해머는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니 괜찮겠지.’
나는 크게 팔을 휘둘렀다.
쾅!
해머가 정확히 검은 돌을 내려찍자 손바닥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검은 돌이 파사삭 깨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해머가 다른 것과 부딪힐 때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진동도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힐끗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히 이곳으로 달려오는 이는 없었다.
‘휴,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히든 퀘스트> ‘숨겨진 궁을 찾아라!’
목표 : 오염의 매개체 (1/12)』
‘언제 11개를 다 찾나.’
『 00 : 25 : 18 』
타이머를 보니 한숨만 나왔다.
‘서둘러야겠네.’
그 뒤로 조약돌 길을 눈이 빠져라 찾아봤지만 더는 검은색 돌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큰일이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는데 남은 매개체를 찾아낼 방법은 요원하기만 했다.
‘어떡하지? 시스템, 뭐 좀 더 내 놔 봐.’
이러다 내 명성 다 날아가겠어.
그냥 다 때려 부술까? 그러다 보면 몇 개 걸리지 않겠어?
띠링!
갑자기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아다마스 해머에 새로 추가된 기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해머를 강화하면서 몇 가지 추가 기능이 생겼는데 길이 조절 기능 외에도 탐지 기능이라는 게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해머의 길이를 늘이는 건 필요하지 않으니 탐지 기능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맞아! 사악한 기운이나 주술 같은 걸 탐지할 수 있다고 했었지.’
나는 바로 ‘예’를 선택했다.
해머의 다이아몬드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해머를 손에 든 채로 정원을 돌기 시작했다.
‘이거 꼭 수맥 탐지 하는 것 같잖아.’
황당해 하면서도 부지런히 걸음을 놀렸다.
정원에선 더 이상 매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는 아까 그 여인이 들어갔던 저택 반대편에 있는 건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3층 높이의 건물은 특별히 눈에 띌만한 점은 없었다.
그래도 해머를 주시하고 있는데 영롱하게 빛나던 다이아몬드가 갑자기 어둡게 물들어 버렸다.
‘여기구나.’
해머가 반응한 곳은 현관 앞이었다.
현관을 자세히 살피는데 그 위에 자리하고 있는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개처럼 보이기도 하고, 늑대처럼 보이기도 한 이상한 동물 조각상의 두 눈이 검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손이 안 닿겠는데?’
족히 내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높이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드루이드의 과녁을 장착한 뒤 그대로 해머를 날렸다.
붕.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해머가 조각상을 깨끗하게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혹시나 건물 안에서 사람이 나오진 않을까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건가.’
작은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맞은편 건물로 달려갔다.
정원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건물은 모양이 똑같았다.
그렇다는 건 맞은편 건물에도 오염 매개체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대로 현관 위에 이상한 동물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눈에는 검은 돌이 박혀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해머를 날렸다.
정통으로 조각상을 맞춘 해머가 가볍게 내 손에 돌아왔다.
그때 은발의 여인을 모시고 들어갔던 사용인이 갑자기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