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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62)화 (62/140)

62화

“아쉽다. 정말 예뻤는데.”

마차가 출발하자 애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내 목에 걸려 있는 심플한 진주 목걸이에 닿아 있었다.

그가 선물해 준 카라나이트 목걸이는 정말 아름다웠지만 착용하고 갈 수는 없었다.

애런의 선물이라서가 아니라 오늘 카라나이트로 주목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애런을 설득했고 그는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그럼에도 많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다음엔 꼭 네가 선물해 준 목걸이를 하고 갈게.”

그때쯤이면 카라나이트가 인기를 끌고 있을 테니까.

애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랑 함께 수확제에 참석하다니 조금 신기하다.”

들뜬 목소리에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감추고자 밝게 미소 지었다.

1회차 때에도 그는 똑같은 말을 했었다. 내 파트너로서 무도회에 참석하는 게 신기하다고.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이었을까.

씁쓸함이 입안에 감돌았다.

“오늘 즐겁게 보내자.”

“그래.”

오늘이 바로 로벨라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D-day인데 즐겁게 보내야지.

벌써부터 사람들의 반응이 기대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새 창문 너머로 위용이 넘치는 새하얀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궁의 3대 행사인 봄의 연회, 여름의 장미 축제, 가을의 수확제는 각기 다른 연회홀에서 진행된다.

그 중 가을의 수확제는 규모가 제일 큰 행사이기 때문에 가장 화려하고 큰 다이아몬드 홀에서 열렸다.

홀 입구에 서자 커다란 문에 새겨진 황금 월계수와 그 아래로 늘어뜨려진 과일과 덩굴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를 호명하는 시종의 외침을 들으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어머, 오늘 케인 영애의 차림새가 평소와는 좀 다르네요.”

당혹감이 깃든 목소리와 함께 차르륵 부채가 펼쳐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게요.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쯧쯧.”

“하긴 저 같아도 열과 성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친구가 저를 죽이려 했다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평소보다 덜 꾸민 모습에 귀부인들과 젊은 영애들이 수군댔다.

“이럴까봐 선물을 준비한 거였는데.”

애런이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내가 오늘 화려하게 꾸미고 왔다면 그것대로 입방아를 찧었을 거야.”

어쩌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냐 또는 멍청해서 상처도 안 받는 거냐며 비난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제페스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가지고 논 거 아니냐며 비웃었겠지.

이러나저러나 비웃음을 살 바에야 내 잇속을 챙기는 게 훨씬 나았다.

“사람들이 왜 자꾸 널 오해하는지 모르겠어.”

애런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도닥였다.

‘그거야 명성이 마이너스니까 그렇지. 기다려 봐. 조만간 달라질 테니.’

나는 애런에게 전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화사하게 웃었다.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그러자 다시 부채가 물결쳤다.

“늘 화려하게 꾸미고 다녀서 저런 청아한 모습은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쁘네요.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 건가요?”

누군가의 감탄 어린 말에 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슬쩍 애런을 쳐다보니 찌푸려졌던 얼굴이 조금 풀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케인 영애의 파트너가 하퍼 공자네요.”

“어릴 적부터 친구잖아요.”

“의외로 잘 어울리지 않나요?”

“사실 전 예전부터 왜 저 두 사람이 사귀지 않는지 궁금했었어요.”

“여태 친구로 지내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요? 연인으로 삼기에는 케인 영애의 성격이…….”

“맞아요. 하퍼 공작가처럼 유서 깊은 가문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케인 영애를 받아들여 주겠어요?”

지난 1회차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들이라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애런은 다른 모양이었다.

“저런 헛소리에 마음 쓰지 마.”

음성에 날이 서 있었다.

더불어 우리를 보고 수군대던 여인들이 움찔하는 걸 보니 애런이 노려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틀린 말도 아닌 걸.”

진정하라며 애런의 팔을 다독이자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틀린 말이 아니라니. 난 널…….”

“공작님이 날 탐탁지 않아 하시는 건 사실이잖아.”

그 말엔 반박할 수 없는지 애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당황으로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에 나는 쓰게 웃었다.

그를 비난하려거나 원망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애런의 감정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듣고 싶지 않아 꺼낸 말이었을 뿐.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안 써.”

매 회차마다 최악이었던 평판을 끌어올려 끝내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었다.

이번에도 자신 있었다. 그러니 뭐라고 나를 비웃듯, 무시하든 상관없었다.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너는 알잖아. 그거면 됐지, 뭐.”

네가 날 배신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지만 지금의 너는 그때의 네가 아니니까.

아직은 나를 아껴주는 든든한 친구일 테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던 푸른 눈동자가 밤바다처럼 깊게 일렁였다.

“애런, 오랜만에 보는구나.”

다행히 불편한 침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우리가 입장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호탕하게 웃으며 다가오셨기 때문이었다.

“백작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야 잘 지냈지. 근위대 들어가고 나서 바쁘단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살이 좀 빠졌구나.”

아버지께서 애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작게 혀를 찼다.

“살이 빠지진 않았는데.”

“빠지지 않았긴. 근위대 훈련이 고된 걸 모르는 사람도 있다더냐. 신입이라 일도 많을 거 아니니.”

애런이 머쓱하게 뺨을 매만지자 아버지께서 애런의 어깨를 툭툭 도닥이셨다.

“언제 백작저로 한 번 놀려오려무나. 영양보충 좀 시켜줘야겠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애런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풀렸다.

둥글게 휘어진 눈매와 꾸밈없는 미소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이런 모습은 나와 우리 아버지 앞에서만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못마땅한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는 하퍼 공작이 보였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1회차 때 받은 무시와 냉대를 생각하면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아버지와 아는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황족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클로디안 체바노 호엔 아카르트 황태자 전하와 카밀라 체임버 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문으로 향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황태자와 카밀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녀의 드레스 좀 보세요. 처음 보는 디자인이지 않나요?”

“지난번에 약혼 발표하실 때는 셀렌느의 드레스를 입으셨었는데.”

“그야 황태자 전하의 의상을 전담하고 있는 곳이 셀렌느였으니까 그랬겠죠.”

귀부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밀라의 드레스를 유의 깊게 살폈다.

현재 최고 인기를 누리는 셀렌느의 드레스는 벨 라인 형태로 대부분 원색을 사용했다.

또한 리본이나 러플 장식을 많이 달아 전체적으로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그에 반해 카밀라가 입은 드레스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상아색 공단 위에 연보라색의 시폰이 덧입혀진 형태로 시폰에는 꽃문양 자수가 섬세하게 놓여 있었다.

허리 아래로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라인 탓에 카밀라가 움직일 때마다 치맛자락에 새겨진 꽃문양들이 살랑거렸다.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느낌이었다.

“황태자 전하와 의상을 맞춘 걸 보니 두 분이 같은 의상실에서 맞추신 것 같아요.”

황태자도 채도가 낮은 보라색 연회복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보다 장식을 줄인 대신 옷의 라인이 섬세하게 살아 있었다.

“셀렌느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여요.”

“그러게요. 요즘 셀렌느 옷에 조금 질린 감도 없지 않았는데. 새롭고 좋은데요?”

“어느 의상실에서 옷을 맞추신 걸까요?”

의상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분주하게 정보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번에 두 사람의 의상을 담당한 곳은 ‘페시나’라는 의상실이었다.

디자이너의 실력과 감각이 뛰어나지만 의상실이 메인 스트릿을 벗어나 있어 알려지지 못한 곳.

한창 유행하고 있는 셀렌느 의상실의 디자인과는 결이 다른 탓에 주목받지 못한 곳.

그런 의상실을 발굴해 낸 것이 바로 나였다.

내가 페시나를 알게 된 것은 2회차 때 황태자와 연인이 되면서였다.

이미지 변신과 사교계의 흐름을 주도하기 위해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했고 페시나를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번 회차에서도 페시나를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유명한 의상실과 구두점 그리고 보석점이 모여 있는 메인 스트릿, 엘버나 거리는 이미 포화 상태.

상점을 낼만한 자리도 없을 뿐더러 주목받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비싼 건물세를 생각하면 수익성면에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니 새로운 곳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엘버나 거리가 붐비는 이유는 요즘 가장 유명한 셀렌느 의상실과 타우라 보석점이 있기 때문이다.

두 곳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엘버나의 상권을 활성화시킨 것이었다.

그때 딱 떠오른 곳이 페시나 의상실이었다.

페시나가 있는 톨린 거리는 엘버나 거리엔 미치지 못해도 나름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고 카페도 많았다.

기본 조건은 갖춰진 셈이니 이제 내 보석점과 페시나 의상실의 이름만 알리면 되었다.

‘옷과 보석을 홍보하려면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필요하지.’

이 세계에는 영상 매체 광고가 없으니 사람들이 직접 입고 착용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홍보 모델을 따로 알아볼 필요가 있나. 동업자가 황태자의 약혼자인데.’

부르지 않아도 홍보 모델께서 알아서 찾아와 주셨길래 알차게 이용해 드렸다.

가게를 찾아왔던 황태자에게 요구한 것은 세 가지.

수확제 때 카밀라와 함께 페시나의 의상을 입어줄 것.

로벨라에서 가장 비싼 카라나이트를 목걸이를 구입해 줄 것.

마지막으로 그 목걸이를 내가 정한 사람에게 선물할 것.

이 세 가지를 들은 황태자는 역시나 벗겨 먹으려 할 줄 알았다며 툴툴댔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마지막 요구 사항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머.”

카밀라의 드레스에 대해 논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그녀가 하고 있는 목걸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카밀라가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가 달린 샹들리에 아래 선 순간.

물방울 모양으로 늘어뜨려진 30캐럿의 카라나이트에서 바이올렛 블루의 오로라가 펼쳐졌다.

일순 다이아몬드 홀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수확제에 참석한 이들 모두 카밀라의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성공했네.”

애런이 내 귓가에 속삭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황태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가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이 정도면 만족하냐는 눈짓에 정말로 기쁘게 웃어주었다.

벌써부터 명성 스탯이 줄줄이 올라가는 환상이 보인 탓이었다.

그 순간,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던 황태자가 갑자기 멈칫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황태자 주위를 살펴봤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다시 황태자를 보았을 땐 그는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잘못 본 것인가?’

뭐,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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