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조이, 오늘은 수수하게 꾸며줘.”
나는 화장대 앞에 앉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야 어떻게 꾸며도 아름다우시지만 무려 수확제 무도회인데 좀 더 화려하게 꾸미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음, 안 돼.”
“왜요? 언제 어디서든 아가씨께서 주인공이 되셔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잖아요.”
조이가 화장대의 거울 너머로 날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한 번 보면 절대 눈을 뗄 수 없도록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는 이들마다 눈이 멀어 버리도록.”
아련하게 눈을 뜬 조이가 연극조로 외쳤다.
“황궁 무도회 때마다 항상 아가씨께서 주문하셨던 거잖아요.”
아휴, 회차 때마다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낯부끄러워 죽겠네.
저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로웨나의 설정이었지.
“어쨌든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 되면 안 돼.”
“왜요?”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거든.”
“주인공이 따로 있다고요?”
이해가 가지 않는지 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나보다 그 주인공이 주목을 받아야 해.”
그래야 내가 돈을 벌고 명성을 얻을 수 있단다.
조만간 명성 스탯이 죽죽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 아가씨께서는 거적때기를 입고 계셔도 빛이 나실 텐데요.”
조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우리 아가씨가 최고.’라는 자부심과 진심이 담긴 말간 눈빛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이번 사업 성공하면 우리 조이 보너스 넉넉하게 챙겨줄게.”
“네? 아휴, 아가씨도 참.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조이는 내 사업이 망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망해 하면서도 보너스에 대한 기대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다들 내 사업이 언제 망할지 내기를 걸고 있다던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보내는 신뢰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로벨라를 개업한 지 벌써 2주.
내가 벨라인 상단과 손을 잡고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우리 가게가 아니라 도박장이었다.
다들 내 사업이 언제 망할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나 뭐라나.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황당했던지.’
욱하는 마음에 그들 반대편에 돈을 왕창 걸어버렸다.
‘두고 보라고. 모두 내기에 돈을 건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조이, 너만 믿을게.”
“네. 최선을 다해 볼게요.”
화장도구들을 손에 쥐고 있던 조이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평소와는 달리 수수한 모습의 내가 거울 너머에 서 있었다.
“흠, 아가씨. 아무래도 사람들의 주목을 피하는 건 어렵겠는데요?”
“그런가?”
나는 조이와 함께 거울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남색 드레스는 장식을 최소화하여 심플했고 화장도 평소와 달리 연했다.
웨이브를 주어 올린 머리에는 진주 장식 하나만 꽂았고 귀걸이와 목걸이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웨나의 미모는 조금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절제된 차림 탓에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와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이목구비가 도드라져 보였다.
“여기서 더 줄일 수 있는 것도 없어요.”
조이가 울상을 지었다.
‘어쩌겠어. 세계관 최고 미인이라는 로웨나의 설정 탓이지.’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청아한 미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했어.”
조이를 달래주며 거울에서 시선을 떼었다.
뭐, 오늘 주인공들이 미모가 떨어지는 이들도 아니고 힘을 팍팍 주어 꾸미고 올 테니 괜찮겠지.
편하게 생각하며 화장대 위에 꺼내 놓은 목걸이들을 살폈다.
오늘은 목걸이도 작고 심플한 것으로 할 생각이었다.
“이 진주 목걸이는 어때?”
“오늘 드레스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조이가 목에 걸어주겠다며 목걸이를 드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나, 나야. 들어가도 돼?”
애런의 목소리에 잠시 긴장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말끔하게 차려입은 애런이 들어왔다.
그는 앞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내 드레스에 맞추어 짙은 남색 연회복을 입고 있었다.
단정하고 절제된 멋이 있는 제복과는 달리 오늘 입은 정장은 뭐랄까.
세련되면서도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느낌이었다.
“와, 공자님. 오늘 너무 멋있으세요.”
“어, 고마워.”
조이가 눈을 빛내며 말하자 애런의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로나, 준비 다…….”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 애런이 눈을 크게 뜬 채 굳어버렸다.
“애런?”
“…….”
“애런.”
한 번 더 그를 불러봤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가씨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넋을 놓으셨나 봐요.”
조이가 웃음을 흘리며 내게 속삭였다.
그러며 아무래도 오늘 계획은 실패한 것 같다고 탄식했다.
애런과 무도회 파트너가 된 건 이번 회차에서 오늘이 처음이었다.
설정상 17살 데뷔탕트 때에는 아버지가, 그 이후로는 죽 제페스가 파트너였으니까.
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린 애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1회차 때 애런과 연인이 되면서부터는 늘 함께 무도회를 갔었기에 이렇게 나를 데리러 오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때마다 놀라면서 예쁘다는 말을 해주긴 했지만.
‘이 정도로 넋이 나간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런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애런.”
“아.”
마치 내 손짓에 마법이 풀린 것처럼 애런이 침음을 내뱉었다.
“괜찮아?”
“어, 괜찮아.”
애런이 머쓱해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나를 살폈다.
“오늘 ……정말 예쁘다.”
쑥스럽게 말을 전한 애런의 귀가 가을 단풍처럼 달아올랐다. 더불어 호감도도 25%로 올라갔다.
3회차 동안 처음 보는 모습에 조금 신기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취향인 건가?’
나는 슬쩍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지난 회차를 통틀어 무도회에 가면서 이렇게 수수하게 꾸민 건 처음이긴 했다.
‘그렇지만 평소에도 별로 꾸미고 다니진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차이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마워. 너도 오늘 멋있어.”
“아, 고마워.”
슬쩍 시선을 피한 애런은 이제 목덜미까지 붉어져 있었다.
나와 조이는 애런 몰래 눈짓하며 웃음을 참았다.
덕분에 애런과 함께 무도회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조금은 옅어졌다.
사실 애런이 수확제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말할 줄은 몰랐다.
보석점 개업을 축하하러 왔던 날, 애런은 가게를 떠나기 전 내게 파트너 신청을 했었다.
꼭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애런 딴에는 제페스와 일련의 일들을 겪었던 내가 걱정되어 제안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보단 애런과 함께 가는 것이 사람들의 비웃음과 무시를 덜 받을 테니까.
사실 난 별 상관없었다.
사람들의 그런 시선이야 익숙했고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내 명성은 오를 테니까.
오히려 내겐 애런과 함께 수확제 무도회에 가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
그래서 당장 거절하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스승님이랑 같이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나 그는 대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니 감히 제안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애런의 요청을 명분 없이 거절했다가 간신히 10%를 넘겨 놓은 호감도가 내려가면 어떡하나.
결국 애런의 파트너 신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다 했어?”
“아, 응. 거의 다했어.”
“목이 허전해 보이네.”
“안 그래도 목…….”
목걸이를 하려고 했다고 말하려는데 애런이 뒤에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건……?”
나는 로벨라 로고가 새겨진 상자를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를 주려고 샀던 거였어?’
선물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그 대상이 나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당황스럽게 애런을 쳐다보자 그가 목덜미를 매만지며 우물쭈물 말했다.
“처음으로 네 파트너가 되었는데 빈손으로 올 순 없어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상자를 바라보았다.
무도회 파트너가 상대방에게 선물을 하는 건 일종의 관례와도 같았다.
다만 드레스나 장신구는 연인 사이에나 사줄 법한 물품이었다.
대개 친구 사이에는 꽃이나 코사지 정도가 일반적인데.
‘이게 도대체…….’
지금 애런이 들고 온 목걸이는 카라나이트로 만든 목걸이로 상당히 고가 제품이었다.
“그날 보석점에서 이걸 보는 순간 네가 생각났었어.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았거든.”
애런이 상자의 뚜껑을 열자 영롱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어머나.”
카라나이트 목걸이를 본 조이가 감탄을 내뱉었다.
“내가 걸어줘도 될까?”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긴장하고 있던 애런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애런은 나를 전신 거울 앞에 세우고는 내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걸어주자 백금의 차가운 감촉과 목걸이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예쁘다.”
애런이 거울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선물해 준 목걸이는 연못 위로 활짝 피어난 연꽃을 닮아 있었다.
큼지막한 카라나이트를 중심으로 마치 꽃잎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였다.
내 하얀 살결과 대비되어 카라나이트의 바이올렛 블루 빛이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와, 이렇게 아름다운 목걸이는 처음 봐요. 아가씨께 너무 잘 어울려요.”
조이가 목걸이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홀린 듯 목걸이에 손을 대자 카라나이트의 매끈한 표면이 손끝에 부드럽게 감겨왔다.
“예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애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여전히 나를 감싸듯 뒤에 서 있는 탓에 애런의 속삭임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큼지막한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왔다.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애런과 거리를 벌렸다.
“고마워.”
애써 입가를 움직여 살포시 미소 짓자 애런이 마주 웃어주었다.
“사실 이 목걸이 주인이 나일 줄은 몰랐어. 다른 사람 선물인 줄 알았거든.”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전하자 애런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너 말고 이런 선물을 할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멋쩍게 웃는 애런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 그 여자는 만나지 않은 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개업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친구 사이에 주고받기에는 과한 선물.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상하게 애런이 자꾸 선을 넘어오려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겠지. 착각일 거야.’
나는 애써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