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결계를 세우는데 따로 필요한 건 없지 않나?”
카이스와 해리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필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정말. 아무래도 저희들을 기르실 때 주군께서 저 녀석에게만 특히 신력을 많이 부어주신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이 닮을 수는 없다며 해리가 한탄을 했다.
신의 사자라 불리는 여섯 마리의 신수들을 각자의 가디언들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아기오가 내려준 신수의 알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알을 골라 제 신력을 공급해 주면 신수가 태어났을 때 가디언의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필립과 해리도 그런 과정을 거쳐 카이스의 가디언이 된 것이었다.
“결계가 문제가 아니라 개업하는 가게를 방문할 때는 개업 축하 선물을 가져가야지.”
“아…….”
그제야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깨달은 필립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저라도 생각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필립이 자책 어린 얼굴로 카이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카이스는 어깨가 처진 필립과 가슴을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해리를 가만히 응시하다 툭 말을 내뱉었다.
“선물은 하고 왔다.”
“네에?”
우뚝 움직임을 멈춘 해리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카이스를 쳐다보았다.
필립도 어리둥절하게 카이스를 응시했다.
“아니, 주군. 방금 전에 빈손으로 가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무슨 선물을 하셨다는 거예요?”
해리가 테이블에 바짝 기대며 카이스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가게 뒤에 뜰이 하나 있더군.”
“혹시 그곳을 꾸며 주신 건가요?”
카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꽃으로 채우셨어요?”
“포인세티아.”
“아…….”
해리가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며 몸을 뒤로 기대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그 꽃의 꽃말이 ‘축하하다’라는 걸 아실까요?”
“몰라도 상관없다.”
“이왕이면 꽃말도 말씀해 주시면서 축하한다고 해주시지. 그냥 오셨죠?”
카이스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해리가 알 만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했어.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작게 읊조린 말에 툴툴대던 해리가 눈을 크게 떴다.
“주군, 그거 아세요?”
무엇을 말하는 거냐며 카이스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주군께서 아가씨께 유난히 유하시다는 걸요.”
“주군께서는 우리들에게도 관대하시다.”
“우리랑은 달라.”
해리가 필립의 말에 부정했다.
필립은 해리가 뭔가 알아챈 건 아닌가 싶어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생각해 봐. 내가 카지노를 인수했을 때 주군께서 찾아오신 적이 있어?”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가게를 연 목적도, 데이먼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다르다는 건 알지.”
해리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어디 우리 주군께서 축하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직접 뜰을 꾸며주실 분이시냐고.”
“그건 아가씨께서 주군의 신술에 대해 잘 아시니까…….”
“만약 내가 새로운 가게를 개업했다고 쳐. 개업 선물을 해 달라고 조르면 뭐라고 하실 것 같아?”
필립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슬쩍 카이스의 눈치만 보았다.
“그냥 이렇게 슥 보시고 가버리실 걸?”
필립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것을 가까스로 멈추었다.
“무엇보다 꽃이라니. 주군께서 꽃을 선물할 생각을 하셨다는 것 자체가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고.”
“해리.”
해리가 점점 도를 넘는 것 같아 필립이 슬그머니 주위를 주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해리가 카이스의 눈치를 봤다.
카이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요. 주군께서 여인에게 꽃을 선물하신 건 처음이시잖아요.”
해리가 멋쩍게 웃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카이스는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았다.
로웨나와 가디언은 다르다.
가디언은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였다. 절대적으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존재.
로웨나는…….
아직 완전히 믿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인간이니까.
인간은 제 욕심에 따라 언제든 맹약도 깨뜨려 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지난 백 년의 시간이 증명해 주지 않았나.
또한 등을 맡길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아직 그녀의 실력은 가디언들에 비해 한참 못 미치니까.
그럼에도 로웨나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존재임은 분명했다.
무려 신벌에서 자신을 깨운 존재이자 폴루티아를 정화하는 자이니.
데이먼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그녀가 다른 이유는 그것 외에는 없었다.
문득 실레니아 호수에서 보았던 로웨나의 슬픈 얼굴이, 엄마를 부르며 애절하게 매달려 오던 손길이 떠올랐다.
카이스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매만지던 그가 손에 걸리는 딱딱한 감촉에 멈칫했다.
“스승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기대 어린 눈빛으로 상자를 내밀던 로웨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녀가 만들어 주었던 포리지를 먹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선물이랍시고 신술을 사용한 것은.
‘그래, 그래서였을 거야.’
아직 반려의 인(印)이 새겨진 심장엔 누군가에게 내어줄 마음 따윈 없었다.
‘인(印)이 사라져도 그렇겠지.’
에이바를 생각하니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카이스는 애써 통증을 무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카밀라 체임버.”
“아, 넵.”
카이스가 카밀라를 언급하자 해리가 자세를 바로 했다.
“베히른 홍수를 예측했었다고 했지?”
“네.”
신의 사자들 중에 예지 권능을 가진 이는 없다.
아기오께서 예지 권능만큼은 그 누구에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래를 예지한 자가 나타나다니.
“정말 인간이 맞나?”
“몇 번이고 확인해 봤지만 인간이 맞습니다.”
“우리가 잠든 사이 새로운 신수가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랬다면 제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저도 해리와 함께 확인해 봤지만 신력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필립도 해리와 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정말 그 카밀라라는 여자가 신수라면 조금 전 로웨나의 보석점에 갔을 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 여자가 안에 있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데이먼의 수하일 가능성은?”
“아직까지 데이먼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요력도 느껴지지 않고요.”
‘그럼, 어떻게 홍수를 예견한 것일까?’
카이스가 미간을 좁혔다.
“주군, 제가 베히른 홍수에 관해서 좀 더 조사해 봤는데요.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말해보라며 카이스가 눈짓했다.
“베히른 홍수가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카밀라 공녀가 황태자에게 홍수를 예견했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카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홍수가 발생하자마자 제일 먼저 구호를 나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로웨나 아가씨입니다.”
카이스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홍수가 일어났을 시점에 로웨나가 갑자기 베히른에 가야 한다며 훈련을 미뤘던 것이 기억이 났다.
“케인 백작가라면 구호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데 어렵지 않았겠지.”
“물론 그렇지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가씨의 보좌관이 구호 물품을 미리 사들였단 겁니다.”
“제국은 매해 홍수가 난다. 미리 대비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않을까?”
필립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동안의 아가씨 행보와 평판을 보면 홍수가 났다고 해서 나서실 분이 아니시거든. 그것도 미리 물품까지 구비해 가면서 말이야.”
로웨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 카이스의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설명에 열중하고 있던 해리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필립은 알아챘다.
“뭐, 그건 차치하고 물품 구입 시기가 공교롭단 말이지요.”
해리가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홍수가 일어나기 딱 3주 전부터 공격적으로 물품을 구입했어요. 그것도 영지 하나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많이요.”
“넌 지금 로웨나 아가씨께서도 베히른 홍수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을 거라 의심하는 건가?”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필립의 물음에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공녀가 아가씨께 홍수에 대해 알려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여. 그때는 두 분 사이에 친분이 전혀 없었으니까.”
필립과 해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로웨나와 공녀, 각각 홍수를 예지했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현재로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결론이에요.”
“아가씨께선 폴루티아에 관해 계시몽을 꾸시잖습니까? 그 계시몽이 확장된 건 아닐까요?”
필립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엄밀히 말하면 베히른 홍수가 일어난 이유는 폴루티아 때문이지 않습니까? 케루나 폭설도요.”
“로웨나는 케루나의 마수에 대해서는 알아도 폭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눈보라가 날리는 광경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었으니까.
문득 로웨나가 제게 새끼손가락을 걸던 모습이 떠올랐다.
‘눈, 보여주기로 했었지.’
카이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원으로 향했다.
‘사흘 후에 온다고 했으니 준비해 놓아야겠군.’
물 흐르듯 이어진 사고에 카이스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케루나 폭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주군께서 조사해 보라고 하신 것 있잖습니까?”
카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루나에서 데이먼을 놓친 날 산 아래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은 황실 기사단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폴루티아 지역에 기사단을 보낸 적 없는 황실이 무슨 일로 케루나에 기사단을 파견한 것인지.
일반적인 폴루티아와는 양상이 달랐으니 폴루티아인 줄 모르고 찾아왔을 것이 분명하나 폭설 때문이라고 해도 의문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케루나에 폭설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고작 이틀인데.
어찌 알고 왔단 말인가.
황도와 케루나는 적어도 2주가 넘는 거리인데 말이다.
그래서 해리에게 알아보라고 한 것이었다.
“황태자가 내린 명령이랍니다. 케루나 지역을 시찰하며 방책을 보수하라고요.”
“우연이란 말인가?”
카이스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아닌 것 같습니다. 기사단에 제설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이 지급되었거든요. 부상을 대비한 포션도요.”
“눈사태를 예상했다는 것이군.”
그날 로웨나가 케루나를 정화시키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눈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황태자는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던 것이 분명했다.
“황태자에게는 예지 능력이 없다.”
“하지만 약혼자인 카밀라 공녀에게는 있지요.”
“이번에도 그 여자가 한 일인 것인가.”
“확실해요.”
해리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카이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로웨나에게도 그 여자가 먼저 접근한 것인가? 황태자에게 접근했던 것처럼?”
“네. 알아본 바로는 아가씨와 동업하고 있는 벨라인 상단주에게 이름을 속이고 편지를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해리가 로웨나와 카밀라가 동업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해리, 그 여자를 주시하도록. 내 제자에게 허튼 짓을 하면 안 되니.”
“걱정하지 마세요. 최우선적으로 감시하고 있어요.”
데이먼은 간교하고 비열한 놈이라 로웨나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도 직접 나서진 않을 것이다.
백 년 전 황제를 움직여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처럼 인간들을 이용하겠지.
카밀라 체임버.
여러 모로 의심스러운 자다. 데이먼이 이용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고.
왜 하필 그런 존재가 로웨나에게 달라붙은 것인지.
“사람 보는 안목을 기르려면 뭐부터 가르쳐야 할까?”
카이스의 중얼거림에 해리와 필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