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이제야 정신을 차리는군.”
“정말 스승님이세요?”
나는 대공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거친 살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스승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내게 보호술을 걸어놓았다는 건 알지만 오늘 쓰러지지도, 목숨이 위태롭지도 않았는걸.
“내일이 개업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제가 그런 말을 했었어요?”
언제 그랬지?
“개업 준비 때문에 이번 주는 훈련을 못하겠다고 말해놓고 잊었나 보군.”
아, 맞다. 말없이 훈련을 빠질 수 없으니 미리 얘기했었지. 그때 말했었구나.
요즘 개업 준비로 도통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오락가락했다.
“그런데 제가 가게 위치도 알려드렸나요?”
그건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정말 바빴나 보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니.”
대공은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내게 신력을 퍼부어 주었다.
“저, 아픈 거 아니거든요?”
나는 커다란 손을 붙잡아 내리며 투덜거렸다.
기력이 회복되는 건 좋은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대공은 내게서 손을 물리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별일은 없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안부 인사다.
문제는 그 인사를 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대공이라는 점이었다.
대공을 만난 이후로 저런 평범한 안부 인사를 들은 적이 있었나.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개업일을 기억해서 찾아온 것도 기함할 일인데 안부까지 묻다니.
나는 손을 뻗어 대공의 이마에 척 가져다 대었다.
대공이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힐끗 내 손을 쳐다보았다.
그 눈짓이 ‘뭐하는 짓이냐고.’ 묻는 것 같아서 대답을 해주었다.
“아프신 건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요.”
사람이 안 하던 일은 하면 죽는다던데.
신력이 무한대인 대공이 죽을 것 같진 않지만 지난번처럼 아팠던 건 아닌가 조금 마음이 쓰였다.
‘열은 없는데. 안색도 괜찮아 보이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대공이 한숨을 쉬며 내 손을 떼어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건가?”
“일이 없긴요.”
내 대답에 일순 대공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러나 싶어 의아했지만 일단 대답을 마무리 지었다.
“개업 준비로 얼마나 바빴는데요. 지금도 겨우 잠깐 숨을 돌리고 있었던 걸요.”
게다가 불청객이 두 명이나 찾아와 정신을 쏙 빼 놓았었지.
툴툴거리고 있는데 굳어 있던 대공의 표정이 풀어지는 게 보였다.
“스승님,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오늘 좀 이상하세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대공이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별 일이 없다면 됐다.”
그 말만하고 바로 사라지려고 하길래 얼른 팔을 붙들었다.
“진짜 가시려고요?”
여기서 더 뭘 해야 하냐는 의문의 눈빛에 입을 비죽 내밀었다.
“개업 축하하러 오셨다면서요. 축하 선물은요?”
대공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에 따라 가지런한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거렸다.
“설마 빈손으로 오신 건 아니죠?”
무표정한 얼굴 위로 미미하게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불 같이 분노하는 건 봤어도 당황하는 건 처음 보는 지라 순간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오연하고 무심한 사람을 당황케 했다는 사실이 꽤나 유쾌했다.
“스승님께서 찾아와 주신 게 선물이죠, 뭐. 다른 게 필요하겠어요?”
대공에게 선물은 너무 과한 기대지.
그의 성정으로 볼 때 이렇게 직접 찾아와 준 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가게 구경시켜 드릴까요? 아, 안에 저희 직원들이랑 동업자들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동업자라면?”
“제가 말씀 드린 적 없죠? 벨라인 상단의 상단주와 카밀라 공녀님과 함께 사업을 하고 있어요.”
카밀라를 언급할 때 대공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것도 같았는데.
잘못 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애런 때문이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대공에게 물었다.
“혹시 상단주와 공녀님을 만나본 적 있으세요?
“없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손에 박혀 있던 가시가 빠진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대공의 성정이라면 이런 일로 내게 거짓말을 할 리 없을 테니까.
“가게 구경은 ……나중에 하도록 하지.”
“정말 가시려고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감도를 높이려면 매일 봐도 모자라건만 벌써 일주일이나 못 보지 않았나.
아직 호감도를 올릴 만한 포인트도 만들지 못했는데 벌써 가면 어떡해?
대공을 붙잡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아, 맞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거 스승님 드리려고 준비한 거예요.”
불쑥 상자를 내밀자 대공이 가만히 상자를 응시했다.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길래 할 수 없이 내가 직접 상자를 열어 주었다.
뚜껑이 열리고 카라나이트 위로 석양이 내려앉자 짙은 청색이던 카라나이트가 적자색으로 빛났다.
황태자나 애런과 같은 극적인 반응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놀라는 반응을 기대했건만.
대공의 무심한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이번에 새로 발견한 카라나이트라는 보석이에요. 예쁘죠?”
반응 좀 보여 달라고 상자를 더욱 들이밀자 대공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와 상자를 받았다.
“스승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말로는 이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마음에 드세요?”
여전히 커프스 버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대공이 손으로 카라나이트 매만졌다.
“……아름답군.”
드디어 나온 긍정적인 반응에 대공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슬쩍 확인한 호감도가 22%.
‘오늘도 한 건 했군.’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황태자와 애런으로 인해 받았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거 착용하신 모습 보여주세요. 잘 어울리실지 궁금해요.”
이 상승세를 타고 조금 더 진도를 나아볼까 싶어 던진 말인데 대공이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커프스 버튼을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나겠지.’
스승님, 많이 바라지도 않아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절 생각해 주세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바람을 속으로나마 간절히 전해 보았다.
“훈련은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나?”
“이틀 뒤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저 하루만이라도 쉬고 싶거든요.”
훈련에는 칼 같은 대공이라 불쌍한 척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정말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빴기 때문에 엄살이 아니었다.
게임에 빙의한 이후로 이 정도로 바빴던 적은 없었으니까.
“사흘 뒤부터 시작하지.”
오~ 하루 늘려주셨어. 웬일이래.
나는 횡재했다고 생각하며 그 제안을 넙죽 받아들였다.
“네. 그럼, 사흘 뒤에 찾아뵐게요.”
여느 때처럼 인사도 없이 바로 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대공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면서.
“스승님?”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의아해하고 있는데 대공의 발밑에 갑자기 붉은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
의문도 잠시.
가게 뒤편에 자리한 작은 뜰에 붉은색 포인세티아가 빼곡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얼떨떨하게 대공을 쳐다보자 그가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
“축하 선물.”
“아…….”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나는 멍하니 포인세티아를 바라보았다.
포인세티아의 붉은색과 초록색 잎사귀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하게 색채감을 뽐냈다.
붉은 잎사귀 사이에 자리 잡은 노란색의 꽃은 작고 둥근 모양이 방울이 달린 것처럼 앙증맞고 귀여웠다.
지난번 실레니아 호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전히 경이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대단한 일을 벌여놓고도 무덤덤하게 서 있었다.
붉은색 머리카락 탓일까. 아니면 수려한 외모 때문일까.
포인세티아에 둘러싸여 있는 그는 마치 꽃의 정령처럼 신비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음에 드나?”
“……네. 참 예쁘네요.”
나는 포인세티아가 아닌 대공에게 시선을 둔 채 중얼거렸다.
“사흘 뒤에 보도록 하지.”
대공은 그 말만 남기고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떠났다.
나는 대공이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포인세티아로 눈길을 돌렸다.
바깥세상에서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꽃이라 그런가.
왠지 기분이 들떴다.
순간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가 환하게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다녀오셨습니까?”
대공저로 돌아온 카이스를 향해 필립이 고개를 숙였다.
카이스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정원에 있는 가제보로 향했다.
그가 필립에게 앉으라고 손짓하자 필립이 맞은편에 앉았다.
“아가씨께는 별일 없었습니까?”
“아직까지 데이먼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로웨나를 찾아간 것은 데이먼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케루나 지역을 다녀와서 로웨나가 바빴던 탓에 그녀를 살필 기회가 없었다.
때마침 오전에 찾아온 해리가 개업 소식을 전해주어서 핑계 삼아 찾아간 것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불쑥 찾아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가게 위치야 로웨나에게 걸어 놓은 추적술로 확인할 수 있으니 문제될 건 없었다.
다행히 가게는 물론이고 로웨나에게서도 데이먼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데이먼이 그날 아가씨를 못 본 모양입니다.”
“그랬을 것 같긴 하지만 워낙 감각이 뛰어나고 눈치가 빠른 놈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데이먼을 상대할 때는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간교한 놈이니까.
“제가 아가씨를 호위할까요?”
“아니. 네가 움직이면 오히려 데이먼의 눈에 띌 지도 모른다.”
그놈은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디언인 필립과 해리도 주시하고 있을 테니.
대신 보석점에 방어 결계를 둘러놓고 로웨나에게 걸었던 보호술과 추적술도 다시 점검했다.
데이먼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신력의 흔적을 감추는 결계까지 덧씌워놓고 온 참이었다.
그럼에도 왜 이리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지.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을 딱하고 가볍게 튕겼다.
잠시 후 해리가 나타났다.
“절 찾으셨어요?”
“그래. 카밀라 체임버, 그 여자가 로웨나와 꽤나 가까워 보이더군.”
“혹시 아가씨 보석점에 다녀오셨어요?”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방금. 데이먼의 흔적이 없는지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그 자가 아가씨의 존재를 눈치챈 건 아니겠죠?”
단번에 심각해진 해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직은 괜찮은 것 같다.”
“다행이네요.”
해리가 필립 옆에 털썩 앉으며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것인지 파드득 몸을 세웠다.
“보석점만 살피고 오신 거예요? 아니면 아가씨도 만나고 오신 거예요?”
“로웨나도 만나고 왔다.”
카이스가 그걸 왜 물어보느냐며 눈썹을 까딱였다.
“설마 ……빈손으로 가신 건 아니겠죠?”
제발 아니길 바란다는 간절한 눈빛에 카이스가 스윽 시선을 피했다.
“아이구야. 제 불찰입니다. 미리 조언을 드렸어야 했는데. 오늘 당장 가실 줄은 몰랐지요.”
해리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이스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