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지난 회차에서 황태자의 약혼자였으나 그의 배신으로 제단에서 죽었던 나.
이번 회차에서 황태자의 약혼자가 된 카밀라.
똑같이 황태자의 약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카밀라가 나처럼 되리란 보장은 없었다.
1회차 때 황태자의 약혼자였던 낸시도 멀쩡하게 잘 살아 있었으니까.
카밀라도 황태자와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 걸까?
내가 착각한 거겠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이제 시작하는 연인이잖아.
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마주잡으며 애써 동요를 감추었다.
“로웨나?”
내 떨림이 전해진 것일까?
카밀라가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괜찮다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영애, 어디 몸이 불편한가?”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카밀라와 마주보고 있던 황태자도 조심스레 나를 살피고 있었다.
“로나, 어디 아파?”
애런까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관심에 순간적으로 지난 기억들이 떠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시야가 빙글거리며 도는 것 같아 얼른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처음으로 저희 로벨라의 상품을 소개하는 자리라 긴장했나 봐요.”
나는 필사적으로 입꼬리에 힘을 주어 완벽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이 분이 대담한 것 같아도 은근히 소심하시다니까요.”
다행히 벨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소심하다는 벨라의 말에 애런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이내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넌 잘해낼 거야.”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춘 애런이 믿음과 애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내 머리를 향해 뻗어오던 손이 잠시 주춤하더니 어깨로 옮겨졌다.
톡톡.
격려하듯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에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영애가 긴장이라니. 의외로군. 나는 영애가 내게 바가지를 씌울 것까지 각오하고 왔는데.”
예민한 상태라 평소처럼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황태자를 향해 눈을 흘기고 말았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인지 눈을 흘기는 순간 바로 옆으로 온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으니까.
유려한 눈매가 둥글게 휘어지더니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녹안이 반짝거렸다.
순간 무채색이던 그의 얼굴 위로 밝은 노란색이 덧입혀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감정이 입혀진 미소는 처음 보는 지라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영애. 나는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내 귓가에 작게 속삭인 황태자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어처구니가 없는 멘트에 정신이 번쩍 났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표정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와락 얼굴을 구겼다.
뭐 씹은 것 같은 내 표정을 본 것인지 황태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주위 사람들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황태자가 더욱 크게 웃었다.
저 뻔뻔하고 얄미운 면상을 한 대 쳐주고 싶은데.
황태자라는 신분이 내 주먹을 붙들었다.
나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다시금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황태자 몰래.
저 능글맞고 장난기 많은 인간을 처음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참자, 참아.
속으로 참을 인을 세 번 새기는데 알림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황태자의 머리 위로 호감도 18%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호감도 때문에 참는다.’
애써 짜증을 내리누르며 시선을 돌리는데 황태자를 쳐다보고 있는 애런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도 다정하게 나를 어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황태자를 향한 시선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흠, 황태자에 대한 환상이 깨진 걸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진중한 애런이 주군으로 모시기엔 황태자는 너무나 가벼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애런은 지난 두 회차 내내 끝까지 황태자에게 충성했다.
왠지 짠한 마음이 들어 애런에게 다가가 팔을 도닥여주었다.
위로와 격려를 담아서.
갑작스럽게 접촉한 탓인지 움찔 놀란 애런이 내게 시선을 내렸다.
“전하께서는 사람 놀리는 게 취미신가 봐.”
애런에게 작게 속삭이며 눈을 찡긋거렸다.
내 딴에는 웃으라고 던진 농담인데 애런의 눈빛은 더욱 가라앉았다.
“애런, 무슨 일 있어?”
물끄러미 나를 보던 애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가게에 들어올 땐 기분이 좋아 보였었는데.’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기울이자 애런이 내 이마에 살포시 손을 대었다.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지난번부터 얘가 진짜 왜 이럴까?
애런이 천성적으로 다정한 편이지만 내가 아플까봐 걱정을 내비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번 회차에 들어서 유독 애런의 걱정을 많이 듣는 것 같은데.
나는 불편한 심정을 능숙하게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진짜 아픈 거 아니야.”
“너무 무리하지 마.”
애런이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내 뺨을 어루만졌다.
오랫동안 검을 다뤄 투박하고 거친 살결이 느껴졌다.
나는 당장이라도 손을 떼어내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내리 누르며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가게는 잘 될 거야. 태어나서 이렇게 멋있는 가게는 보지 못했거든.”
애런이 다정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의 머리 위로 호감도 21%가 깜빡거렸다.
친구라서 눈에 콩깍지가 씌어 그런 거라며 핀잔을 줘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그와 맞닿아 있는 뺨에 집중되었다.
“자, 내가 로벨라의 첫 손님이니 개시도 내가 해주도록 하지.”
다행히 황태자가 호탕하게 외치는 바람에 내가 애런의 손을 뿌리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내게서 손을 뗀 애런이 황태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전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상품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매튜가 눈치 좋게 벨라가 가져온 상품들 중 최고가만 골라내 황태자 앞에 펼치기 시작했다.
벨라도 신이 나서 거들었다.
“애런, 우리도 가 보자.”
돌처럼 굳어 버렸던 입술을 간신히 움직이자 다행스럽게도 매끄럽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열대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가는데 이상하게 손바닥이 쓰라렸다. 손을 들어 보니 손톱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아, 이런.’
애런의 손이 닿았을 때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모양이었다.
애런이 눈치채지 못했어야 하는데.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카밀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하, 이왕 개업 축하 선물을 해주시려면 통 크게 해주시지요.”
“이봐, 이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황태자가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좋아. 내 약혼자가 개업한 가게인데 뭔들 못해주겠나.”
“제 선견지명에 박수를 보내고 싶군요. 카밀라를 동업자로 영입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 말에 황태자는 물론이고 카밀라와 다른 이들도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원하는 걸 말해봐. 내가 뭘 해주길 바라나?”
“우선, 저희 로벨라의 대표 보석 카라나이트 상품을 구매해 주십시오. 최고가 상품으로.”
“생각보다 싱거운데? 최고가 상품을 사주는 건 당연한 일이잖나. 내가 황태자라는 걸 잊었나?”
네에, 네에. 황태자라는 걸 잊지 않았지요.
고객님,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 요구 사항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 * *
황태자는 내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주었다.
호언장담한 대로 그는 정말 통 크게 지갑을 열어 주고는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애런도 지갑을 활짝 열었다는 것이었다.
애런은 황태자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고가의 카라나이트 목걸이를 구입했다.
공작가 후계자이니 재정의 타격 여부는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보석에 큰돈을, 그것도 내 개업 선물로 돈을 썼다는 사실을 하퍼 공작이 알면 좋아하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하퍼 공작이 날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건 1회차 때 질리도록 겪었던 일이라 잘 알고 있었다.
혹여 공작과 마찰이라도 생길까봐 열심히 만류했지만 애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누구에게 주려는 걸까?’
공작부인을 위한 선물인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
아니면 그 ……여자를 만나고 있는 건가?
나를 제물로 바치고 살리려던 그 여자.
그 생각을 하니 다시금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애써 상념을 끊어내며 심호흡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이 답답한 것 같아 뒷문으로 나와 계단에 걸터앉았다.
가게 뒤편에는 텃밭처럼 작은 뜰이 있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풀내음이 어지럽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 끝자락이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후우.”
드디어 내일 오픈이구나.
만반의 준비를 했고 성공할 자신도 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문 너머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튜는 퇴근했고 지금은 벨라와 카밀라가 교육을 받고 돌아온 직원들과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부드러운 벨벳으로 감싸인 상자 뚜껑을 열자 바이올렛 블루의 카라나이트가 영롱하게 빛났다.
쿠션 컷으로 연마한 카라나이트를 백금으로 둘러 세공한 커프스 버튼이였다.
‘스승님이 정장을 입으실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장신구를 하고 다니지 않는 대공에게 줄만한 선물이 커프스 버튼밖에 없었다.
나는 상자 뚜껑을 닫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개업했다는 핑계로 선물을 전하면 호감도를 올릴 수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고르긴 했는데 막상 전해주려니 망설여졌다.
마음에 들어 하실까?
음식을 해드렸을 때처럼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실까?
그래놓고 나 몰래 흡족해 하실 지도 모르지.
겉으로 보이는 반응과 반대되는 호감도 변화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하고 있나?”
그때 바로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설마 그거 잠깐 생각했다고 지금 환청이 들리는 거야?”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투덜거렸다.
아무리 내가 오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힘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린단 말인가.
“환청이 아니다.”
“웃기지……?”
나는 환청을 향해 웃기지 말라고 소리치려다 나를 향해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고는 멈칫했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움직여 고개를 든 순간.
“……!”
그대로 굳어버렸다.
깜박깜박.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설마 환영이 보이는 건가? 기가 허해지기라도 했나?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곤 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뻗어오는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툭.
머리에 닿은 커다란 손으로부터 따뜻하고 맑은 기운이 흘러들었다.
그제야 눈앞의 대공이 환영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스승님?”
나는 파드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