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애런이 화들짝 놀라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른손을 가슴에 대며 절도 있게 기사식 경례를 올렸다.
“일어나게.”
자세를 바로 한 애런이 내게 눈짓으로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난들 아나. 카밀라도 몰랐던 일을. 그저 바늘 가는데 실이 따라온 거겠지.
“하퍼 경도 개업을 축하하러 온 것인가?”
“아, 네. 내일은 근무 때문에 오지 못할 것 같아서 오늘 들렀습니다.”
“자네도 꽃다발을 선물로 준비했나 보군.”
“아…….”
내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본 애런의 눈꼬리가 살짝 처졌다.
개업 준비만으로도 정신없는데 불청객이 둘이나 오다니.
아무리 마주하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이라고는 하나 축하하러 온 손님들을 박대하면 안 되겠지?
더구나 한 명은 황태자이지 않나.
내가 아니라 약혼녀를 보러 온 것이니 내쫓을 명분도 없고.
이럴 때는 빨리 구경시켜주고 보내는 게 상책이다.
겸사겸사 개업 축하 선물이란 명목으로 거물 고객님들의 주머니도 털어 드리고.
나는 저들 몰래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애런에게 향했다.
“바쁠 텐데 뭘 여기까지 와.”
“네가 처음으로 가게를 여는데 당연히 와야지. 개업 축하해.”
애런이 밝게 웃으며 내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나는 황태자가 준 꽃다발을 옆에 있는 진열대에 올려놓고 애런이 주는 걸 안아들었다.
라넌큘러스의 하늘하늘거리는 연분홍빛 꽃잎이 춤을 추는 소녀의 드레스 자락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왠지 달콤한 향이 날 것 같아 꽃에 코를 묻고 숨을 쉬어 봤지만 향은 별로 나지 않았다.
아쉬움을 삼키며 고개를 들자 애런의 기대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이 꽃을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났어. 너랑 닮았지?”
강아지처럼 처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자 가을하늘처럼 청명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다독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 마음에 들어.”
찰나 진열대를 향해 시선을 던진 애런이 이내 나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진열대에 뭐가 있나?
아직 보석을 진열하지 않아서 볼 게 없을 텐데.
고개를 돌려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황태자가 준 꽃다발 외에는 별다를 게 없었다.
“자고로 축하를 하는 자리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거지. 하퍼 경, 이리 오게.”
황태자의 명령에 애런이 빠르게 걸어가 그의 옆에 섰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다들 뭔가를 구경하고 있던데. 우리에게도 보여줄 수 있겠나?”
“전하, 이건 정말 꼭 보셔야 해요.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봤어요.”
카밀라가 두 손을 모아 쥐며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보석을 보고 있었던 건가? 새로 발견했다던 그 보석이겠지?”
황태자가 진열대로 향하려 하자 내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 전하,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직 진열을 마치지 못한 상태라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황태자에게 양해를 구하며 매튜에게 눈짓하자 내 뜻을 알아챈 그가 빠른 걸음으로 진열대로 향했다.
매튜가 무엇을 할지 눈치챈 벨라도 그의 뒤를 따랐다.
카밀라만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태자 옆에 서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주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이거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군.”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최상의 상품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벌써부터 고객을 안달나게 만들다니 수완이 좋군.”
황태자의 수려한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너그럽게 양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사이 준비를 마친 벨라가 내게 신호를 보내왔다.
진열대 위에는 어느새 검은 천이 덮어져 있었다.
나는 진열대 앞에 서서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 로벨라의 대표 상품을 황태자 전하께 가장 먼저 소개할 수 있게 된 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로벨라는 우리 보석 브랜드였다. 나와 벨라 그리고 카밀라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것이었다.
“지금부터 보여드릴 저희 로벨라의 대표 상품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보신 적 없는 극강의 아름다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황태자는 물론이고 애런의 눈빛에도 기대감이 차올랐다.
“로벨라의 푸른 별, 카라나이트를 공개합니다.”
내가 옆으로 물러남과 동시에 차라락 검은 천이 걷혔다.
순간 가게 안에 정적이 일었다.
황태자를 비롯해 애런과 근위대장 미첼 경 모두 카라나이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허. 자네 말이 빈말이 아니었군.”
“정말 아름답다.”
황태자에 이어 애런까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파이어와는 또 다른 느낌이야. 바이올렛 블루라 독특하군.”
때마침 매튜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들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을 받을 수 있도록 움직였다.
조명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빛깔에 소리 없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이작의 뛰어난 연마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때? 아름답지?”
“응. 이렇게 아름다운 보석은 처음 봐.”
애런의 팔을 툭 치며 묻자 그가 몽롱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세 사람이 카라나이트를 충분히 구경하도록 시간을 준 뒤 헛기침을 하며 이목을 끌었다.
“저희 로벨라의 대표 상품 카라나이트에 만족하셨습니까?”
“그대의 말대로 정말 아름답고 매혹적인 보석이었네. 상상 그 이상이야.”
황태자가 흡족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저희 두 번째 상품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부디 이번 상품도 전하를 기쁘게 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매튜와 벨라에게 신호를 주자 바로 옆 진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카라나이트 못지않게 놀란 세 사람을 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이아몬드 반지입니다.”
“이게 다이아몬드라고?”
애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물었다.
“응. 다이아몬드야.”
내 확답에 애런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조명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는 다시 봐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처음 보는 세공 방식이로군. 다이아몬드가 이렇게 화려해질 수 있다니.”
“저희 로벨라의 뛰어난 세공사 솜씨입니다. ‘신의 손’이라 불릴 만한 실력이지 않습니까?”
“과연 그렇군. 그 세공사가 누구인가?”
황태자가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전하, 아무리 전하시라고 해도 영업 비밀을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 저희 로벨라는 인재 한 명 한 명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거든요.”
아직 개업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작에 대해 알려줄 순 없지.
‘매우’에 힘을 주어 말하자 황태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실수했군. 그렇지. 보석점의 세공사는 아주 귀한 인재이지. 특히나 이런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라면 말이야.”
“이해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곳에는 세공사 말고도 뛰어난 직원이 더 있는 것 같은데.”
뛰어난 직원?
점원들은 오전까지 일을 하다가 현재 벨라인 상단에서 마지막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의문스럽게 황태자를 보자 그가 진열대 가까이 다가와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 흉상 그리고 조명.”
“아, 그건 로웨나의 아이디어예요. 정말 대단하죠? 저희도 오늘 직접 보고 무척 놀랐다니까요.”
카밀라는 그동안 이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사람처럼 열성적으로 말했다.
흉상을 만들게 된 과정부터 효과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이게 로나의 아이디어라고?”
애런이 눈을 크게 뜨며 나와 진열대를 번갈아 보았다.
“네. 전부 로웨나가 제안한 거예요.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카밀라의 칭찬에 쑥스러워 귀를 만지작거리는데 황태자의 녹안에 이채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살짝 불길한 예감에 슬쩍 시선을 피했으나 화제를 돌릴 수는 없었다.
내 자랑에 불이 붙은 카밀라 때문에.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이리로 와 보세요.”
입구로 향한 그녀는 황태자와 애런에게 통창과 그 앞에 있는 진열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열심히 설명하는 카밀라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나는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카밀라의 호의는 무척 고마웠지만 옛 연인들 앞에서 늘어놓는 칭찬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그때 누군가에게 턱 붙잡히고 말았다.
“어딜 가시려고요?”
벨라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보니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밌는 모양이었다.
“나 놀릴 생각 말아요.”
“제가 언제요?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지금 놀리려고 온 거잖아요? 내가 모를 것 같아요? 벨라의 입꼬리만 봐도 안다고요.”
“어머나, 그건 또 언제 보셨담.”
벨라가 천연덕스럽게 제 입가를 매만졌다.
“아니, 딱 봐도 부끄러워하시는 것 같길래 왔죠. 평소에는 되게 뻔뻔하신 분이 왜 자기 칭찬에는 이렇게 부끄러워하시는지 몰라.”
“그러게 말입니다. 예전엔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른다고 직접 나서서 자랑하고 다니시던 분이.”
왜 갑자기 소심해지신 것인지 모르겠다며 매튜가 중얼거렸다.
예전과 달라졌다는 말에 일순 움찔했지만 금세 태연하게 굴었다.
게임 3회차. 이 정도로 긴장하고 겁먹을 시기는 지났지.
나를 팔짱을 끼며 일부러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이 사람들이 정말. 그동안 내가 너무 편하게 대해줬죠? 로웨나 케인의 옛 명성 좀 살려볼까요?”
내 불같은 성질머리 한 번 드러내 봐?
내가 팔을 걷어붙이며 씩씩대자 벨라가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어이쿠, 무서워라.”
벨라가 과장되게 어깨를 움츠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에 반해 매튜는 내게 진지하게 충고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지금껏 명성을 올리겠다고 쏟아 부은 돈을 생각하십시오. 앞으로 들어갈 돈도 천문학적인 수준인데 여기서 지출을 더 늘리시면 안 됩니다.”
순간 매튜를 향한 살심으로 하마터면 해머를 꺼내들 뻔 했다.
그런 나를 진정시켜준 건 카밀라였다.
황태자와 애런에게 설명을 마친 카밀라가 쪼르르 다가와 내게 팔짱을 꼈다.
“제가 파트너 복이 넘친다니까요. 제 평생의 운을 올해 다 써버린 것 같아요.”
“이거 질투 나는데? 나와 있을 때보다 저들과 함께 있을 때 더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황태자가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리자 카밀라가 당황했다.
“아, 그게. 당연히 전하와 함께 있는 게 가장 즐겁지요. 다만 처음 배우는 일이다 보니 신이 나서…….”
투정을 부리는 황태자와 그를 달래주려 안절부절못하는 카밀라.
겉으로 보기에는 풋풋한 연인의 모습인데 왜……?
나는 카밀라와 닿아 있는 팔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내게 팔짱을 끼고 있는 카밀라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팔을 꽉 붙들고 있다는 걸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레스토랑에서도 황태자 앞에서 긴장했었지.’
뭐지? 이 위화감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이런. 그대를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저 내가 질투심이 많아서 그런 거니 이해해줘.”
황태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카밀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보다 더 느릿하게 고개를 숙인 그가 카밀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움찔.
여전히 내게 팔짱을 끼고 있던 터라 카밀라의 긴장이 느껴졌다.
‘시작하는 연인이니 당연히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겠지.’
좋아하는 사람과의 스킨십이면 더욱 긴장될 테고.
그런데 왜 이리 찜찜할까.
나는 슬쩍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말투, 행동에선 어떤 위화감도 느낄 수 없었다.
카밀라를 바라보는 초록색 눈동자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순간 그 얼굴 위로 지난 회차 내내 나를 바라보던 황태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
문득 불편한 깨달음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감정의 색이 없는 무채색의 미소가…… 똑같아.
당혹스럽게 두 사람을 쳐다보는데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설마 카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