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편평한 트레이 위에 올려두는 것보다 저렇게 흉상에 걸어두면 눈에 딱 띄니까.
더불어 목에 걸었을 때 어떤 느낌일지 바로 알아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처음 아가씨께서 그림을 주셨을 때는 누구의 목을 가져오라는 줄 알고 식겁했지 뭡니까?”
매튜가 정말 놀랐다며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방 장인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꽤나 고생했지요. 아가씨, 그림도 기본 소양인데 정식으로 배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나는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주먹을 애써 힘주어 내렸다.
‘나는 너그러운 상사다. 너그러운 상사다.’
스스로를 세뇌하듯 속으로 되뇌었다.
그동안 일이 많았으니 매튜도 힘들었겠지. 평소보다 더 깐족거리는 걸 그래서일 거야.
저렇게 찰떡같이 알아듣고 만들어 오는 보좌관을 어디서 또 구할 수 있겠어. 내가 참아야지.
나는 스스로를 달래며 분노를 삭였다.
“어? 왜 다들 나와 계세요?”
그때 벨라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점검 중이었어요.”
카밀라가 벨라를 반기며 대답했다.
그동안 나와 카밀라는 매튜와 벨라로부터 장부를 보는 법부터 시작해서 사업에 필요한 지식들을 배웠다.
특히 벨라는 사업 파트너로서 의논할 일이 많아서 우리 셋은 정기적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카밀라와 벨라도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와, 역시 그림으로 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군요.”
벨란의 감탄에 매튜가 그것 보라며 내게 다시 한 번 그림을 배울 것을 권유했다.
순간 카밀라가 슬쩍 고개를 돌렸는데. 나는 봤다고. 웃음을 참는 걸.
이 사람들이 정말.
나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다시금 달래야 했다.
“큼, 아이작에게 다녀오는 길이죠? 완성품도 가져왔어요?”
카밀라가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벨라에게 물었다.
“네. 안 그래도 그거 보여드리려고 한달음에 달려왔어요.”
벨라가 뿌듯한 표정으로 뒤에 있는 짐마차를 가리켰다.
상단 직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벨라가 우리를 이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진열대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우리들은 상단 직원들이 네모난 상자들을 하나둘 내려놓을 때마다 눈을 빛냈다.
“자, 직접 보시면 정말 놀라실 거예요. 아이작이 이걸 보여주는데 숨이 멎는 줄 알았다니까요.”
“벨라, 보석을 보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숨넘어가게 생겼어요. 빨리 열어 봐요.”
내가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재촉하자 씨익 웃은 벨라가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여는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이 새어나왔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멈추었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요.”
카밀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감탄을 내뱉었다.
백금으로 셋팅된 카라나이트 목걸이는 정말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웠다.
원작에서, 세공된 카라나이트를 밤하늘의 오로라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보석이라 칭송했었다.
실제로 보니 그 묘사는 카라나이트의 아름다움을 반의반도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롱하면서도 투명한 카라나이트는 심해의 깊고 고요함이, 광활한 우주의 오묘하고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이전에 카라나이트 원석을 봤을 때는 이 정도로 아름답진 않았었는데 역시 보석은 세공을 거쳐야 진가가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아이작이 작품을 만들어 냈네.’
‘신의 손’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정말 뛰어난 솜씨군요.”
이미 아이작의 실력을 직접 확인했던 매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카밀라가 의아하게 벨라를 쳐다보자 그녀가 다른 상자를 우리 앞으로 가져왔다.
나는 이미 어떤 작품이 나올지 알고 있었기에 가만히 미소 지었다.
“짜잔.”
벨라가 상자를 열자 방금 전 카라나이트보다 더 찬란한 빛이 새어져 나왔다.
“이건 무슨 보석인가요?”
“……다이아몬드군요.”
매튜의 대답에 카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다이아몬드라고요? 다이아몬드가 이렇게 반짝이는 보석이었나요?”
“저도 이렇게 다채롭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는 처음 봅니다. 연마 방식이 달라져서 그런 것 같은데 대단하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벨라가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내 계획이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으로 연마하고 여섯 개의 발이 중심 보석을 고정시키는 프롱 세팅으로 된 반지.
이 세계에서는 생소할지 몰라도 바깥세상에서는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였다.
1회차 때 아이작이 24면체의 로즈 컷 방식을 개발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서 혹시나 싶어 시도해 본 것이었다.
이 세계의 다이아몬드 연마 방식은 8면체 원석의 한쪽 끝부분을 제거한 10면체, 테이블 컷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윗면이 테이블처럼 편평하다보니 아무리 조명을 받아도 다채로운 빛을 내지 못했다.
보석은 깎인 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빛나는 법.
로즈 컷은 8면체 원석 형태를 위한 디자인은 아니지만 그 정도다면체로 깎아낼 기술이 있다면 58면체인 라운드 브릴리언트 방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작은 수많은 연습과 시행착오 끝에 결국 해냈고 지금 보는 것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보석 디자이너를 꿈꾸며 공부했던 지식을 여기서 써 먹게 될 줄이야.’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게임에 빙의한 탓에 가진 지식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것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 이 보석들의 진가를 알려면 이렇게 봐야 한답니다.”
나는 카라나이트 목걸이를 하얀색 흉상 위에 걸고, 다이아몬드 반지는 검은색 트레이 위에 꽂았다.
그리고 진열대에 넣은 뒤 그 안에 설치되어 있던 조명의 위치를 조정했다.
이 조명은 제피루스 왕국의 마도구 기술자에게 직접 제작을 의뢰해서 만든 것이었다.
나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끈 다음 조명의 스위치를 켰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무색 광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무지개빛이 다이아몬드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뿐 아니라 조명을 받은 카라나이트에선 오로라 장막이 펼쳐졌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 ……아름답군요.”
아이작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작품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 가치를 제대로 보여줘야지.
그게 내가 할 일이지 않나.
나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들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뭘 그리 감탄하고 있나?”
그때 전혀 반갑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카밀라가 당황하며 예를 갖추었다.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나와 매튜가 동시에 인사를 하자 뒤늦게 벨라도 인사를 올렸다.
“일어들 나게.”
황태자는 오늘도 변함없이 누가 봐도 황태자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전하, 여긴 어떻게……?”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카밀라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내일 개업한다고 들은 것 같아서. 개업 당일에는 붐빌 테니 미리 들렀어.”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다른 곳에 있었으면 어쩌려고요.”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요즘 그대의 모든 관심이 여기 쏠려 있지 않나.”
황태자가 카밀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바쁘실 텐데. 감사드려요.”
“자, 이건 개업 축하 선물.”
황태자가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장미 꽃다발을 카밀라에게 건네었다.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건 케인 영애에게 주는 선물.”
황태자가 근위대장으로부터 건네받은 분홍 장미 꽃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우리 카밀라를 도와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황태자가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감사합니다.”
나는 순순히 꽃다발을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내 것까지 챙겨올 줄은 몰랐는데.
하긴 황태자는 2회차 때 나와 연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다른 여인들에게 친절했었다.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오랫동안 자유연애를 부르짖으며 살았던 탓에 몸에 밴 매너였다.
‘덕분에 내가 고생 좀 했지.’
황태자의 친절을 오해한 영애들이 벌이는 수작질로부터 황태자를 지키고.
질투심에 불타올라 내게 달려드는 영애들을 물리치느라 한 편의 드라마를 찍었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 파란만장했네.
‘설마 카밀라도 그런 고생을 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이건 뭐, 황태자에게 대놓고 처신 잘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쩐담.
‘어쩌긴 뭘 어째. 내가 도와주면 되지.’
게임의 오류 때문에 여전히 카밀라를 주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에게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여기 있는 레이디는 처음 보는 얼굴이군.”
신분을 밝히라는 뜻을 알아챈 벨라가 치맛자락을 들며 살짝 무릎을 굽혔다.
“벨라인 상단의 상단주 벨라 네이블입니다.”
“아, 자네가 카라나이트를 처음 발견했다지? 정말 운이 좋았군 그래.”
“아기오 신의 은혜이지요.”
“그래. 새로운 광산을 발견하는 건 천운이지.”
황태자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자네가 이곳에 있는 줄 알았다면 자네 선물도 준비했을 텐데. 이를 어쩐다.”
황태자가 곤란하다는 듯 살풋 눈을 찡그렸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차피 내가 개시를 해주려고 했으니 통 크게 쏘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벨라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어이쿠, 개시라니.
오픈하기도 전에 거물 고객이 오셨군.
불청객이 왔다며 떨떠름하게 있던 나도 벨라를 따라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얼핏 황태자가 나를 보며 피식 웃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영식은 오랜만에 보는군. 고든 자작은 가끔씩 보는데 말이야.”
황태자는 제일 마지막으로 매튜에게 말을 건넸다.
“아버지께서는 황궁에서 일하고 계시니까요.”
고든 자작은 재무부 관료로 외궁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매튜의 형도 외무부 관료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자작에게 자네를 내 보좌관으로 보내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었는데. 알고 있나?”
그런 일이 있었어?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힐끗 나를 본 매튜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어깨를 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뭐 이런 제스처에 헛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케인 백작가로 지원했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 줄 아나?”
“아버지와 형님 모두 황궁에서 일하고 계시니 저까지 관료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문에서 두 사람이나 황실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자신은 내버려두라는 말에 황태자가 피식 웃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만족스러운가 보군.”
“일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분이셔서요.”
이게 칭찬이야, 욕이야?
어이가 없어 매튜를 노려보자 그가 날 스윽 쳐다보았다가 다시 황태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웬 날파리가 지나가나 하는 반응에 열이 올라 눈으로 마구 욕을 날렸다.
아까부터 이게 귀엽다 귀엽다하고 봐주니까 아주 하극상이 끝이 없네.
이참에 버르장머리를 제대로 교육 시켜?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해? 오늘만 해도 몇 번째야.
막 불을 뿜기 직전 문득 걱정이 들었다.
혼을 냈는데 만약 일을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내일이 오픈인데.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매튜가 일을 좀 잘해야지.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일하는 보좌관이잖아.
어디 가서 이런 인재를 또 구할 수 있겠어. 마이너스 명성을 가지고!
혼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다들 허리까지 젖히며 웃는 황태자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제가 자중하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눈으로 욕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매튜가 내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얄밉게 지껄였다.
아우, 저걸 그냥.
황태자 앞이고 뭐고 안 되겠다 싶어 팔을 걷어붙이는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나!”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애런이었다.
“개업 축하…….”
해맑게 외치던 애런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