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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55)화 (55/140)

55화

“맨살에 눈을 접촉한 자들에게서 괴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으나 환자 수가 꽤 됩니다.”

눈을 만졌는데 그 부위에 괴사가 일어난다는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눈의 왕국이라 불리는 레이아스 왕국에서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피부에 닿았을 때 괴사를 일으키는 건 폴루티아의 검은 액체, 폴루탄에 닿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맞습니다. 그래서 의문입니다. 폴루탄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사무엘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기사단에서 상비하고 있던 포션으로 급한 환자부터 치료하고는 있는데 추가로 포션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클로디안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폴루티아가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현자라 불리는 이들도 밝혀내지 못했다.

황가의 기록에서도 폴루티아에 관한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오래 전,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것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가장 의문이 드는 건 폴루티아가 확장되고 있음에도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아바마마께서도 폴루티아 일이라면 외면하고 계시지.’

처음부터 그러신 건 아니었다.

즉위 초기에는 부황도 해결 방법을 찾아보라며 명령을 내리시긴 했었다.

해당 부서나 아카데미 학자들에게 연구를 맡기도 했고.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방법이 없다였다.

그 뒤로는 국정 회의에 폴루티아 안건이 올라오면 해결 방법이 없다며 넘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귀족들은 그저 자신의 영지가 폴루티아가 되지 않기를 신에게 비는 게 최선이었다.

‘정말 대공이 케루나의 눈을 사라지게 만든 거라면 폴루티아도 정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사무엘, 최근에 정화된 폴루티아가 있는지 조사해봐.”

“폴루티아가 정화될 수 있는 곳이었습니까?”

사무엘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었다.

“케루나의 눈이 갑자기 사라졌다니 다른 지역에도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거야.”

“알겠습니다.”

사무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케루나 지역에는 치유 포션을 넉넉히 보내고 기사단은 철수하도록 해.”

“네. 그런데 전하. 전하께서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뭘?”

“폭설이 내릴 걸 말입니다. 갑자기 케루나에 눈이 내릴 거라며 기사단을 보내야 한다고 하셨을 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아십니까?”

눈사태에 관한 건 보좌관인 사무엘과 이번 임무의 책임자인 케이틀 경에게만 말해둔 상태였다.

눈사태를 막기 위한 전략을 짜고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야 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카르트 제국에 눈이라니. 저희 고조할아버지께서 놀라서 일어나실 일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왜 고조할아버지가 나오는 건지.

클로디안이 흐린 눈으로 사무엘을 쳐다보았다.

“저는 그때 불경스럽게도 전하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지 뭡니까? 그런데 정말 눈이라니요. 도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늘 반듯한 자세로 보고하던 사무엘이 책상에 두 손을 기대며 클로디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클로디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주홍빛 눈동자를 피해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며 케루나로 기사단이 출발하기 일주일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케루나 지역에 눈사태가 일어날 거예요. 인근 마을 두 곳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테니 대비해야 해요.”

카밀라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었다.

눈사태라니. 베히른에 홍수가 일어난다는 말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베히른의 홍수를 예지했던 것을 생각하면 믿어서 손해날 건 없다는 판단이 들었었다.

베히른 홍수에 이어 눈까지 내리게 되면 분명 황실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일 테니까.

‘정말 예지가 맞았어. 그것도 연속으로 두 번이나.’

이로써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는 카밀라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왜 카밀라일까?

대공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뭐가 됐든 카밀라가 제게 도움을 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아직까지는 성가시게 하지도 않고 있고.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겠어.’

조만간 보석점을 오픈한다고 했었는데 그게 언제였지?

기억을 더듬다보니 자연스럽게 로웨나가 떠올랐다.

요즘 사업 때문에 카밀라와 자주 만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탓이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폐쇄적인 버몬트 대공도 모자라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벨라인 상단주까지 제 사람으로 만들다니.

그뿐인가. 카밀라까지 흔들어 놓지 않았나.

멍청하고 오만하며 안하무인에 제멋대로라 사교계에서 무시당하는 게 일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들어맞는 게 하나도 없군. 일부러 그렇게 행동을 했던 건가? 그러면 왜 갑자기 달라진 거지?’

사람 참 궁금하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어쨌든 한동안은 지루하지 않겠군.’

그 로웨나 케인이 보석점을 열었다는 게 알려지면 사교계가 시끌시끌해질 것이다.

도박장도 성행하겠지. 로웨나 케인이 언제 망할지 내기하느라.

어디에다 돈을 걸면 좋을까?

클로디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리 웃으십니까?”

클로디안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사무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보고 끝났으면 나가봐.”

“아니, 제 질문에 대답을 해주셔야죠. 도대체 어떻게 아신 거냐고요.”

“나 바빠. 얼른 나가봐.”

“바쁘긴 뭐가 바쁘세요? 다음 일정도 없으시잖아요.”

“있어. 방금 생겼어.”

클로디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두었던 겉옷을 집어 들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개업식.”

“네에? 무슨……?”

클로디안은 사무엘이 자길 붙잡을 새라 바람같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전하, 전하!”

그의 등 뒤로 사무엘의 당황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 * *

“아가씨께서 지시하신 대로 꾸며 보았는데 어떠십니까?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매튜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길가에 서서 내일 오픈을 앞두고 있는 가게 전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이보리를 기본으로 코랄핑크를 포인트로 장식한 가게는 전체적으로 따뜻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였다.

“음, 완벽해요. 이대로 오픈하면 되겠어요.”

“다행이군요. 오픈을 앞두고 야근하는 불상사가 생길까봐 가슴을 졸이고 있었거든요.”

걱정하고 있었던 사람 맞아?

너무나 태연하고 덤덤한 매튜를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제 감정을 마음대로 재단하지 마십시오.”

딱딱한 시선이 잠시 내게 닿았다 떨어졌다.

매튜의 직설적이고 딱딱한 어투에는 이미 적응된 지 오래라 타격은 없었다.

일일이 따지고 들어봤자 나만 피곤할 뿐이라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냥 저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었다.

“드디어 내일 오픈이네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매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완벽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예요.”

인테리어에 대해서 벨라와 카밀라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를 가장 정확하게 집어낸 이는 매튜였다.

덕분에 내 구상대로 가게를 만들 수 있었다.

“제 노고를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아가씨와 함께 일하면서 즐거웠습니다.”

매튜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카라나이트보다 더 희귀한 미소에 당황도 잠시, 그에게 상사로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흐뭇해졌다.

“나도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고마워요.”

“이제 준비 작업이 끝났을 뿐입니다. 벌써 마음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알아요, 알아. 내일 오픈인데 이 정도 여유는 좀 부려도 되잖아요. 되게 깐깐하게 구네.”

내가 투덜대자 매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하루 정도는 봐드리지요.”

네에, 그것 참 고맙네요.

내가 입을 비죽이자 매튜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통과된 건가요?”

그때 가게 안에서 카밀라가 나오며 물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카밀라는 바쁘게 돌아다닌 것인지 이마에 살짝 땀이 배여 있었다.

그녀는 사업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며 점장을 자처한 탓에 매일 같이 가게로 출근하고 있었다.

“네, 최종 승인이 났습니다. 이대로 오픈하면 될 것 같습니다.”

“와, 다행이다. 만약 통과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무척 걱정했어요.”

매튜의 대답에 카밀라가 과장되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소매로 땀을 훔쳤다.

“누가 보면 내가 악덕 사장인 줄 알겠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내일 오픈인 가게를 뒤집고 깽판 놓을 사람은 아니거든요?”

내가 일부러 토라진 척 하자 카밀라가 커다란 눈을 굴리며 내 눈치를 봤다.

“어, 저기 그게 아니라. 우리 보단 로웨나가 인테리어에 대해서 아는 게 많으니까 로웨나의 안목을 믿어서…….”

카밀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렸다.

그동안 개업을 준비하면서 카밀라와 시간을 보낼 일이 많다보니 서로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가까워진 참이었다.

“농담이에요. 화 안 났어요.”

조금 더 장난을 쳤다간 카밀라가 사색이 될 것 같아서 얼른 표정을 풀었다.

내가 진짜 기분이 상한 건 아니지 조심스럽게 살피던 카밀라가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많이 놀랐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마음 쓰지 말라며 카밀라가 옅게 웃었다.

카밀라와 가까워진 것 같아서 벨라에게 하듯 장난을 친 것인데.

분위기만 어색해진 것 같아 볼을 긁적이고 있자니 메튜가 나를 툭 건드렸다.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아가씨의 이미지를 쇄신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매튜가 내게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장난이라도 화난 척은 하지 마십시오. 주변 사람들 긴장합니다.”

‘아, 이 사람이. 뼈를 때리네.’

나도 알거든? 상태창만 켜 봐도 알 수 있다고! 명성이 아직 마이너스라는 걸.

대체 누구 편이냐며 눈을 흘기자 매튜가 안경테를 매만지며 모른 척 했다.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저, 저거 지금 나 비웃은 거지 그렇지?’

이 보좌관이 정말!

매튜를 향해 우는 주먹을 달래고 있는데 카밀라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에 로웨나가 전면에 창을 크게 낼 거라고 해서 상상이 잘 되지 않았는데 직접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카밀라의 시선을 따라 가게의 전면을 바라보자 시원하게 내부가 보이는 통창이 떡하니 보였다.

그 너머에는 바로 진열대가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도 들고 자연스럽게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나를 보며 살풋 미소를 지은 카밀라가 창이 난 곳으로 걸어갔다.

“거기다 여기 진열대가 바로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 효과적일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정말 대단해요, 로웨나.”

아니, 나는 그냥 바깥세상에서 본 것들을 적용시켰을 뿐인데.

나는 민망함에 볼을 긁적거렸다.

이 세계의 상점들은 전면에 격자 형태로 여러 개 창문을 내긴 하지만 그건 내부의 조도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밖에서는 가게 안의 상품들이 잘 보이지 않는 탓에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간판을 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면의 창을 크게 하고 그 앞에 진열대를 놓은 것이었다.

다채롭게 빛나는 보석을 보고 걸음을 멈추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저는 저기 있는 흉상에 얼른 목걸이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일반적인 진열방식과 비교해서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 보고 싶거든요.”

매튜가 목걸이를 전시하기 위해 진열대에 가져다 놓은 미니 흉상을 가리켰다.

“아, 저도요. 저런 건 정말 처음 봐요.”

카밀라가 작게 손뼉을 치며 동조했다.

저것도 목걸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내가 낸 아이디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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