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로웨나를 다급히 대공저로 보내버린 카이스가 날 선 눈빛으로 산 정상을 주시했다.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
‘데이먼.’
분명 그놈이었다.
순식간에 카이스의 형체가 사라졌다.
이내 그가 나타난 곳은 민둥산이 된 산 정상이었다.
‘어디 있는 것이냐.’
카이스의 등 뒤로 화르륵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데이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여기 있었어.’
비바람에 풍화된 암석 위에 시커먼 폴루탄이 묻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방금 전 말끔하게 정화된 땅에 폴루탄이 남아 있을 리 없으니까.
일부러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제가 왔었음을 알리기 위해.
카이스는 다급히 신력을 풀어 데이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마수를 처리하고 지면에 신력을 뿌리느라 이미 신력을 상당히 소모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황금 사슬이 나타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제 발로 나타난 놈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카이스는 최대한 촘촘하게 신력을 펼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뭘까?’
그토록 찾았음에도 머리카락 한 올 조차 보이지 않게 꼭꼭 숨어 있던 놈이 왜?
순간 무언가가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렇게 부정하면서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로웨나가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해머와 퓨릭서의 신력 때문에.
지금까지 카이스는 매번 정화된 땅에 자신의 신력을 흠뻑 뿌려 로웨나의 흔적을 감추어왔다.
그것도 모자라 마수를 처리할 때도 의식적으로 신력을 흘렸다.
지금 이곳도 카이스의 신력이 흠뻑 배여 있었다.
그러니 데이먼이 눈치챌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로웨나 때문이 아닐 거야. 그저 내가 정말 깨어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더불어 그놈이 공들여 망가뜨려놓은 땅들을 자꾸 정화시키니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놈은 특히 자신의 신력이라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싫어하니까.
“후우.”
카이스가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청정한 공기 사이로 밀려오는 악취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짙었다.
이 세계의 신, 아기오가 세계를 구축할 때 제일 먼저 창조한 생명체는 신수였다.
손수 빚어 자신의 권능을 부여한 신수는 총 6마리.
그들은 신의 사자로서 아기오를 보좌하고 각 대륙을 맡아 이 세계를 지켰다.
데이먼도 카이스처럼 신의 사자 중 하나였다.
죄를 짓고 추방되기 전까지는.
데이먼은 제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아기오를 원망했다.
증오심을 주체 못한 그는 결국 아기오가 만든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타락해 버린 그를 천계에서는 요수라 불렀다.
신의 사자로서의 자격을 잃었으니 신력을 잃는 것도 당연한 일.
데이먼은 아기오에게 대항할 힘을 기르기 위해 이 세계에 흩뿌려져 있는 신의 숨결을 훔치기 시작했다.
산을 누비는 들짐승부터 땅을 기어 다니는 작은 곤충은 물론이요, 벌판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까지.
그들이 품고 있는 생명력 즉 신이 불어넣어 준 정기를 빨아들여 제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요력. 폴루티아의 근원이다.
억울하게 생명력을 잃은 자연의 원한과 분노, 슬픔이 담겨 있으니 그 힘이 어찌 타락하지 않을 수 있을까.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이었던 데이먼의 힘이 흑암보다도 더 어둡게 변해버린 것은 당연한 이치.
그러나 악취를 품고 있진 않았었다. 그것도 이렇게 역겨울 정도로.
‘설마 ……금기에 손을 댄 것인가.’
문득 정화되기 전 케루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으로 덮인 하얀 풍경을.
그건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를 홀리기 위해 일부러 꾸며놓은 것이었다.
카이스가 입매를 굳혔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그가 손을 뻗어 어루만지듯 공기를 훑어 내렸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먹물이 묻은 것처럼 거뭇거뭇하게 물든 부분이 드러났다.
‘강해졌군.’
백 년 전보다 훨씬.
아무리 폴루티아의 면적이 그때보다 몇 배나 늘어났다고 해도 이 정도로 급격하게 힘이 커질 수는 없었다.
카이스의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물들었다.
바닥까지 추락한 옛 동료의 모습에 연민은 들지 않았다. 그놈은 제 반려를 죽인 놈이니까.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친우에게 칼을 꽂아도 되는 명분이 생겨서.
아기오도, 다른 신의 사자들도 자신을 비난하지 못할 테니까.
카이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끊임없이 신력을 풀어 데이먼을 추적했지만 작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신력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가 되어서야 할 수 없이 신력을 거둬들였다.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했으니 조만간 일을 벌이겠지.’
그때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카이스가 산 너머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린 카이스는 자꾸 제 걸음을 붙드는 찜찜함에 미간을 좁혔다.
‘못 봤겠지.’
그놈의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로웨나를 대공저로 보냈지 않았나.
보지 못했어야 한다.
또다시 그놈의 손에 자신의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만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하니까.
순간 에이바를 죽이고 흡족하게 웃던 데이먼의 모습이 떠올랐다.
카이스의 금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산 아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람들?’
아무리 이곳이 정화되었다고 해도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이전까지 눈으로 덮여 산행이 불가능한 곳이지 않았나.
어째서 저리 많은 무리가 올라오고 있단 말인가.
그가 의문 어린 얼굴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 *
“재미있네.”
데이먼이 거처로 돌아오자 하이에나 두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생각에 잠겨 있던 데이먼은 평소와 달리 그들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하이에나들이 서운하다며 울었지만 데이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 보고 온 장면 하나가 그의 흥미를 돋웠기 때문이었다.
‘분명 인간이었어.’
데이먼은 보았다.
정말 찰나였지만 카이스 그놈이 누군가를 안고 있던 걸.
평범한 인간이라면 보지 못했겠지만 데이먼은 타락했다고 해도 신수.
그 정도 거리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긴 머리가 늘어져 있었던 걸로 보아 분명 여자였다.
그래, 데이먼의 흥미를 돋운 지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남자라 해도 관심이 가긴 했겠지만 여자라는 점에서 몇 배는 더 흥미로워졌다.
“제 반려가 죽었다고 제국을 불바다로 만들려던 놈이 여자라.”
재미있군. 재밌어.
데이먼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이스가 돌아다니며 제 영역을 망가뜨리고 다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괘씸하고 짜증이 났지만 내버려 두었다.
인간들에게 복수하려던 놈이 인간들을 돕겠다고 폴루티아를 정화시키는 꼴이 우스워서.
한편으로는 그 심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혹시 이를 이용해 황제의 뒤통수를 치려고 하나?
갖가지 추리를 해 보느라 본의 아니게 방치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 최근 가장 공들여 가꾸어 놓은 케루나를 건드리길래 홧김에 쫓아간 것이었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걸 발견했지 뭔가.
“네가 관심을 가지는 게 생겼다 이거지.”
그렇다면 응당 예뻐해 줘야지.
“아직 난 부족하거든.”
백 년의 신벌? 반려의 죽음? 그 정도 고통으론 어림도 없지.
더 굴러야지. 나락의 바닥까지 떨어져 처절하게 몸부림쳐야지.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지 않겠어?
데이먼의 수려한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 * *
“전하, 케루나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황태자 클로디안이 보좌관의 보고에 서류에서 눈을 뗐다.
말해보라며 눈짓을 하자 보좌관 사무엘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케루나 지역에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클로디안이 펜을 내려놓고 두 손에 깍지를 꼈다.
“인근 마을에 피해는 없었나?”
“마을 두 곳 모두 다행히 눈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대피하도록 조치해서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만…….”
“결국 눈사태는 막지 못했나보군.”
클로디안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역시 사람의 힘으로 눈사태를 막는 건 불가능했던 건가?
그래도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긴 하지.
일단 당장 마을 주민들이 머물 곳부터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구호 대책을 고민하고 있던 클로디안이 보좌관의 이어진 보고에 멈칫했다.
“아닙니다. 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뭐? 다시 말해 보게.”
“눈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눈이 그쳤단 말인가?”
클로디안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사단이 도착했을 때는 분명 폭설이 내리고 있었답니다.”
마을 두 곳을 모두 대피시키는 와중에도 계속 눈이 내려 눈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의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갑자기 눈이 그치더니 산을 덮었던 어마어마한 양의 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지 뭡니까?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사무엘이 당황스럽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케이틀 경이 허황된 말을 할 사람은 아니지 않나.”
케이틀 경은 케루나 지역에 보낸 기사단 책임자였다.
“그렇긴 합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습니다.”
사무엘이 단정한 눈썹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디안은 깍지 낀 손에 턱을 기대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폭설이 단박에 그쳤다. 산을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눈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 한 사람.
신의 사자. 그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무엘, 마을 주민 외에 다른 사람을 보았다는 말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일부러 모습을 감추신 모양이군.’
대공이 왜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눈사태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그분께 예지 능력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문득 얼마 전 부황으로부터 들은 말이 떠올랐다.
“대공은 오만하고 포악한 성정을 지닌 자다. 그자는 인간을 싫어해. 특히 황가를 증오하지.”
부황은 치를 떨면서 대공을 향한 혐오를 드러냈었다.
황가를 증오하는 분이, 인간을 싫어하는 분이 어째서 눈사태를 막은 걸까?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알게 된 대공의 모습과 부황의 평가 사이에 괴리감이 일어 혼란스러웠다.
“특별히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럼, 케루나 지역에 추가로 지원해야 될 것은 없나?”
“그게. 눈사태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기사단에서도 환자가 여럿 발생했습니다.”
“환자라니?”
클로디안의 수려한 눈매가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