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온통 새하얀 고원지대에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허, 이게…….”
메마른 땅을 덮은 검은 액체, 닿는 것마다 모두 녹여버리는 지열과 증기 그리고 숨 쉴 수 없을 정도의 악취.
이것이 폴루티아의 특징인데. 이 새하얀 풍경은 뭐란 말인가.
더구나 아카르트 제국은 겨울이라고 해도 기온이 온화하기 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는다.
시스템 오류인가.
“이전에 다녀온 곳들과는 다를 거라 하지 않았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대공의 음성은 담담하기만 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붉은 머리 위로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불꽃 위의 눈이라니.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데 탐스러운 눈송이는 이 순간에도 착실하게 쌓여 가고 있었다.
이질적인 풍경이라 그런가? 더욱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하얀 눈밭에 홀로 핀 붉은 장미처럼 붉은 대공의 머리칼이 너무나 고혹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뻗어나간 손이 대공의 머리 위에 탑을 쌓고 있는 눈송이들을 가볍게 쓸었다.
그때까지도 뚫어질 듯 나를 바라보던 대공이 힐끗 제 머리를 쳐다보았다.
“음, 눈을 털어드리고 싶었는데 금방 다시 쌓여버리네요.”
손으로 치우기 무섭게 쌓이는 눈에 내 노력이 무의미해졌다.
그 순간.
화르륵.
대공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오르더니 그의 머리는 물론이고 떡 벌어진 어깨 위에 쌓였던 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후로도 대공의 몸에 눈송이가 닿는 즉시 녹아버렸다.
“아…….”
뭔지 모를 아쉬움에 작게 탄식을 흘리자 대공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폴루티아에서는 잠시라도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아름다워서요. ……스승님의 붉은색이.”
“…….”
순간 대공과 나 사이에 겨울밤과 같은 적막이 흘렀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었다.
제멋대로 움직인 입술을 응징하고 싶었지만 얼굴 보호막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 눈은 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잠시 침묵하던 대공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현혹시키기 위한 눈속임일 뿐이지. 눈송이가 닿는 곳마다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검은 액체, 폴루탄과 같아.”
눈송이를 담기 위해 손을 뻗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아, 그래서 보호막이 열리지 않았던 거구나.’
나는 빈틈없이 안면을 가리고 있는 투명한 보호막을 매만졌다.
“무엇을 현혹시키기 위해 이런 위장을 하는 건데요?”
리라이트를 게임할 때 나오는 폴루티아는 모두 이전과 같이 검은 액체로 둘러싸인 곳만 있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 동물은 물론 사람들까지.”
폴루티아로 변한 곳은 동물이고 사람이고 발길을 끊는다.
하지만 평범한 자연환경으로 위장하게 되면 멋모르고 발을 들이겠지.
그것도 눈을 볼 수 없는 나라에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면 누구나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죽음으로 이끄는 덫이라니.
“왜 갑자기 달라진 걸까요? 이런 경우는 처음 봐요.”
“글쎄. 왜 전략을 바꾼 걸까?”
마치 폴루티아를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는 듯한 말에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아닌 저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세히 캐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스승님, 눈이 너무 많이 내려요.”
언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아리까지 쌓여 있는 눈은 금세 허벅지까지 다다를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간 발이 묶여 꼼짝도 하지 못할 것이다.
눈발도 더욱 굵어지고 있어서 시야 확보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빨리 해결해야겠군.”
대공이 신검을 소환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해머를 두 손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모울링은 눈두더지다. 땅 속에 폴루탄을 뿌리고 다니며 오염시키고 땅 속 모든 생명체의 생명력을 빨아들이지.”
“눈이 많이 쌓여서 모울링을 찾기 어렵겠는데요?”
“그것들은 눈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잘 다닌다.”
대공이 신검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평평한 눈밭 위로 울룩불룩한 길을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것들은 빠르니, 눈 위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네 발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
모울링의 넓적한 발톱에 상처 입는 즉시 발이 썩어 들어가게 될 거란 말에 섬뜩해졌다.
“준비해.”
하나로 이어지던 길이 삽시간에 십여 개로 늘어났다.
자세를 낮추며 해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구불구불 어지럽게 이어지던 길이 점점 우리 앞으로 가까워졌다.
폭.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모울링은 정말 두더지와 닮아 있었다.
다만 보통 두더지보다 몇 배는 크고 전체적으로 새하얀 모습이었다.
어마무시하게 넓고 긴 앞다리 발톱은 생각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눈밭 위로 머리를 드러냈던 모울링은 정말 순식간에 눈 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움직여!”
대공의 외침에 나는 자리를 옮기며 모울링이 튀어나오는 족족 머리를 때렸다.
전생의 두더지 게임이 연상되는 모울링 잡이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것들은 눈 속에서 빠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나는 눈 속에 푹푹 빠지는 다리 때문에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아, 활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장거리에 취약한 해머에 불만을 토로할 때 문득 이전에 보상으로 받았던 아이템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아이템창을 열어 ‘드루이드의 과녁’을 선택했다.
『드루이드의 과녁을 장착하시겠습니까?』
‘예’를 선택하자 사격 게임을 하듯 눈앞에 과녁이 나타났다.
드루이드의 과녁은 정확한 타격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모울링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미리 예측하여 알려주기까지 했다.
빨간 불이 깜박거리는 과녁을 따라 준비하면 어김없이 모울링이 눈밭 위로 불쑥 튀어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웅.
나는 굵은 눈발 사이로 날아가는 해머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간의 훈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정확히 모울링의 머리를 맞힌 해머가 부메랑처럼 내 손으로 돌아왔다.
“익숙해졌군.”
마치 날아다니는 것처럼 가볍게 눈 위를 뛰어다니던 대공이 근처로 다가와 툭 말을 내뱉었다.
“스승님 덕분이죠!”
대공의 호감을 높일 기회라 생각해 냉큼 대답했지만 대공의 반응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마음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지난번 포리지 사건으로 대공이 겉과 속이 다른 남자라는 걸 간파했으니까.
‘이것도 포리지처럼 호감도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겠지.’
나는 열심히 긍정 회로를 돌리며 모울링 사냥에 집중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바디슈트 안에 열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뛰어다니는 동안 레벨 업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떴다.
『‘행운의 주사위’ 스킬이 발동했습니다.
결정석을 획득하였습니다.』
예스!
드디어 결정석 세 개를 다 모았다.
음화화홧!
나는 속으로 환호를 지르며 신나게 해머를 휘둘렀다.
……447, 448, 449, 450.
끝! 드디어 끝났다.
목표 달성을 확인하자마자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사이 눈이 많이 쌓인 덕분에 푹하고 몸이 아래로 꺼지긴 해도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퓨릭서는?”
고개를 들자 대공이 땀방울 하나 맺히지 않은 멀끔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 누가 보면 나 혼자 눈밭을 구른 줄 알겠네.’
비딱한 마음으로 쳐다보자 대공이 한쪽 눈썹을 스윽 올렸다.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대공이 자세를 낮추어 눈높이를 맞췄다.
새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가 과실을 닮은 입술이 유독 붉어보였다.
입술에 집중되려는 시선을 애써 붙들어 비스듬히 턱선으로 내렸다.
“아쉬운가?”
뭐가?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대공이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눈.”
눈?
대공이 큼지막한 손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아 내게 내밀었다.
신기하게도 바로 녹아버렸어야 할 눈송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지 않나.”
‘아, 그러네. 이 세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는 눈이 되겠네.’
원래 세상에서는 겨울마다 볼 수 있었는데.
새삼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걸 상기하자 애써 묻어두었던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나는 입안의 살을 지그시 깨물어 복받치는 감정을 내리 눌렀다.
그때 무뚝뚝하면서도 온기를 품은 음성이 들려왔다.
“저택 정원에서 눈을 볼 수 있게 해주지.”
대공의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나는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다.
“……대공저에서 눈을요?”
“그래.”
“왜요?”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네가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내가?
설마 내가 눈을 못 보게 될까 아쉬워서 정화를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한 거야?
대공의 오해가 황당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실레니아 호수 정화 때에도 내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호수의 옛 모습을 복원시켜 줬었지.
그때는 지금보다 호감도가 더 낮았었는데도 말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저런 호의를 베풀 만큼 호감도가 높은 것도 아니었다.
왜 내게 호의를 베푸는 걸까?
‘내 포리지에 보답해 주고 싶은 건가?’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 밖에는 없었다.
“이곳의 눈은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오염된 것은 물론이고 이대로 둔다면 곧 눈사태가 일어나게 될 거야.”
답지 않게 길게 설명하는 대공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눈사태라는 말에 빛바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2회차 때 황태자와 호감을 쌓아가던 시기.
갑자기 대규모의 눈사태가 일어나 황태자가 바빴던 적이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제국에서 눈사태라니.
수해 안전지대인 베히른 홍수에 이은 기상이변에 황실에서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 기억났다.
제국이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었으니까.
그때 눈사태의 규모가 커서 사망자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그들을 살릴 수 있겠구나.’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 회차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이들을 이번에는 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발버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퀘스트가 조금은 의미 있게 느껴졌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려보았다.
“눈. 약속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가 멀뚱히 내 손을 쳐다보았다.
나는 손수 그의 새끼손가락에 고리를 걸었다.
“약속 하신 거예요.”
잠시 서로 맞물린 손가락을 응시하던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퓨릭서 뚜껑을 열어 바닥에 뿌렸다.
신기하게도 영영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높이 쌓여 있던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침내 깎아 지르는 듯한 봉우리와 그 아래 넓게 펼쳐진 황량한 고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띠링!
『퀘스트 ‘모울링을 잡아라!’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스킬 선택권 1장이 지급되었습니다.』
퀘스트 완료 메시지와 함께 안면 보호막이 사라지자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있던 슈트를 벗었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일어날 수 있겠나?”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이 내게 물었다.
체력이 많이 붙은 터라 굳이 대공의 도움은 필요 없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자고로 서로 온기를 나누다보면 없던 정도 생기고 굳은 마음도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라고.
“안아 주세요.”
물끄러미 나를 보던 대공이 가볍게 나를 안아 들었다.
“체력 훈련을 게을리 하는 게 아닌가?”
“매일 빠지지 않고 하고 있어요.”
대공이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다리가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뛰어다니는 게 얼마나 체력 소모가 심한지 아세요?”
그 위를 날듯이 뛰어다닌 분은 모르시겠지만.
뾰로통하게 대꾸하자 물끄러미 나를 보던 대공이 갑자기 어딘가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시야가 이지러졌다.
뒤이어 황량한 고원이 아니라 대공저의 아치형 창문이 보였다.
“스승님……?”
아무리 둘러봐도 나를 안고 있던 대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황망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