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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52)화 (52/140)

52화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내가 그 정도로 미덥지 못했나? 카밀라와의 일을 숨겨야 했을 만큼?

아니면 나보다 카밀라가 더 중요했던 건가? 내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보호할 정도로?

가슴 어딘가가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러다 이제 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와 나는 이미 예전에 끝난 관계인데.

다시 이어 붙이기에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지금 중요한 건 지난 회차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이번 회차에서 뒤틀림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카펜에 의뢰하는 게 낫겠어.’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데 더 캐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서로 신뢰가 없는 사이에서는 더더욱.

“사정이 있다니 더는 묻지 않을게. 신경 쓰지 마.”

때마침 직원이 다가와 우리가 주문한 디저트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아몬드 쿠키를 먹으려고 집어 드는데 갑자기 손이 덥석 붙잡혔다.

“로나, 아니야.”

“뭐가?”

“나랑 공녀랑 그런 사이 아니야.”

다급하게 변명하던 애런이 입술만 달싹이다 커다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몇 번 길게 심호흡하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공녀는 우연히 몇 번 만난 적이 있어. 봄의 연회 때랑 시내에서.”

그때마다 카밀라가 낸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때는 낸시의 친구들까지 가세한 경우도 있었다고.

“차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못했지만.”

자신이 나서면 카밀라가 낸시에게 더 크게 곤욕을 치르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인기척을 내거나 혼자 남은 공녀에게 겉옷을 빌려주는 일이 전부였어.”

가라앉은 음성엔 미처 지우지 못한 자책이 남아 있었다.

“그냥 ……도와주고 싶었어. 왠지 공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어서.”

조심스럽게 나와 눈을 맞춘 애런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장미 축제 때 낸시에게 괴롭힘을 당한 카밀라를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카밀라가 황태자와 약혼하게 되었단 사실에 기뻐하고 안도했는지.

그는 카밀라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새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냉대를 받고 있으니.

지금 드는 이 기분은 무슨 기분인 걸까?

카밀라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겠다고 친구이자 연인인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서운한 걸까?

아니면 지난 2회차 내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화가 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자조하고 있는 건가?

애런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호언장담했던 스스로가 우스워서?

어찌 보면 별 일 아닌 일이다.

오가면서 도와줄 수도 있지. 카밀라의 상황이 딱한 건 사실이잖아.

나라도 그 장면을 보았다면 달려가 말렸을 것이다.

카밀라를 도와주고 그녀의 치부를 감추어 주려고 했던 애런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질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시리지?

‘그래, 별 일 아니야. 그러니 내게도 말해줄 수 있었잖아.’

그저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사소한 도움을 주었다고 말해줄 순 없었어?

아무리 별 일이 아니었어도 내 앞에선 친분이 없는 사람처럼 굴진 말았어야지.

내가 그래도 네 연인이었는데!

네 사정을, 네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나였는데.

네가 카밀라를 보고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어?

내가 그리도 미덥지 못했던 거야? 나는 네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니?

그래서 날 배신한 거야? 그래서 날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던 거니?

문득 카밀라와 황태자의 약혼이 이번 회차에서 처음 일어난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넌 언제까지 카밀라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니?’

점점 불행해지는 카밀라와 네 옆에서 웃고 있는 나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 거니?

설마 ……나를 죽이고 살리려 했던 여자가 카밀라는 아니겠지?

만약 그 여자가 카밀라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손끝이 차가워졌다.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웃고 싶었다.

그러나 한심하고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를 향한 자조는 끝내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도 못하고 바스러졌다.

갑자기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심연이 들끓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원망과 복수라는 칼날들이 하나둘 심연 위로 떠올랐다.

휘몰아치듯 위로 솟구친 칼날들은 이성이란 이름으로 힘겹게 막아놓았던 둑을 단숨에 무너뜨려버렸다.

그것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심장을 난도질하고 식도를 날카롭게 그어댔다.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달한 칼날들이 자신들을 내보내 달라며 아우성쳤다.

‘안 돼.’

당장이라도 뱉어내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칼날은 나도 모자라 애런까지 상처 입힐 테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애런은 그 애런이 아니야!’

저 아이는 아무 죄가 없어. 그러니 이 칼날은 내가 삼켜야만 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까.

나는 꾹 다문 입에 힘을 주었다.

“두 분 잘 어울리더라. 정말 다행이야.”

내가 지금 무엇과 치열하게 싸우는 지도 모르는 애런은 카밀라의 행복을 기원하며 편안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원망스럽게도.

“무슨 일이든 끝은 있다는 말. 맞는 거 같아.”

애런이 나를 보며 말갛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화답해 줄 수 없었다.

내겐 이 게임의 끝이 보이지 않으니까.

* * *

애런과 헤어지고 돌아온 날, 몸져눕고 말았다.

나는 하루를 꼬박 앓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가능하면 애런을 생각하지 않으려 일에 몰두했다.

애런도 황태자도 모두 호감도가 10%가 넘어서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카라나이트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세공사 아이작이 황도로 올라왔고 카라나이트는 본격적으로 세공에 들어갔다.

벨라, 카밀라와 함께 보석점을 낼만한 가게 자리도 알아봤다.

지금은 계약을 마치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아가씨, 오늘은 외출하지 않으시나요?”

“응, 오늘은 쉴래. 요즘 너무 바빴어.”

간만에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바로 소파에 널브러졌다.

식기를 정리하던 조이가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요즘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긴 하셨죠. 안 그래도 피부가 푸석해지셔서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랬어?”

정말 그런가 싶어 얼굴을 만져봤지만 매끈하고 보들보들하기만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하지만 조이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아가씨의 미모가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건 제가 용납할 수 없어요.”

작은 주먹을 불끈 쥔 조이가 비장하게 결의를 다졌다.

그 모습이 도토리를 사수하려는 다람쥐 같아 보여 웃음이 났다.

“잠시 쉬고 계세요. 팩 준비해서 올게요.”

조이가 아기 엉덩이처럼 보들보들한 피부로 만들어 드리겠다며 호기롭게 방을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나는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었다.

『로웨나 케인

  레벨 : 30   명성 : -55

  HP : 390    GP : 340

  체력 : 342   근력 : 330

  민첩 : 310   지성 : 300』

‘우와, 명성이 많이 올랐네.’

제일 먼저 베히른에 구호 물품을 지원하고 직접 구호 활동도 했었다는 사실이 황도에도 알려진 덕분이었다.

‘처음 소식을 듣고 다들 반신반의했었지.’

심지어 내가 평판을 올리기 위해 조작한 소문이라는 말까지 나돌았었다.

베히른 후작과 후작 부인이 황도에 올라와 증명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도 사교계에서 열심히 안주거리가 되고 있었을 것이다.

‘카라나이트를 판매하기 시작하면 명성이 더 오르겠지.’

사람들이 또 어찌 반응할지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레벨도 많이 오르긴 했는데 아직 갈 길이 머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이템창을 열어 아다마스 해머를 확인해보았다.

『아이템 : 아다마스 해머

종류 : 고대 유물

등급 : B 

[공격력 30% 향상, 천공의 방패(액티브 스킬) 추가]

제한 :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죽일 수 없다.』

“음, 역시 등급이 올랐네.”

아다마스 해머는 GP가 300, 600, 900을 넘을 때마다 자동 업그레이드가 된다.

‘천공의 방패라.’

해머의 등급이 올라가면서 오픈된 부가 스킬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아다마스 해머는 리라이트를 할 때 나오지 않았던 무기였기에 스킬도 생소했다.

『액티브 스킬 : 천공의 방패

마법, 주술, 신술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 : 5분

쿨타임 : 48시간』

“하! 쿨타임이 48시간?”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스킬에 놀람도 잠시, 기가 막힌 쿨타임에 헛웃음이 나왔다.

‘퀘스트당 한 번 사용할까 말까한 스킬이잖아.’

역시 염전이 울고 갈 시스템답네.

뭐, 안 주는 것보단 낫긴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퀘스트를 떠넘기려고 이리 생색을 내는지 조금 두려워졌다.

띠링!

마침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퀘스트> ‘모울링을 잡아라!’

농작물의 뿌리를 갉아먹는 모울링을 잡고 케루나 지역의 폴루티아화를 막으십시오.

목표 1 : 모울링 (0/450)

목표 2 : 케루나 지역 정화

보상 : 스킬 선택권 1장』

“이상한데.”

나는 메시지의 보상 부분을 보며 중얼거렸다.

시스템이 스킬을 저렇게 순순히 줄 리가 없는데.

사실 모울링 450마리 처리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번 회차의 난이도가 높아진 상태라 괜히 의심스러웠다.

‘뭐, 대단한 건 아니겠지.’

시스템에 대한 기대는 오래 전에 버린 터라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보다는 지금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나 오늘은 쉬려고 했는데.”

나는 소파에 딱 붙어버린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붉은 피리를 불자 잠시 후 전령새가 날아왔다.

삐로롱 우는 새를 보니 이유 모를 안도가 일었다.

“스승님께서는 오늘도 무탈하신 모양이구나.”

전령새의 앙증맞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준 뒤에 퀘스트 에 관한 쪽지를 넘겨주었다.

여느 때처럼 쪽지를 삼킨 전령새가 가볍게 날갯짓을 하며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나도 준비해야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한 뒤 조이를 불렀다.

* * *

“스승님, 저 왔어요.”

반갑게 손을 흔드는 데도 대공은 무덤덤하게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젠 그 무뚝뚝함에 익숙해져 상처는 받지 않지만 가슴 한편에 답답함이 일었다.

‘목석같은 대공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

호감도 100% 달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두 회차에서 각각 애런과 황태자의 연인이 되었음에도 달성하지 못했던 수치니까.

문득 현재 대공의 호감도가 얼마일지 궁금해졌다.

호감도를 의식한 순간 대공의 머리 위로 호감도 바가 반짝거렸다.

20%.

‘으잉?’

언제 이렇게 많이 올라 있었던 거지?

설마 내가 만든 음식이 입맛에 맞았던 건가?

‘사람이 참 솔직하지 못하네.’

그렇게 맛있었으면 칭찬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참으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오늘 가야할 곳이 북부 케루나 지역이라고 했지?”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다.”

왜 각오를 해야 하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지만 대공은 가보면 알 거란 말만 했다.

툴툴거리며 스크롤을 찢었는데 케루나에 도착한 순간 바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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