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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51)화 (51/140)

51화

잠시 후 테이블 위에는 새로 주문한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졌다.

“영애는 요즘도 대공과 자주 만나나?”

클로디안이 들고 있던 와인잔을 빙글 돌리며 물음을 건넸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 담겨 있던 자줏빛 와인이 얕게 출렁거렸다.

“네. 정기적으로 찾아뵙고 있어요.”

“대공 전하와 친분이 있었어요?”

이 중 유일하게 나와 대공의 관계를 모르는 카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제지간이야. 영애가 직접 대공에게 스승이 되어 달라 청했다더군.”

“아, 그랬군요. 저는 대공 전하께서 승낙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카밀라가 날 향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내가 대공을 깨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어.

대공은 이번 회차에 처음 나타난 캐릭터잖아.

카밀라가 플레이어라고 해도 나와 대공의 사정을 알 리 없어.

그럼에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불안감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가 뭘까? 무척 궁금하군. 안 그런가, 하퍼 경?”

“아, 네.”

나를 비롯해 두 남자의 시선까지 받게 된 카밀라가 볼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영애에겐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수줍게 흘러나온 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다.

“동업을 제안 받았을 때 영애가 내민 손을 잡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아마 대공 전하께서도 그런 마음이지 않으셨을까요?”

“이거, 카밀라가 영애에게 완전히 반한 모양이로군.”

클로디안이 호탕하게 웃자 카밀라가 더욱 볼을 붉혔다.

카밀라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붙잡았을 뿐 그녀를 믿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생각보다 깊은 호감과 신뢰를 보이는 카밀라가 불편했다.

나는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며 그린 듯 미소를 지었다.

이 세 사람 모두 엔딩을 볼 때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사람들이니까.

“저를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두고 보세요. 공녀님은 사업가로 성공하실 거예요. 제 눈은 틀리지 않거든요.”

카밀라에게 사업가의 능력이 있는지는 차차 알아봐야겠지만 일단 그렇게 말했다.

내가 먼저 동업을 제안했으니 이 정도 확신은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차피 카밀라에게 능력이 없더라도 내가 성공시키면 되니까.

내 호언장담에 클로디안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지만 모른 척 했다.

사업이라곤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애송이가 다른 이의 성공을 점치니 우습기도 하겠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이러니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요.”

 카밀라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눈을 빛냈다.

그때 줄곧 카밀라를 바라보고 있던 애런의 시선이 느릿하게 내게 닿았다.

조금은 낯선 사람을 보는 듯이, 또 조금은 되돌아온 사람을 반기는 듯이.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

애런과 황태자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카밀라까지 상대하려니 버거웠다.

세 사람을 피해 시선을 내리자 자줏빛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조급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와인잔으로 뻗어지는 손에 힘을 주었다.

잔을 집어 목구멍으로 억지로 와인을 붓자 쌉싸름함과 함께 홧홧한 느낌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제야 온 몸의 근육이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카밀라가 나보다 영애를 더 좋아하는 것 같군. 역시 케인 가문답게 수완이 좋아.”

“과찬이십니다.”

“영애는 만날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 같아.”

클로디안이 빙그레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와인잔 너머로 진득한 눈빛이 느껴졌다.

띠링!

호감도 12%.

도대체 무엇이 클로디안의 호감도를 움직이게 한 것일까?

카밀라와 친분을 쌓은 것이 주효했던 것인가? 아니면 평판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일까?

뭐가 됐든 다행이긴 한데 그의 눈빛이 신경 쓰였다.

‘이미 약혼도 했으니 이성적으로 엮일 일은 없겠지.’

왠지 모를 찝찝함을 애써 털어버렸다.

‘10%는 넘겼으니 조금 더 올려 안정권으로 만들어 놓자.’

클로디안과는 언제 다시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해야 했다.

나는 입가에 힘을 주어 여유로운 미소를 가장했다.

“평판이나 소문은 과장되고 왜곡되기 마련이죠.”

내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꺼낸 말인데 카밀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나 못지않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많이 오르내린 사람이니 내게 동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애런도 카밀라의 처지를 떠올린 것인지 그녀에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그에 반해 클로디안의 시선은 내게 향해 있었다.

“그래서 사람은 직접 만나봐야 하는 거야.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거든.”

그 탓에 꼭 나를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금세 카밀라에게 향했다. 나를 쳐다본 것은 우연이었다는 것처럼.

“우리도 그날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서로 알아보지 못했겠지. 운명이 우리를 이끌었다고 생각해.”

카밀라의 손등에 입을 맞춘 클로디안이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카밀라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클로디안의 입맞춤에 카밀라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지는 게 아닌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보이기에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카밀라의 긴장을 알아챈 것인지 클로디안이 손등을 매만지며 토닥였다.

다행히 카밀라는 다시 여유를 찾고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방금 전 클로디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날의 대화.

어딘지 의미심장한 단어 선택이 아닌가.

‘무슨 대화가 오고 갔던 것일까?’

왠지 그 대화가 두 사람이 게임 시나리오를 벗어나게 된 원인과 관계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공녀가 로나를 편견 없이 봐주니 마음이 한결 놓이네요. 로나가 겉으로는 씩씩하게 굴어도 마음은 여리거든요.”

애런이 어린 동생을 대하듯 내 머리를 가볍게 톡톡 도닥였다.

“앞으로도 우리 로나 잘 부탁드려요.”

“영애가 부럽네요. 하퍼 경과 같이 든든한 친구가 있어서.”

“애런은 제가 많이 의지하는 친구예요. 고마운 것도 많고.”

말을 하면서도 입안이 까끌거렸다.

그래도 애런에게 향하는 눈길만큼은 어색하지 않았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워낙 어릴 적부터 친구라 그런지 절 동생 취급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요.”

“동생이라니. 내가 언제.”

애런이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 날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생각하잖아.”

“그거야 최근에 안 좋은 일이 많았으니까 그렇지.”

애런이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내가 호수에 빠졌던 일을 떠올린 것인지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날 일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어릴 때는 맨날 울고 다녔으면서. 너 괴롭히는 애들 내가 다 혼내줬었잖아.”

어린 시절의 흑역사를 꺼내자 애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퍼 경이 누구에게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닐 텐데.”

클로디안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어릴 때는 또래보다 체격이 작았거든요.”

“아, 그랬던 것도 같군. 하긴 하퍼 경이라면 자신이 맞았다고 해도 그냥 참았겠지.”

“맞아요. 그래서 제가 무척 바빴어요. 대신 응징하러 다니느라.”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클로디안과 카밀라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목덜미까지 벌게진 애런은 그만 얘기하라며 나를 쿡쿡 찔러댔다.

결국 나까지 웃음을 터트리자 애런이 손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그렇게 식사는 유쾌하게 마무리 되었다.

헤어질 때 클로디안의 호감도는 13%로 1%가 올라 있었다.

‘한동안 만나지 않아도 되겠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호감도를 높일 수 있었으니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클로디안과 카밀라와 헤어진 뒤 나는 애런과 함께 번화가를 거닐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던 애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젠 안 울어.”

“……?”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황태자와 카밀라 앞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 걸까?

상당히 부끄러워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조금 미안해졌다.

사과의 말을 꺼내려던 찰나, 애런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어릴 때처럼 약하지 않아, 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어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다.

“로나, 나는 더 이상 네가 지켜줘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야.”

네 나이가 몇 살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며 가볍게 받아치려던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푸른 눈동자에 거칠게 일렁이는 감정은 단순히 어린아이 취급이 못마땅한 소년의 치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감정의 깊이가 깊고 묵직했다.

“앞으로 너를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젠 내가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기사의 맹세를 읊는 것처럼 단호하고 결의에 찬 음성에 나는 물끄러미 애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다정하고 온화했지만 한 번도 달아오르거나 끓어오른 적이 없었다.

꼭 적당히 데워진 돌처럼.

그런데 지금은 한여름의 태양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강렬하고 뜨거웠다.

낯설었다.

저런 눈빛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건가.

마주 보이는 맑은 눈동자에 딱딱하게 굳은 내 모습이 비쳤다.

그러나 표정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18%.

애런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호감도가 나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혼란에 잠긴 사이 애런은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애런에게 손을 붙잡힌 채 멍하니 그를 따라 걸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 나를 배려한 것일까? 아니면 애런도 생각에 잠겼던 걸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애런도 더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결국 디저트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사이엔 어색한 정적만 흘렀다.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로나, 여기는 쿠키가 맛있는 집이래. 종류별로 다 시켜볼까?”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애런이 내게 물었다.

“아, 응.”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애런에게서 느껴지던 낯선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걸까?’

그저 황태자와 카밀라 앞에서 어린 시절 흑역사를 얘기한 것이 민망해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애런은 기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항상 나를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여기니까.

그래서 어린 아이가 아니라고, 지켜줄 수 있다고 말했던 걸 거야. 그래, 그래서였을 거야.

애써 합리화를 하자 팔딱팔딱 빠르게 뛰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안정되는 것 같았다.

“너는 아몬드 쿠키랑 초콜릿 쿠키를 좋아하니까 그건 몇 개 더 시키자.”

“그래.”

나는 냉수를 마시며 남아 있던 찜찜함마저 다 털어내 버렸다.

“아까는 많이 불편했지? 식사도 잘 못하던데.”

“응, 조금. 황태자 전하께서 앞에 계시니까 긴장이 되더라고.”

내겐 세 사람 모두 불편한 사람들이었지만 적당히 둘러댔다.

“나도 매번 전하 앞에 서면 긴장되는데 넌 오죽하겠어?”

“그래도 공녀님이 함께 계셔서 다행이었어.”

나는 기회라 생각하고 슬쩍 카밀라를 언급했다.

“네가 공녀님하고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어. 내겐 공녀님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아, 그건…….”

애런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도 말해줄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짐짓 서운한 티를 내며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애런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단지 공녀의 개인적인 사정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을 뿐이야.”

개인적인 사정?

굉장히 은밀한 단어 선택에 가슴이 덜커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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