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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50)화 (50/140)

50화

애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낸시 일행의 머리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큰 체격이 주는 위압감과 더불어 싸늘한 표정에 다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공녀, 내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공녀 때문에 음식이 다 식은 게 보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식사를 방해하는 건 어디서 배운 예법입니까?”

“뭐라고요?”

낸시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치켜떴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공녀 때문에 식사를 방해받고 있으니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합니다.”

다소 고압적인 언사에 낸시가 모멸감을 느낀 듯 몸을 떨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런 곁으로 다가갔다.

많이 화가 났는지 불끈 쥔 주먹에 푸른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커다란 손에 가만히 손을 포개자 움찔하며 그가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다고, 참으라고 손을 도닥이자 애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서 대화가 길어져봤자 공녀님의 평판에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계속 계실 건가요?”

내가 주변을 눈짓하자 그제야 낸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곤 낸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어디선가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언니?”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낸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계단참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카밀라였다.

그녀 옆에는 누가 봐도 황태자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클로디안이 서 있었다.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애런의 우렁찬 음성이 울려 퍼지자 멍하니 있던 이들도 허겁지겁 인사를 올렸다.

나도 그들과 함께 고개를 숙였으나 낸시만이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었다.

‘놀랐나? 그럴 리가 없는데.’

힐끗 눈을 들자 부들부들 떨리는 몸과 함께 질투와 분노로 타오르는 눈빛이 보였다.

“언니? 괜찮으세요?”

“그러게. 공녀가 오늘 좀 이상하군. 예법에 어긋하게 행동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카밀라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이어 웃음기 어린 클로디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너무 당황해서.”

뒤늦게 혼자만 꼿꼿하게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낸시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를 보고 놀란 건가? 하긴 황궁 밖에서 날 봤으니 놀란 만도 하겠군. 내가 이해하지.”

“가, 감사합니다.”

낸시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자, 다들 일어나게. 내가 식사를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하군.”

“아닙니다.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 젊은 청년의 말에 여기저기서 클로디안을 칭송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전하께서는 공녀님과 함께 데이트를 나오셨나 봅니다.”

어느 노신사의 말에 클로디안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이곳 음식이 유명하다고 해서 카밀라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어 이리 나왔다네.”

“그러셨군요. 보기 좋으십니다.”

“약혼 발표도 한 마당에 숨길 게 뭐가 있겠나. 보고 싶으면 봐야지.”

카밀라를 향한 클로디안의 눈빛이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달았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옆에서 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인데.’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낸시가 주먹이 부서질 것처럼 쥔 채로 카밀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러다 큰 코 다칠 텐데.’

클로디안이 잘 웃는 탓에 온화해 보이지만 절대 유한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제 것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미리 낸시를 위해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나저나 하퍼 경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군. 케인 영애도.”

애런을 바라볼 때 흐뭇하던 눈빛이 나를 향했을 때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집요하기도 한 것이 아무튼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뭔가 찝찝한데. 호감도를 확인해 봐야 하나?’

호감도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수치에 변동이 일어났다고 알림음이 온 순간을 제외하고는 보고 싶다고 생각을 해야 눈에 보였다.

망설이다 호감도를 보고 싶다고 의식한 순간.

‘뭐야, 호감도가 왜……?’

황태자 머리 위에 떠 있는 호감도를 보곤 눈을 크게 떴다.

마지막으로 호감도를 확인했을 때가 베히른 영지에서였다.

호수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황태자를 만나긴 했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어 호감도를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그때가 분명 8%였는데 왜 갑자기 11%가 되어 있는 건데?

그 사이 특별한 이벤트도 없었잖아.

이젠 시스템도 미쳐 돌아가는 것인가.

“동료들이 이곳의 음식을 추천하길래 로나와 함께 왔습니다. 로나가 스테이크를 좋아하거든요.”

“하퍼 경까지 찾아올 정도면 정말 유명한 집이긴 한가보군.”

클로디안의 너스레에 애런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어 했다.

“그런데 영애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무슨 일이 있나? 꼭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눈빛인데.”

클로디안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때까지도 혼란에 빠져 대답을 못하고 있자 애런이 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톡 쳤다.

“로나?”

“응?”

어리둥절하게 애런을 쳐다보자 걱정스러운 눈길이 닿아왔다.

“전하께서 물으시는데 대답이 없어서. 혹시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몰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전하, 송구합니다. 제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느라 바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아닙니다.”

“흠.”

클로디안이 턱을 쓸며 나를 유심히 살폈다.

힐끗 낸시에게 닿았던 시선이 우리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으로 향했다.

“이런. 음식이 다 식어버렸군. 나 때문인 듯하니 내가 책임지지.”

클로디안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안내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다가왔다.

“2층 손님들의 식사는 모두 내가 계산할 테니 따뜻한 음식으로 교체하게.”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바로 직원들에게 지시하자 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퍼 경과 케인 영애는 우리와 함께 식사하도록 하지. 3층으로 올라오게.”

“전하, 저희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퍼 경, 내가 그대들과 식사하고 싶어 그러니 사양하지 말게.”

애런이 난처한 기색으로 나와 클로디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차피 낸시 때문에 음식은 다 식었고 주위의 시선 탓에 편히 먹기도 틀린 상황.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해봤자 비난만 받을 테니 지금은 따르는 게 최선이었다.

클로디안의 뜻에 따르라는 뜻으로 애런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흡족하게 웃은 클로디안이 카밀라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려던 찰나 낸시가 그들을 붙들었다.

“전하, 저도 합석하면 안 될까요?”

낸시가 언제 카밀라를 노려봤냐는 듯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공녀도 식사 중이었나?”

“네?”

뜬금없는 질문에 낸시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음식을 주문해서 식사하던 중이었느냐고 물었어.”

“아, 아직.”

“다행이군. 내가 식사를 방해한 건 아니라서. 그렇다면 공녀와 함께 할 이유는 없겠군.”

“그게 무슨……?”

낸시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공녀는 다음에 체임버 공작가를 정식으로 초대할 때 함께 식사하도록 하지. 그럼, 이만.”

클로디안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냉정하게 돌아섰다.

카밀라는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조용히 서 있다가 클로디안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뒤늦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낸시가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떴지만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나와 애런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유유히 3층으로 올라갔다.

“미안해, 로나. 둘이서 오붓하게 식사하려고 했는데.”

애런이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괜찮아. 네 탓도 아닌 걸.”

“그렇지만…….”

힘없이 처진 어깨를 보니 여간 속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애런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피로한 날인데 어쩌다가 낸시도 모자라 황태자까지 엮이게 된 것인지.

‘정말 일진이 사납네.’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애런의 등을 도닥였다.

“아직 디저트가 남았잖아. 카페는 조용한 곳으로 가자.”

“그래, 내가 맛있는 디저트 카페도 알아왔어.”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생각한 것인지 애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것도 동료들이 알려줬어?”

“응. 여자친구가 있는 기사들이 많이 알고 있더라고.”

디저트까지 알아봤을 줄은 몰랐는데.

오늘을 위해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봤을 걸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너 안 그랬잖아.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니? 아니면 내가 너를 잘 몰랐던 걸까?

사소한 변화임에도 불안했다.

이 작은 균열이 큰 변화를 불러오게 될까봐.

클로디안과 카밀라가 들어간 곳은 독립된 룸으로 된 곳이었다.

‘사람들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인가.’

그들의 뒤를 따라 룸 안으로 들어가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와 애런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애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야말로 두 사람과 함께 식사할 수 있어서 기쁘군.”

“저도요. 두 분께는 감사한 일이 많은데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드렸었거든요.”

카밀라가 수줍게 웃으며 말하자 클로디안이 의아하게 애런을 쳐다보았다.

“그대와 하퍼 경이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군.”

나도 궁금하던 참이라 애런과 카밀라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하퍼 경의 도움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어요. 장미 축제 때에도 하퍼 경이 아니었다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거예요.”

역시 장미 축제 날 처음 만난 게 아니었어.

왜 애런은 카밀라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던 걸까?

이번 회차는 게임 초기니 그렇다 쳐도 지난 회차들에서는 얼마든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거슬렸다.

“아, 그 날…….”

잠시 기억을 더듬던 클로디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 축제 날 카밀라와 낸시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도 아는 모양이었다.

“이거 식사만으로는 안 되겠군. 경에게 제대로 사례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저는 근위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애런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젓다 이내 카밀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직접 만날 기회가 없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약혼 축하드립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애런의 눈빛에 안도와 함께 온기가 묻어났다.

심지어 한시름 놓은 사람처럼 후련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이성적인 애정이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단순히 곤경에 처한 이를 걱정했다고 하기엔 감정의 색이 짙었다.

지난 회차들에서도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뭔가 속이 울렁거렸다. 

“고마워요.”

잔잔하게 미소 짓는 카밀라에게선 고마움 외의 감정은 읽혀지지 않았다.

클로디안이 있어서 감정을 숨기는 것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인연이 깊긴 한가 보군. 영애도 이번에 카밀라와 함께 사업을 하게 되었다지?”

클로디안이 툭 던진 말에 애런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카밀라와의 동업은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터라 놀란 모양이었다.

“제가 배우는 입장이에요. 영애의 도움이 없었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예요.”

나를 향한 카밀라의 회색 눈동자에 호의가 가득했다.

“영애, 카밀라를 잘 부탁해.”

클로디안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그에 화답하기 위해 정중하게 목례했다.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애런만이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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