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49)화 (49/140)

49화

“예상치 못한 조합인데요? 왜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나요?”

“영애가 대공에게 학문을 배우고 있다더군. 정기적으로.”

“네에? 케인 영애가 공부를 한다고요?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일이네요.”

“해리.”

“앗, 죄송해요.”

해리가 혀를 쏙 내밀며 귀엽게 웃었다.

“너무 충격적이라 그렇죠. 대공 전하께서 그 멍청하고 오만한 케인 영애를 제자로 받아주셨다는 게 진짜예요?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니죠?”

“대공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어. 케인 백작에게도 확인했고.”

“와, 이거야 말로 특S급 정보인데요? 앞서 말씀해 주셨던 것과는 비교가 안 돼요.”

“그래? 그러면 이걸 먼저 말하고 아까 그 정보들은 아껴놓는 건데.”

클로디안이 아까운 척을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덕분에 저는 오늘 횡재했네요.”

쿠키를 입에 쏙 집어넣은 해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보값은 제대로 지불할 테니 자세히 조사해줘.”

“대공저 안에는 못 들어가요.”

“알아. 케인 영애를 중심으로 조사해보면 뭔가 나올 지도 몰라.”

“영애를 뒷조사한다고 해도 대공 전하가 엮인 일이면 위험 부담이 높아요.”

“부르는 대로 줄게.”

“잠시만요. 지금 바로 비용을 계산해 볼게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해리가 책상으로 향했다.

분주히 종이에 뭔가를 써내려가던 그가 작성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 청구서에요.”

해리가 내민 종이에는 기본 의뢰비에 위험수당을 비롯해 난이도에 따른 추가 비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와, 지금까지 부탁했던 건들 중에서 가장 비싸네.”

꼼꼼히 청구서를 살펴본 클로디안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버몬트 대공가와 관련된 일은 난이도가 높다고.”

“좋아. 이건 선금.”

그가 묵직한 돈주머니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안에 든 금화들을 확인한 해리의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내가 이래서 형님을 좋아한다니까.”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고 알려줘.”

“저희 카펜의 실력은 이미 아시잖아요. 맡겨만 주세요.”

“믿고 기다리지.”

오늘 카지노에 온 목적을 달성한 클로디안은 그제야 여유롭게 차를 음미했다.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감춘 해리의 예리한 눈초리가 잠시 클로디안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 * *

“로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애런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데다 체격도 건장해서 눈에 확 띄었다.

“애런.”

나도 애써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실 오늘 애런은 백작저로 찾아올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비번인 날 놀러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호감도를 위해선 만나야 했으나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건 영 불편했다.

아버지라도 계셨다면 덜 불편했을 텐데 하필 사업 때문에 자리를 비우신 터라 부득이하게 장소를 바꾼 것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으면 그래도 표정 관리가 쉽지 않을까 해서.

“어디 아픈 덴 없지?”

호수 사건이 일어난 지 제법 시일이 지났음에도 애런은 여전히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

“보다시피 건강해.”

활짝 웃어주자 그제야 애런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늘 식사는 내가 낼게.”

지난번부터 계속 밥을 사주겠다고 했던 터라 호기롭게 외쳤다.

“무슨 소리야. 나 아직 근위대에 합격한 턱도 못 냈어.”

애런이 단정한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먼저 사 주겠다고 했었거든?”

“이번은 나한테 양보해주라. 너 아플 때 간호도 못 해줬잖아.”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부탁하는 모습이 대형견 한 마리가 낑낑대는 것처럼 보였다.

“알았어. 그럼, 비싸고 맛있는 거 사줘.”

“분부대로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순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자 햇살이 내려앉은 것처럼 눈부셨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미소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그가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기대된다.”

목이 메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짜내어 말을 내뱉었다.

“에피네 거리에 새로 생긴 스테이크 전문점이 있는데 거기가 그렇게 맛있대.”

“그건 어떻게 알았어?”

“동료들한테 들었지. 너 맛있는 거 사주려고 내가 물어봤거든.”

애런이 다정하게 대해줄수록 내 마음은 점점 먹먹해져갔다.

이젠 무뎌질 만도 한데 아직 상처 위에 딱지가 굳어지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오늘 단단히 준비하고 나온 모양이네.”

“당연하지. 우리 이렇게 같이 놀러 나온 게 얼마 만인데.”

하긴 제페스와 사귄 이후로는 애런과 함께 나올 일이 없긴 했었다.

이윽고 우리는 애런이 말한 스테이크 전문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을 해 놓은 것인지 애런이 이름을 대자마자 점원이 2층 테라스로 우리를 안내했다.

“만약 내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나는 자리에 앉으며 애런에게 물었다.

“사실 예약해둔 곳이 몇 군데 더 있어.”

“뭐?”

“네가 고기를 좋아해서 이곳을 1순위로 정하긴 했지만 다른 음식이 먹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동료들이 여러 군데 예약해 두라고 말해준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애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쩐지. 센스가 부족한 애런이 식당을 여러 군데 예약할 생각을 했을 리가 없지.

방금 전까지 마음이 무거웠던 것도 잊고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사실 연애 경험이 전무하고 검밖에 모르는 애런의 성정으로 볼 때 새로 생긴 음식점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1회차에서 연애할 때도 주로 내가 데이트 코스를 계획했었으니까.

그가 풀코스로 데이트를 기획해서 준비했던 건 내가 죽기 직전의 데이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청혼하는 줄 알았었지.’

갑자기 입안이 씁쓸해져 상념을 털어냈다.

“내가 널 모르니? 어릴 적부터 봐온 세월이 얼만데.”

나는 네가 아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널 지켜봐왔어.

뱉어내지 못할 말을 조용히 삼켰다.

“그냥 너한테 맛있는 걸 사주고 싶은데 아는 곳이 없어서 물었더니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더라고.”

애런이 머쓱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나랑 만나는 거라고 말했어?”

“어?”

“동료들에게 물을 때 나랑 놀러가는 거라고 말했냐고.”

“아니? 누구랑 같이 갈 거라고 묻길래 그냥 여자라고만 했는데.”

“다들 네가 데이트하러 가는 줄 알았나 보네. 그러니까 그렇게 열성적으로 조언해 준 거지.”

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

“다르지 않아.”

“뭐?”

뜬금없는 말은 둘째 치고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낯설었다.

“너를 즐겁게 해주고 싶어서 열심히 알아봤고 동료들도 내 마음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조언해준 거야. 착각한 거 아니야.”

“…….”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당황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 회차들에선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 시기의 애런은 언제나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의 선을 지켰었다.

소꿉친구라 다른 이들과는 깊이가 다른 우정이긴 했지만.

그래서 1회차 때 연인으로 발전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느낀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뉘앙스가 너무 미묘했는데.’

때마침 점원이 다가와 우리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로나, 여기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가 맛있대.”

혼란스러운 나와 달리 애런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내게 이것저것 추천해 주었다.

그 차분한 태도에 나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나는 그걸로 할래.”

애런은 안심 스테이크를 비롯해 몇 가지 메뉴를 더 주문했다.

“이제 근위대 업무에는 많이 익숙해졌겠네.”

나는 남은 어색함마저 털어버리기 위해 일상적인 화제를 꺼냈다.

“응, 처음 한 달은 실수를 많이 해서 선배들에게 혼도 많이 났었어.”

다행히 애런도 내게 호응해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음식들이 나왔다.

“잘라줄 테니 기다려.”

“응.”

어릴 적부터 해주던 일이라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먹기 좋은 크기로 깔끔하게 잘려진 스테이크가 내 앞에 놓여졌다.

“먹어 봐.”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자 고소한 육즙이 쫙 흘러나와 혀에 감겼다.

육질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사라져버렸다.

“정말 맛있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스테이크 중에 최고야.”

“그래?”

고개를 마구 끄덕여주었더니 그제야 애런이 긴장을 풀며 환하게 웃었다.

이후로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한창 음식을 먹고 있는데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어머, 케인 영애. 오랜만이네요.”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도도하고 섹시한 미인. 

낸시 체임버였다.

그녀 뒤로 페니아 영애를 비롯한 몇몇 영애들이 서 있었다.

“장미 축제 이후로 처음인가요?”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인사를 건넸다.

일부러 카밀라의 약혼 발표가 있었던 장미 축제를 언급하자 낸시의 얼굴을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날 영애가 큰일을 당했었죠?”

금세 표정을 푼 낸시가 나긋하게 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연인을 죽이려 하다니. 저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니까요.”

낸시 뒤에 서 있던 페니아 영애가 앞으로 나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신사의 표본인 하이먼 영식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낸시와 함께 있던 영애들이 한 마디씩 거들자 주위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다.

“글쎄요. 연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만 알겠죠.”

살짝 올라간 낸시의 입꼬리엔 비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러게요. 사고 당시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고 하던데.” 

페니아 영애가 팔랑팔랑 부채질을 하며 의혹을 부추겼다.

그때 탁하고 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조사하시고 황제 폐하께서 판결을 내리신 사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까?”

차분한 어조였지만 애런의 음성은 냉랭했다.

기사의 날선 기세에 영애들이 움찔하며 긴장했다.

그 중 가장 여유로운 이는 낸시였다.

“어머, 하퍼 소공작도 함께 있었군요.”

그녀는 이제야 애런을 발견한 것처럼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애런은 그 인사를 받지 않았다.

늘 누구에게나 정중하고 예의바른 애런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상대를 안 하려고 했는데.’

이대로 두면 애런이 괜한 구설에 휘말릴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퍼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 지금 식사 중이라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다음에 마저 나누는 게 어떨까요?”

차분하게 말을 건네자 낸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건 다른 영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가 흥분해서 날뛰기를 기대했을 테니까.

그래놓고 자신들은 피해자인 척 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해 왔던 것처럼.

여태 그들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나서봐야 내 평판이 좋지 않은 탓에 무슨 말을 하든 비난으로 돌아올 테니까.

“사람 무안하게 하는 것도 재주네요. 하긴 그 철부지 같은 성정이 어디 가겠어요?”

낸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내뱉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는 영애가 불미스런 일을 당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너무하네요.”

페니아 영애를 비롯한 다른 영애들도 내게 질책 어린 시선을 던졌다.

드르륵.

갑자기 의자를 미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