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형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해리가 디안의 모습으로 카지노를 찾은 클로디안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잘 지냈어?”
클로디안이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야 늘 바쁘죠, 뭐. 그런데 형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뭐가?”
“어떻게 저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이 약혼을 하실 수가 있어요? 이 동생 너무 서운합니다.”
해리가 팔짱을 끼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그게 사정이 좀 있었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 클로디안이 해리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자, 그래서 사과하는 마음으로 이걸 가져왔지.”
그가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커다란 봉투를 흔들었다.
“쳇, 그런다고 제 마음이 풀릴 줄 아셨어요?”
관심 없는 척 툴툴거리면서도 해리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자꾸 봉투로 향했다.
그걸 알아챈 클로디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알지. 이걸로는 내 동생의 서운한 마음을 풀긴 어렵다는 걸. 이건 애피타이저고 내가 아주 좋은 정보를 하나 물어왔는데 말이야.”
“아이참, 제가 쿠키에 약한 건 또 어떻게 하시고. 잘 먹겠습니다, 형님.”
해리가 클로디안이 들고 있던 봉투를 냉큼 가져갔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차나 한 잔 하고 가세요. 제가 대접할게요.”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이 해리의 얼굴에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클로디안은 제 등을 미는 힘에 못 이긴 척 해리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에 따뜻한 차와 함께 클로디안이 가지고 온 쿠키와 마카롱이 차려졌다.
해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쿠키를 집어 먹었다.
“쿠키는 형님이 가져오신 게 최고예요.”
엄지를 치켜세우며 행복하게 쿠키를 먹는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약혼에 대해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건 미안해.”
“서운하긴 했지만 이해해요. 황가의 일이잖아요. 제가 괜히 투정 부린 거니 마음 쓰지 마세요.”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정보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지키셔야 해요.”
“어련할까?”
클로디안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케인 영애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는 거 아나?”
“케인 영애가요? 하긴 사업 하나 말아먹는다고 백작가의 재력에 흠집도 나지 않겠죠.”
“이번엔 제대로 할 모양인가 본데? 카라인 지역에서 새로운 보석을 발견했다더군.”
“에? 그 푸른 보석이요? 그건 벨라인 상단에서 채굴 중인데.”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케인 영애와 동업 중이라는군. 사업 자금을 댄 모양이야.”
“벨라인 상단 뒤에 케인 영애가 있다니. 흥미로운 소식이네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오호, 오늘 형님께서 인심 좀 쓰시는 데요?”
“내가 많이 미안했거든.”
클로디안의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케인 영애가 내 약혼녀에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하더군.”
“직접 들으신 건가요?”
“뭐, 비슷해.”
클로디안이 의뭉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공녀님께선 제안을 받아들이셨나요?”
“그랬다고 하더군.”
“이야, 이거 완전 예상치 못한 조합인데요?”
해리가 턱을 괴며 눈을 반짝거렸다.
“그런데 머지않아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 사업은 왜요?”
“그 전에 다양하게 경험하고 싶은가 보더군. 알잖아 카밀라가 가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흠, 그렇긴 하겠네요. 그래도 케인 영애라니. 위험부담이 좀 크지 않나?”
해리가 산딸기향이 나는 마카롱을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뭐, 사업이 망해도 백작가에서 알아서 수습하겠지.”
“하긴 손해를 다 메꿔줄 텐데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그보다 저는 형님의 약혼 이야기가 더 궁금해요.”
초롱초롱 눈을 빛낸 해리가 테이블에 팔을 기대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별로 할 이야기 없어.”
“왜 갑자기 약혼할 마음이 드신 거예요? 평생 연애만 하신다고 했잖아요.”
“그거야 희망사항이었지.”
클로디안의 입가에 찰나 자조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지난번에 공녀님이 찾아오신 것과 관련 있는 거죠?”
해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클로디안을 향했다.
“그래, 그래. 말해줄게.”
클로디안은 카밀라가 카지노를 찾아왔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그 당시 마도구로 외모를 바꾼 상태였음에도 카밀라는 자신이 황태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황태자가 ‘디안’이라는 이름으로 카지노를 드나든다는 건 근위대장과 카펜의 마스터 밖에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전하, 우선 제 얘기를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추궁은 그 뒤에 하셔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자신의 경계와 의심을 눈치챈 공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당장 잡아다 심문을 할까 했지만 소심하기만 했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흥미가 일었다.
결국 공녀와 동행한 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기회를 주었다.
“저는 아주 기나긴 꿈을 꾸었습니다.”
사랑 고백이나 청혼을 할 거란 예상과 달리 공녀는 매우 황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꿈에서 한 번의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나이 많은 후작의 후처로 들어가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 끝에 결국 병을 얻어 죽는 삶을.
“반면 제 언니는 황태자비가 되었습니다.”
꿈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으나 낸시 체임버가 황태자비가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 현실성 있는 일이었다.
언제까지나 혼인을 미룰 수는 없을 테고 황태자비를 들이게 된다면 부황의 뜻에 따라 정략혼을 하게 될 테니.
그렇다면 체임버 공작가와 연을 맺게 될 가능성이 제일 컸다.
세 공작가 중 비슷한 또래가 있는 가문은 체임버 공작가뿐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있을 법한 일이라고 해도 꿈에서 미래를 보았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알려진 것 이상으로 학대를 당하고 있는 건가?’
공녀의 정신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다.
“전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꿈에서처럼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의 꿈과 내가 무슨 상관이지?”
“아버지께서 제 혼처를 알아보고 계십니다. 그 후보 중에 꿈에서 제 남편이었던 후작이 있습니다.”
“혼인은 가문 내 일이야. 황제조차도 명분 없이 개입하기 어려워.”
클로디안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공녀의 상태가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곤란한 일을 떠맡고 싶진 않았다.
“전하께서 저와 약혼해 주시면 이 혼사를 물릴 수 있습니다. 염치없는 부탁인 줄 아오나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느닷없는 약혼 제안에도 클로디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갖가지 방법으로 청혼을 받아보았기에 이 정도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대와의 약혼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정말 약혼할 생각으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별 의미 없이 호응해준 것뿐이었는데.
이어진 대답에 당황하고 말았다.
“저는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그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공녀, 내가 그 꿈 얘기를 믿어서 그대의 제안을 고려하고 있는 줄 아는가?”
“미래를 안다는 건 정말입니다. 증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그대의 목숨을 걸 수 있나?”
“걸 수 있습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태도에 클로디안의 말문이 막혔었다.
“앞으로 두 달 뒤에 베히른 지역에 홍수가 일어날 겁니다.”
어느 가문의 혼인이나 물건의 가격 변동과 같이 사전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놓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측이 불가능한 천재지변을 가지고 베팅하다니.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헛소리로 치부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있었다.
버몬트 대공이 깨어나고 에일숲이 변한 상황에서 예지력을 가진 이가 나타났다?
흘려들을 이야기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체임버 공녀의 황당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우리는 베히른에 홍수가 나면 다시 만나도록 하지.”
회상을 마친 클로디안이 웃음을 흘렸다.
‘정말 홍수가 일어날 줄은 몰랐지.’
홍수 소식을 들었던 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으니까.
클로디안은 해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디까지 말해주어야 할까.’
공녀와의 대화를 전부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대충 얼버무리며 회피할 수도 없었다.
이 약혼은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약혼이었고 카펜의 수장에게 사랑 때문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을 테니까.
‘적당히 진실 몇 가지를 던져주어야겠지.’
카펜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유용한 패이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사랑은 아니야.”
선을 긋는 말에 해리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워낙 찰나였던지라 클로디안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흔한 정략혼이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클로디안이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정략혼 상대라면 공녀보다 더 나은 조건들이 많았을 텐데요.”
해리는 클로디안의 선택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약조했거든.”
그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해리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을 믿으세요?”
“믿어 보려고. 그 말을 할 때 공녀의 눈빛엔 어떤 애정도 보이지 않았어.”
그저 짙은 피로와 절박함만이 보였었다.
그때 그 눈빛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클로디안은 얼른 상념을 떨어버렸다.
“나도 언제까지 혼인을 미룰 수는 없잖아. 피할 수 없다면 공녀야말로 최고의 조건이지 않나?”
“뭐, 낸시 체임버보다는 여러 모로 편한 상대죠.”
해리가 동의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낸시 체임버? 그 피곤한 여자보다는 몇 백배 나은 상대지.”
“그보다 황제 폐하는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사생아라도 정식으로 공작가에 입적되어 있으니 반대하진 않으시더군.”
“의외네요. 굉장히 보수적이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해리를 보며 클로디안이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황제가 황태자비감을 고르는데 혈통과 신분을 따지는 건 당연했다.
황가의 핏줄과 관계되는 일이니.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카밀라는 그 조건을 통과했기에 황제가 허락한 것이었다.
“그러면 체임버 공작은요? 둘째 딸이 아니라 첫째 딸이 황태자비가 되기를 바랐을 텐데.”
“말도 마.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번엔 아주 그 작자의 바닥을 봤어.”
클로디안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리 사생아라도 공작에게는 손해날 게 없는 장사일 텐데요.”
“카밀라와의 약혼 이야기를 꺼내니 정색하더군. 절대 안 된다면서.”
“이해가 안 되네요. 체임버 공작이 권력욕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해리가 턱을 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 카밀라를 원한다면 낸시와 먼저 혼인한 뒤에 후궁으로 들이라고 하더군.”
“카밀라님, 정말 공작의 친딸이 맞아요?”
“나도 그게 궁금했어.”
“카밀라님이 불쌍하시네요.”
클로디안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해리의 생각에 동의했다.
카밀라에 대해 별 감정이 없었던 자신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에 게 연민이 들었으니까.
그만큼 공작의 요구는 뻔뻔하다 못해 아비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카밀라님도 알고 계시나요?”
“아니, 말하지 않았어. 괜히 알아봐야 마음만 상하지 않나?”
“카밀라님께 아무런 감정도 없으시다면서요.”
해리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애정이 없다고 해서 존중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안 그래?”
“네, 뭐. 그렇죠.”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었던지 해리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한 건 다 풀렸어?”
“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만족했다는 듯 해리의 보조개가 깊게 패었다.
“그럼, 이제 일 얘기 좀 해볼까?”
“맡기실 의뢰라도 있으세요?”
“버몬트 대공과 케인 영애의 관계에 대해 조사해줘.”
대공이 언급되자 일순 해리의 자안이 날카로워졌으나 클로디안은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