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공녀님, 가면이 모든 것을 가려주지는 않는답니다.”
카밀라를 향해 싱긋 웃자 그녀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자, 이제 오해는 풀린 건가요?”
“검은 거두겠습니다. 하나 지근에서 호위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건 내게 허락받을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카밀라에게 시선을 던지자 그녀가 제 호위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누구신가요?”
“황태자 전하께서 공녀님을 호위하라 보내셨습니다.”
검을 거둔 사내들이 카밀라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요?”
“네. 불편하시지 않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나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아 부득이하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놀라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전하께도 꼭 감사 인사 전해주세요.”
“공녀님께서 직접 전해주시면 전하께서 더 기뻐하실 겁니다.”
“아, 네. 그럴게요.”
카밀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제안을 했던 호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자, 오해를 풀었으면 이제 사업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요. 공녀님, 제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나요?”
잠시 고민하던 카밀라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상단주와 만났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그럼요. 벨라도 함께 이야기해요.”
“그러죠.”
벨라가 앞장서서 방문을 열고 우리를 기다렸다.
“슐레만 경,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내가 우리 기사들에게 지시하자 카밀라가 비밀 호위들을 쳐다보았다.
“공녀님께서 원하시면 가까이에서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나와 내 기사들을 눈짓하며 물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크게 소리치십시오. 저희가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고마워요.”
카밀라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방문을 닫자 일순 고요함이 흘렀다.
“일단 앉으시지요.”
벨라가 창가에 놓인 낡고 둥근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카밀라가 자리에 앉자 벨라가 우리 사이에 앉았다.
“아가씨, 처음부터 이러실 계획이었죠?”
자리에 앉자마자 벨라가 불퉁하게 물었다.
“그건 아니에요. 원래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너무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럽게 굴자 벨라가 나를 살짝 흘겨보았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되었잖아요.”
봐달라는 뜻으로 벨라의 손등을 도닥이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이라니까. 뭐, 그런 점에 반한 거지만.”
내가 피식 웃자 벨라도 푸스스 웃어버렸다.
그에 반해 카밀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며 가면을 벗은 탓에 표정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벨라가 귀족인 내게 스스럼없이 구는 것이나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로웨나가 그런 행동들을 용인하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
벨라도 그걸 눈치챘는지 빙그레 웃었다.
“이 분이 소문과는 많이 다르죠? 저도 처음에 만났을 때는 제가 이름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니까요.”
제 감정이 들켰다 생각했는지 카밀라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이 분을 수해민 구호소에서 만났는데요.”
벨라가 나와의 첫 만남에 대해 신나게 말했다.
귀하게 자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대뜸 와서 배식을 돕겠다고 해서 어찌나 황당했는지 몰랐다는 내용이었다.
카밀라는 벨라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되어서 이번 보석 사업을 함께 하게 된 거죠.”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놓은 벨라가 이제 이야기를 하라며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솔직히 ‘라이’의 연락을 받고 많이 놀랐었어요. 세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저와 벨라 외에는 모르는 일이었거든요.”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카밀라의 반응을 세세하게 살폈다.
그녀가 시선을 내리는 바람에 눈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보였다.
“그래서 혹시 우리 사업을 방해하려는 목적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어요.”
“아니에요! 상단주에게도 말했지만 저는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카밀라가 화들짝 놀라며 항변했다.
“공녀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 같아 여쭤볼게요.”
카밀라가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보였다.
“벨라가 새로운 보석을 발견한 건 어떻게 아셨죠?”
채굴을 시작했으니 인부들을 통해 소식이 새어나갈 수는 있지만 카밀라가 알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광산이 있는 카라인 지역이 황도와 거리가 먼 데다 카밀라는 사교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니까.
“우연히 들어서 알게 되었어요.”
“그럼, 세공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요? 그건 저와 벨라 밖에 모르는 일이거든요.”
입술을 질끈 깨문 카밀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카밀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 나는 벨라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카밀라가 알려준 세공사 이름을 묻자 벨라가 입모양으로 아이작이라 말해왔다.
‘설마했는데 정말 아이작을 알고 있을 줄이야.’
카밀라가 지난 회차들에서도 아이작을 알고 있었다면 왜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을까?
이번처럼 정체를 숨긴 채 정보만 건네줬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원래 세상에서 카밀라로 플레이할 때는 이런 에피소드는 없었는 걸.
게임 시나리오에 나오지 않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걸까?
달라진 카밀라의 행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온 것인데 오히려 의문만 더 쌓이는 기분이었다.
“그럼, 아이작 팬튼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는 알려주실 수 있나요?”
“……언니를 따라 보석점을 갔다가 듣게 되었어요. 어떤 보석이든 세공할 수 있는 뛰어난 세공사라고.”
고개를 들긴 했지만 카밀라는 여전히 나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목소리 또한 자신감이 없었다.
‘거짓말이다.’
아이작을 찾기 전까지는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작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 카펜이 아이작에 대해 조사해 온 보고서를 보면 현재 아이작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 황도에 있는 보석점에서 언급될 리 없었다.
그것도 비싸고 유명한 곳만 고집하는 낸시 체임버가 다니는 보석점이라면 더욱 더.
‘무엇을 숨기는 걸까?’
무의식중에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자 카밀라의 여린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공녀님, 더는 묻지 않을 게요. 저희를 돕고 싶었다는 공녀님의 말을 믿으니까요.”
안심이 되지 않는지 카밀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사실 공녀님이 아니었으면 사업을 접게 되었을 지도 몰라요.”
이미 아이작과 계약을 마친 상태였지만 일단 카밀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 말했다.
“감사드려요. 덕분에 희망이 생겼네요.”
부드럽게 미소 지어주자 그제야 긴장으로 굳어 있던 카밀라의 얼굴이 풀렸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아니라고 했던 건 미안해요.”
“괜찮아요. 공녀님께서도 나름 사정이 있으셨겠죠.”
“저는 라이님이 공녀님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벨라가 끼어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제가 올해 운이 좋나 봐요. 아가씨에 이어 공녀님까지 인연을 맺게 되다니. 사업이 잘 되려나 보네요.”
벨라의 시원스런 웃음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아, 참. 약혼 축하드려요. 이 인사부터 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이때를 기회 삼아 약혼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아니에요.”
카밀라가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실 줄은 몰랐어요. 전하께서 자유연애를 주장하셨던 터라 결혼 생각이 없으신 줄 알았거든요.”
“그러셨죠.”
그 말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황태자의 수많은 연애 상대들을 물리치고 그 자리를 쟁취했으면 승리감을 내보일 만도 한데.
“어떻게 비밀 연애를 할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전하의 연애 상대에 대해선 관심이 많잖아요.”
황태자의 연애사는 항상 신문 1면을 장식했다.
황태자 본인이 연애를 숨길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더 보란 듯이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마지막으로 연애를 했던 대상이랑 헤어진 것은 약혼 발표가 있기 두 달 전이었다.
베히른 홍수가 나기 얼마 전에 헤어졌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났었으니까.
지난 두 달 동안 황태자와 카밀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데 여러 모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카밀라는 3대 황궁 행사를 제외하고는 사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또한 외출도 제약을 받았다.
지금이야 황태자와 약혼을 했으니 그 제약이 풀렸겠지만.
어떻게 두 달 만에 약혼을 하게 된 것일까?
약혼을 서두를 정도로 카밀라의 조건이 매력적이지도 않은데.
더 의문인 것은 황제와 황후는 물론 체임버 공작이 이 약혼을 허락했다는 점이었다.
“전하께서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제가 여러 모로 부족하잖아요.”
좀 더 떠보고 싶었지만 카밀라가 저리 말하니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부럽네요. 저는 전 남자친구에게 배려는커녕 이용만 당하다 죽을 뻔했는데. 아시죠? 제 연애사.”
혹여 황태자와의 사이를 캐묻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일부러 내 흑역사를 떠벌렸다.
예상대로 크게 당황한 카밀라가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은 빨리 잊으세요.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벨라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인정해요. 그래도 뒤늦게라도 깨달아서 헤어졌잖아요. 상대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려서 문제였지.”
“그래요. 그놈이 나쁜 거지. 아가씨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그래도 나 인재 보는 안목은 있어요. 벨라도 한 눈에 알아봤잖아요.”
“흠, 그건 인정해드릴게요.”
벨라가 턱을 치켜들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우리 둘의 대화가 웃겼던지 카밀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인재를 알아보는 촉이 지금 막 신호를 보내오고 있네요. 공녀님을 잡으라고.”
카밀라를 향해 씨익 웃자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녀님, 나랑 같이 사업해볼 생각 없어요?”
“네에?”
“작은 정보일지라도 흘려듣지 않고, 적재적소에 정보와 자원을 연결시킬 줄도 알고 심지어 안면도 없는 이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배짱까지. 딱 내가 찾는 인재인데.”
그렇게 말을 덧붙이자 카밀라의 회색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지금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게 안전하겠지.’
“저는 경험이 없는데요.”
“저도 없어요. 그래서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같이 배우면서 하면 될 것 같은데 어때요?”
카밀라는 선뜻 답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눈엔 숨기지 못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그동안의 제 평판을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수 없긴 하겠네요.”
나는 일부러 머쓱하게 웃으며 내 치부를 먼저 드러냈다.
“그렇다면 절 파트너로 선택한 벨라의 안목을 믿어보는 건 어때요?”
“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한 번 믿어보세요. 실망하지 않으실 테니.”
벨라가 카밀라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고작 채굴을 시작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깊은 벨라의 신뢰에 내 마음이 뭉클해졌다.
‘벨라, 내가 꼭 이 사업 성공시켜 줄게요.’
내가 벨라 몰래 의지를 다지는 사이 고민을 끝낸 것인지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열심히 할게요.”
“좋아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카밀라를 향해 손을 내밀자 그녀가 맞잡았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눈빛이 단단하게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