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직접 오시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벨라가 나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오늘 라이를 직접 만난다면서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나는 살짝 젖혀진 커튼 사이로 건너편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라이와 만나기로 한 돌로레스 여관 맞은편에 위치한 주점에 있었다.
얼마 전 벨라는 내 지시에 따라 라이에게 직접 만나지 않으면 거래에 응할 수 없다는 서한을 보냈었다.
혹시라도 만남을 거절할까봐 라이가 제시한 정보값의 두 배를 지불하겠다고도 덧붙였었다.
라이가 부른 정보값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작은 주점을 살만한 금액이었으니까.
라이는 승낙하는 대신 장소를 직접 정하겠다고 했고 그 결과가 돌로레스 여관이었다.
“서한을 가져간 사람이 여자였다면서요?”
“그 사람이 진짜 라이인지는 모르잖아요. 심부름만 했을 수도 있죠.”
“상단을 운영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어봤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너무 겁이 없는 거 아니에요?”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주점을 전세내고 약속 시간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와 있는데?
당신 안전을 위해서잖아.
불퉁하게 쳐다보자 벨라가 피식 웃었다.
“파트너께서 이리 걱정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제가 파트너 복이 있나 봐요.”
벨라가 호탕하게 웃는 바람에 더는 타박할 수가 없었다.
“기사들이 잠복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눌러요.”
나는 벨라에게 누르면 시끄럽게 소리가 울리는 호신용품을 쥐어주었다.
“네, 네. 알았어요.”
벨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건을 건네받았다.
“어, 누가 왔어요.”
나는 목소리를 낮춘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평범한 갈색 로브를 입고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은 여자처럼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벨라도 내 옆으로 다가와 유심히 그 사람을 지켜보았다.
골목길에는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기 때문에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은 조급하게 걸어오다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는 걸까? 그럼 라이일 확률이 높은데.
그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 사람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아무런 무늬 없는 하얀색 반가면.
카펜이 알려준 인상착의와 정확히 일치했다.
나와 벨라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맞는 것 같아요.”
“여관으로 들어가네요.”
라이로 추정되는 사람이 여관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벨라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벨라는 골목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주점을 나갔다.
나는 그녀가 여관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잠시 후 가게 뒷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물론이고 함께 있던 슐레만 경과 우리 가문 기사들이 바짝 긴장했다.
다행히 미리 정해두었던 암호대로 노크하는 소리에 긴장을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여관에 잠복시켜 둔 우리 기사 중 하나였다.
“감시 대상자가 여관에 도착했습니다.”
“동행이나 미행한 사람은 없었나요?”
“감시 대상자 혼자이긴 했습니다만 은신하고 있는 호위들이 있었습니다.”
호위들이라. 내가 의심하고 있는 사람이 맞는다면 호위를 데려올 여력이 없을 텐데.
“그쪽에서도 우리를 눈치챘겠네요.”
우리 가문 기사들의 실력이 나쁘진 않으나 전문 암살자들처럼 은신이 뛰어난 건 아니니 알아챘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벨라와 라이는 어디서 만나고 있나요?”
“2층 가운데 있는 방입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얼마 전 카펜으로 받았던 서한을 떠올렸다.
「체임버 공작저에 감시 대상과 같은 머리색을 가진 사용인은 없습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다라.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오늘 직접 나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하는 사람이 맞는지 정확히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정말 카밀라일까?’
사실 카밀라가 아니어도 큰일이긴 했다.
게임 시나리오를 벗어난 이가 또 있다는 말이 되니까.
‘아, 머리 아프다.’
이대로 그냥 집에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되겠지.’
이번에 놓치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이 모든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내가 가봐야겠어요.”
“위험합니다.”
슐레만 경이 정색하며 나를 만류했다.
“혼자 가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저희가 감시 대상자를 잡아 오겠습니다.”
“은신하고 있는 호위가 있다면서요. 잘못하다간 일이 커질 수도 있어요.”
슐레만 경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매에 힘을 주었다.
상대의 정체와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승패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직접 감시 대상자와 만나시는 건 위험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내 계획에 슐레만 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나는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 호위들과 함께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작고 허름한 여관 안에는 다행히 다른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데스크로 가자 이곳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후덕한 몸매에 대충 올려 묶은 머리 그리고 늘어지게 하품하는 모습이 세상만사가 귀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며칠 있을 거요?”
주인장이 날 보자마자 툭 말을 던졌다.
“2층을 한 시간만 빌리지.”
주인장이 힐끗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투숙객이 이미 있어서 어렵겠는데.”
나는 가져온 돈주머니를 데스크 위에 올렸다.
짤랑거리며 금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주인장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돈주머니를 슥 끌어다 내용물을 확인한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2층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 아, 방금 두 여자가 올라간 방은 비우지 않아도 돼.”
주인장은 내가 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다른 방은 다 일 보러 나갔으니 지금 비어있을 거요. 돌아오더라도 못 올라가게 하지요.”
내가 슐레만 경에게 눈짓하자 우리 기사들 몇 명이 1층에 남았다.
나머지 일행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간 나는 가운데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대어 섰다.
슐레만 경을 제외한 기사들은 벨라가 들어간 방문 주위에 서서 대기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먼저 방을 나온 벨라가 기사들을 보고 놀랐다가 내 일행임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후드를 살짝 젖혀 내가 왔음을 알리자 그녀는 말썽꾸러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내가 잠시 아래에 내려가 있으라고 손짓하자 한숨을 내쉰 벨라가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벨라가 있었던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하얀 가면을 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슬쩍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몸을 세웠다.
다른 방에서 나오는 척 하던 기사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 라이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우연인 척 그녀와 부딪쳤다.
“아야.”
체격 차이가 있었던 탓에 라이가 휘청거리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후드가 벗겨졌다.
카펜의 정보대로 보라색 머리카락이었다.
장미 축제에서 봤던 카밀라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이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 옮겨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런. 다치지 않았어요?”
잡고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자 당황 어린 눈빛이 나를 향했다.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회색 눈동자.
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체임버 공녀님.”
카밀라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사, 사람 잘못 보셨어요.”
카밀라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우리 기사들이 막아선 탓에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왜, 왜 이러시는 건가요?”
“체임버 공녀님. 아니 ‘라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상당히 놀랐는지 크게 뜨인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누, 누구세요? 저는 공녀도 아니고 ‘라이’라는 사람도 몰라요.”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카밀라는 끝까지 부인했다.
“벨라 좀 불러와요.”
내 입에서 벨라가 언급되자 카밀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벨라가 올라오기도 전에 불청객이 먼저 찾아왔다.
검은 무복을 입은 자들이 복도 창문을 깨며 들이닥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우리 기사들도 검을 꺼내들었다.
“아가씨!”
계단을 올라오던 벨라가 경악하며 내게 달려오려고 했으나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들 때문에 다가오지 못했다.
1층에 대기 시켜놓았던 우리 기사들까지 올라오니 안 그래도 비좁은 복도가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나와 카밀라를 보호하듯 둘러선 우리 기사들을 향해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검을 겨누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 팽팽하게 맞섰다.
‘누구일까?’
카밀라를 호위하고 있는 이들은.
체임버 공작가에서 카밀라를 보호하진 않을 테고, 카밀라가 저렇게 많은 용병을 부를 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 터.
‘그렇다면 의심 가는 곳은 하나.’
황태자.
힐끗 카밀라의 표정을 보니 비밀 호위들의 존재를 몰랐던 것인지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약혼자라고 보호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골치 아프게 됐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 여인을 풀어준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 중 우두로머리로 보이는 이가 우리를 향해 외쳤다.
카밀라는 검은 무복의 사내가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카밀라는 물론이고 그녀의 비밀 호위들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들 내가 누구인지는 알겠지요?”
“케인 영애께서 어찌 공녀님을 위협하셨던 겁니까?”
카밀라의 호위가 던진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화를 청했을 뿐인데 위협이라니. 불쾌하네요.”
“기사들을 앞세워 위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벨라, 이리 와요.”
사내의 말을 무시하며 벨라를 향해 손짓하자 그녀가 검들을 피해 내게 다가왔다.
“이 분은 벨라인 상단의 상단주랍니다. 오늘 공녀님과 거래가 있어 이곳을 찾았고요.”
“라이님이 공녀님이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요.”
벨라는 여전히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어, 저, 그게…….”
카밀라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장미 축제 때의 차분하고 당당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지만 지금이 원래 내가 알던 카밀라의 모습이었다.
“케인 영애께서는 상단주와 잘 아는 사이이십니까?”
카밀라의 호위가 나와 벨라를 주시하며 물었다.
“그래요. 상단주와 동업을 하고 있거든요. 오늘 공녀님과 나눈 거래 또한 그 사업의 일환이죠.”
벨라의 뒤에 내가 있었을 줄 몰랐는지 카밀라가 눈을 크게 떴다.
“벨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직접 만나고 싶었을 뿐이에요. 공녀님일 줄은 몰랐지만.”
“……어, 어떻게 저인 줄 알아보셨어요?”
이제 부인하는 건 포기한 것인지 카밀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