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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45)화 (45/140)

45화

“다 나았다.”

대공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봐도 멀쩡해 보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방금 깨어난 사람에게 폴루티아에 같이 가자고 하는 건 너무했지.

내가 악덕 고용주도 아니고 말이야.

“포션으로 회복되었다고 해도 쉬는 건 필요해요. 최소 하루는 더 쉬세요.”

대공이 불만스럽게 입매를 굳혔다.

그 뚱한 모습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대공의 짙은 눈썹이 비딱하게 올라갔다.

“내가 네 뜻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넌 내게 목적지를 숨기지도 못하지 않나.”

그렇다. 그에게 목적지와 마수 종류를 알려주는 것이 거래 조건이었으니까.

“숨기려던 건 아니에요. 그저 스승님께서 좀 더 쉬시기를 바라서 그런 거지.”

낭패 어린 표정을 짓자 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당장 지금 간다고 해도 문제없다.”

이 고집불통 같으니.

나는 대공에게 눈을 흘긴 뒤 휙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요. 내일 같이 가요. 대신! 오늘은 꼭 쉬세요.”

“……알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의자에서 일어나자 대공이 나를 붙잡았다.

“혹시 내게 준 포션의 여분이 있나?”

“없어요. 딱 한 병 가지고 있던 것이거든요.”

내 피 같은 포션을 드린 거라고요. 그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네.

 “……그렇군.”

내 기대와는 달리 대공의 표정은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바랄 사람에게 바라야지.

나는 반쯤 체념한 채 대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거렸다.

“내일 뵐게요. 쉬세요.”

“……그래.”

침실을 나오자 필립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필립 경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사용인이 좀 더 많으면 좋을 텐데요.”

필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가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상치 못한 감사인사에 나는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필립은 제 할 말을 다 전했다는 듯 몸을 돌려 가던 길을 마저 걷기 시작했다.

주군이나 수하나 어쩜 저리도 무뚝뚝한지.

누가 보면 형제인 줄 알겠다.

나는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부지런히 필립을 따라갔다.

올 때와는 다르게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 입꼬리가 괜스레 실룩거렸다.

* * *

카이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조금 있으니 현관을 나오는 로웨나가 보였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발걸음이 통통 튀었다.

카이스의 금빛 눈동자가 로웨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쫓았다.

마침내 마차가 정문 너머로 사라지고서야 카이스는 몸을 돌렸다.

침실에서 갑자기 사라진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주방이었다.

한쪽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작은 솥 두 개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는 포리지가 또 하나에는 노란빛이 도는 포타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신수라고 해서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자신은 일반적인 신수들과는 달랐다.

신이 직접 빚은 신수로 신의 권능을 받은 신의 사자였다.

그렇기에 자연으로부터 흡수하는 정기만으로도 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한때는 인간들의 음식을 먹는 걸 즐기기도 했었다. 새롭고 흥미로웠으니까.

오랜 세월 온갖 산해진미를 모두 맛보았지만 오늘만큼 따뜻한 요리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과거에 먹었던 음식들에 비하면 맛도, 모양새도 볼품없는데 말이다.

‘이상하지.’

그 한 그릇이 무에 그리 특별하다고 늘 텅 비어 있던 속이 든든하게 채워진 기분이 드는 걸까.

고작 오트밀 포리지일 뿐인데.

카이스가 무심결에 가슴께를 매만졌다.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포리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느릿하게 찬장으로 걸어간 그가 그릇들을 꺼내었다.

족히 100년은 넘은 그릇이지만 대공저 안의 모든 것은 신력으로 보호받고 있었던 탓에 먼지는 물론이고 세월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포리지와 포타주를 차례로 그릇에 담은 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말없이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참으로 따뜻했다.

그의 머리 위로 호감도 바가 깜박거렸다.

잠시 후 두 그릇을 모두 비워낸 카이스가 주방을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숨죽인 채 꽃들 사이로 몸을 숨겼던 나비들이 반갑게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는 하얀 가제보 안으로 들어가 긴 의자에 앉았다.

로웨나가 만들어준 음식 탓일까 뻥 뚫린 가슴이 이전만큼 시리진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자신이 본 기억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데이먼.”

카이스가 분노를 담아 짓씹듯 내뱉었다.

신벌을 받는 순간 황제 뒤로 모습을 드러낸 그놈은 웃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매우 즐겁다는 듯이.

분노와 절망을 토해내는 자신을 보며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에이바가 납치된 걸 알고 황궁으로 달려가면서도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심지어 100년 만에 깨어났어도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한 한 가닥 믿음이 남아 있었다.

저를 미워하는 놈이니 그저 황제가 하는 짓을 방관했을 뿐이라고.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하려 애썼다.

멍청하고 겁 많은 황제는 감히 에이바를 납치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대공저에 설치해 두었던 결계를 뚫을 수 있는 이가 그놈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가닥 남은 신의를 버리지 못했었다.

어리석게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차라리 저를 다치게 했다면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이바에게 손을 댄 것만큼은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신벌을 받아 영혼이 소멸하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그놈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말리라.

일순 카이스의 몸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불꽃이 일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또다시 황금사슬이 나타나지 않도록 카이스가 감정을 조절했기 때문이었다.

길게 숨을 내쉰 그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에이바는 죽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카이스는 심장이 뜯기는 것 같은 고통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시금 거칠게 날뛰려는 신력을 제어하던 그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그래, 이것 때문에 그동안 에이바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었지.

왜 이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그가 천천히 신력을 운용하며 심장 부위를 집중적으로 탐색했다.

심장에는 반쪽짜리 날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온화하고도 익숙한 신력을 품은 채.

날개 문양은 반려의 각인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각인을 맺는 순간 각자의 심장에 서로의 신력을 품은 날개 문양이 새겨지게 된다. 

그 문양은 상대가 살아 있는 한 계속 존재한다.

‘알은 분명 깨졌었어.’

인어의 눈물로 본 과거의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보았다.

에이바의 작고 여린 몸체가 바닥에 뒹구는 것을.

그 처참한 모습을 상기하니 다시금 분노가 치솟았다.

신수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기 전에 알이 깨지게 되면 자력으로는 살 수 없다.

신력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신수가 곁에 있다면 살 가능성이 생기겠지만.

그 당시 황제는 에이바를 가져다 버리라 명령했었다. 데이먼은 그를 방관했고.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각인이 남아 있단 말인가.

처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각인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그때는 에이바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자신이 신벌을 받은 탓이라 여겼었다.

신벌로 잠에 빠지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은 신의 권능에 묶여 보존되니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설은 폐기해야 했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각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었다면 이 정도로 절망하진 않았을 텐데.’

과거의 기억을 찾아본 게 후회가 되었다.

희망고문일지라도 에이바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만으로도 숨통이 트였을 텐데.

에이바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치고 지나갔다.

‘만약 이 각인이 착오가 아니라면?’

에이바가 어딘가 살아있기 때문이라면?

순간 카이스가 숨을 멈추었다.

에이바가 쓰레기 취급당하며 시종들의 손에 들려나갈 때까지도 그녀의 숨은 붙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누군가 몰래 빼돌려 살렸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데이먼이었다.

에이바를 살릴 수 있는 이는 신을 제외하고는 데이먼과 자신밖에 없으니.

만약 신이 그녀를 살렸다면 제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을 리 없다.

만약 데이먼이 에이바를 빼돌렸다면 왜 지금까지 조용히 있는 거지?

당장이라도 달려와 그녀를 인질로 협박을 해댔을 텐데.

‘지나친 망상인가?’

에이바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발악하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카이스가 버석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에이바만 다시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설령 신을 배반하는 일일지라도.

말아 쥔 손에 하얗게 마디가 도드라져 나왔다.

‘데이먼부터 찾아야 해.’

매일같이 데이먼을 찾고 있지만 아직 성과가 없었다.

신력의 제한만 받지 않았더라면 단박에 찾아냈을 텐데.

카이스가 으드득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으로 걸어 나온 그가 신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발치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른 붉은 신력이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찾아라, 데이먼을 찾아라.’

그놈을 찾아서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알아내야 할 것이 있어.

그의 필사적인 외침에 반응하듯 대공저의 정원은 물론이고 에일숲 전체가 얕게 진동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공저가 완전히 어둠에 잠기자 필립이 돌아왔다.

“주군.”

그제야 카이스가 눈을 뜨며 신력을 거둬들였다.

“로웨나는?”

“백작저까지 무사히 모셔다 드렸습니다.”

카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를 부를 거다.”

그 말만으로도 카이스의 의도를 파악한 필립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카이스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기자 바로 해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군! 괜찮으신 거예요? 어떻게 일어나신 거예요?”

정원에 안착하자마자 카이스에게 달려온 해리가 걱정스럽게 카이스를 살폈다.

“난 괜찮다.”

“오늘 아침까지도 눈도 못 뜨시던 분이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필립, 너 제대로 간호 안 해?”

해리가 동그란 눈매를 사납게 치켜뜨며 필립을 쏘아보았다.

“해리, 그만. 난 정말 괜찮아.”

“하, 정말.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주군을 잃는 줄 알았다고요.”

해리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상을 지었다.

카이스는 말없이 해리의 머리를 도닥였다.

그러자 해리의 눈가가 더욱 축 늘어졌다.

“이리 와서 앉아라. 필립, 너도.”

가제보 안으로 들어가는 카이스의 뒤를 필립과 해리가 뒤따랐다.

카이스는 마주보고 앉은 필립과 해리에게 자신이 본 기억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다.

테이블 위로 날 선 적막이 흘렀다.

“하, 나쁜 새끼들! 황가는 물론이고 데이먼까지 지하계에 다 처박아 버려요.”

귀엽게 폭 들어간 보조개가 분노로 파들거렸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해리 옆에 앉아 있던 필립이 비장하게 내뱉었다.

“황제부터 털어봐.”

필립은 의문 어린 표정이었지만 해리는 금방 그 뜻을 알아채고는 눈을 빛냈다.

“하긴 황가에 저주가 내렸는데 저리 태평할 수는 없죠. 황태자는 꽤나 절박해 보였는데 말이죠.”

그제야 필립도 카이스의 의도를 알아챈 눈치였다.

“황제가 황궁 어딘가에 정부를 고이 숨겨두었다는 얘기가 돌던데 거기부터 파 볼게요.”

해리가 재미난 일을 앞둔 개구쟁이처럼 웃자 양 볼에 보조개가 폭 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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