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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44)화 (44/140)

44화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포션은 처음 봐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시스템이 보상으로 준 건데 당연히 좋겠지.

“그럼, 대공 전하께 드려도 괜찮은 거죠?”

“네. 먹여 드리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내 힘으로 장신의 대공을 부축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 선선히 필립에게 맡겼다.

그는 대공을 일으켜 제게 기대게 한 뒤 조심스럽게 포션을 먹였다.

무사히 한 병을 다 먹인 필립은 대공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는 내 옆에 섰다.

“효과가 있으면 좋을 텐데.”

걱정스럽게 대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후끈했던 침실의 온도가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발갛게 달아올랐던 대공의 얼굴도 점차 제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거칠었던 숨소리도 점점 안정되고 끙끙거리던 신음소리도 잦아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공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던 이마가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효과가 있나 봐요!”

역시 시스템이 주는 건 뭔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었다.

필립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대공의 변화에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있었다.

“내 말대로 시도해 보길 잘했죠?”

필립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스승님.”

더는 아프지 않아서.

뒷말은 조용히 삼키며 마른 수건으로 대공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기 시작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스승님이 아프신데 제자가 이 정도라도 해야죠.”

호기롭게 땀을 닦던 나는 얼마 뒤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과 목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열심히 닦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얼마나 아팠던 건지 셔츠가 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이불 아래를 확인해 보지 않아도 하의까지 푹 젖어 있을 게 뻔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될 텐데.’

땀이 식으면서 체온이 떨어지면 또 다른 병에 걸리게 될 지도 몰랐다.

“저,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혀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대로 두면 또 아프실 수도 있으니까.”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냉큼 물러섰다.

“저, 여기 계속 계실 겁니까?”

수건을 집어 들고 이불을 걷으려던 필립이 곤란한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아, 나갈게요.”

그제야 침대 옆에 계속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후다닥 문으로 달려갔다.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급하게 나가려다 언뜻 떠오른 생각에 몸을 돌려 필립에게 물었다.

“여기 주방은 어디 있나요?”

대공의 셔츠를 벗기려던 필립이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주방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전하께서 드실 포리지를 끓여 놓으려고요. 일어나시면 드실 수 있게.”

필립이 의문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식재료가 없는 건 아니겠죠?”

아무리 저택에 두 사람밖에 없다고 해도 식재료가 부족하다니.

귀족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식재료가 부족한 건 아닙니다만 이곳엔 주방장이 없습니다.”

주방장이 없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확인을 받으니 당황스럽긴 했다.

“그럼, 평소에는 누가 음식을 만드나요?”

“……제가 합니다.”

세상에, 이런 인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대공이 사용인을 더 두지 않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렇다고는 해도 업무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뭐, 그만큼 임금을 많이 받겠지.’

감탄과 안타까움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필립이 머쓱하게 시선을 피했다.

“전하께서 드실 음식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일을 마치면 제가 하겠습니다.”

뭔 말만 하면 다 자기가 하겠대?

물론 만능 집사로서 매우 바람직한 자세지만 당신도 몸은 하나라고요.

“경은 지금 할 일이 있잖아요. 요리는 내가 직접 할 테니 신경 쓰지 말아요.”

“직접 ……하신다고요?”

미지의 생물을 보듯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싱긋 웃었다.

대저택에서 손 하나 까닥 안 하고 사는 로웨나 케인이 직접 요리한다니 놀랄 만도 하지.

하지만 이 몸 안에 든 영혼은 자취 경력 3년차란 말씀.

요리를 잘하진 못해도 먹을 만하게 만들 순 있단 말이지.

포리지쯤이야. 죽이랑 비슷하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실제로 빙의하고 나서도 몇 번 직접 요리해 보기도 했었고.

“네. 주방만 알려주시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던 필립은 마지못해 주방을 안내해 주었다.

주방에 도착하고서도 불안하게 나를 지켜보던 그는 내가 능숙하게 조리를 시작하자 그제야 침실로 돌아갔다.

포리지를 만드는 데는 그리 많은 재료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트밀을 잘게 빻은 뒤에 우유를 넣고 끓이면 되니까.

그 밖에도 싱싱한 재료들이 많이 있어서 내친 김에 야채와 고기를 삶아 포타주도 끓여 놓았다.

“이 정도면 내일까지 충분하겠지.”

냄비에 뚜껑을 덮은 뒤 우선 포리지만 그릇에 담았다.

식기와 물잔까지 챙긴 뒤 트레이를 들고 침실로 향했다.

“들어가도 되나요?”

혹시라도 민망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크를 하자 대답 보다 문이 먼저 열렸다.

필립은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면서도 시선만은 트레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하는 게 그렇게 신기한가?’

아니면 내가 만든 음식이 못 미더워서일 수도 있겠지.

뭐, 그거야 먹어 보면 알 테고.

나는 필립의 관심을 모른 척 하며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어? 스승님. 깨어나셨어요?”

그러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는 대공을 보고 놀라서 달려갔다.

“조금 전에.”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덴 없으신가요?”

나는 얼른 트레이를 의자에 내려놓은 뒤 대공을 살폈다.

아파서 쓰러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안색도 밝고 눈빛도 또렷했다.

“괜찮아.”

“다행이에요.”

열이 내린 걸 확인하긴 했지만 이렇게 평온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털썩 침대에 앉자 카이스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네 덕분이라 들었다.”

“마침 포션이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약도 들지 않는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걱정……했나?”

“당연하죠. 스승님께서 이리 아프신데 걱정하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어요?”

중요한 공략캐이자 협력자를 잃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저기요, 대공님. 당신, 나한테 무지 소중한 사람이라고요.

그러니 제발 아프지 말아요.

대공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속으로 흘렸다.

대공은 평소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다만 늘 무감하던 눈빛이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뜨겁게 느껴졌다.

괜시리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스승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기력을 회복하려면 무조건 잘 먹어야 해요.”

나는 어색함을 털어내려 의자에 두었던 트레이를 들어 대공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지?”

“포리지를 끓여봤어요. 입맛이 없으시겠지만 조금이라도 드셔보세요.”

음식이 식을까 덮어 두었던 뚜껑을 열자 우윳빛 포리지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대공은 스푼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포리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가 직접 만든 거라 전문 요리사가 만든 것에 비해서는 부족할 거예요. 그래도 정성 들여 만들었어요.”

“……네가 직접?”

“네. 혹시라도 스승님께서 깨어나시면 뭐라도 좀 드셔야 할 것 같아서요.”

대공은 여전히 포리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혹시 음식에 이상한 걸 타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건가?

아니, 그동안 여러 번 목숨을 건 전투를 함께 했는데 그 정도도 못 믿어?

아, 목숨은 나만 걸었던 건가?

뭔지 모를 억울함과 자괴감이 함께 밀려왔다.

어찌됐든 애써 만든 음식이 버려지게 둘 순 없으니 일단 결백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제가 먼저 먹어볼까요?”

식기는 여분으로 한 벌 더 가져온 터라 망설이지 않고 스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됐다.”

손을 들어 나를 막은 대공이 제 스푼을 집어 들었다.

포리지가 가득 담긴 스푼이 느릿하게 대공의 입가로 향하는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는지.

숨이 다 넘어가는 줄 알았다.

마침내 붉은 입술이 열리고 도드라진 울대뼈가 크게 움직였다.

‘입맛에 맞을까? 혹시 맛없다고 못 먹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요리를 할 때만 해도 그럭저럭 먹을 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공이 음식을 먹으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다.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다시금 스푼이 움직였다.

결국 대공은 포리지 한 그릇을 말끔하게 비웠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어떤 평도 하지 않았다.

‘아, 답답해.’

도무지 표정 변화란 게 없어서 맛이 있어서 먹은 건지 억지로 먹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에잇, 목마른 사람이 먼저 우물 파는 거지 뭐.

“어떠셨어요? 드실 만하셨어요?”

혹여 부정적인 평가라도 나올까 싶어 절로 긴장이 되었다.

“정성을 보고 먹으라고 하지 않았나.”

뭐야. 지금 맛없는데 내 정성을 봐서 억지로 먹었다는 거야?

입맛에 맞지 않는데도 끝까지 먹어준 건 고마운 일인데 이상하게도 실망과 서운함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앞으로 요리는 하지 말아야 할까 봐요. 괜히 스승님만 힘들게 해드렸네요.”

힘없이 트레이를 치우자 대공이 부드럽게 내 팔을 붙들었다.

“고맙다.”

갑작스런 인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공을 쳐다보았다.

“포션도, 음식도.”

그리곤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나를 놓아주었다.

미사여구 하나 없는 감사 인사인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나는 비식비식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포리지뿐만 아니라 포타주도 만들어 놓았으니까 끼니 거르지 마시고 드세요.”

대공은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게 주십시오.”

대공이 식사하는 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던 필립이 내게 다가와 트레이를 가져갔다.

“아, 고마워요.”

필립이 방을 나간 뒤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피리를 불렀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미안하군.”

사과를 받으려 꺼낸 말이 아니었기에 머쓱해졌다.

나는 의자 위로 다리를 올려 그러모았다.

“처음에는 피리가 고장 난 줄 알았어요. 그러다 스승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 뭐예요.”

무릎에 얼굴을 기대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스승님은 제가 무슨 심정으로 대공저까지 달려왔는지 모르실 거예요.”

이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닐까.

이대로 게임에 갇혀 소멸되는 건 아닐까 싶어 얼마나 두려웠는지 당신은 모를 거다.

“오늘은 훈련이 없는 날이라 연락을 해 올 줄 몰랐다.”

“계시몽을 꾸는 때가 정해진 건 아니잖아요.”

“…….”

“저는요. 아픈 게 싫어요. 다른 누군가가 아픈 것도 싫어요. 특히 제게 소중한 사람들이 아픈 건 정말 싫어요.”

그러니 아프지 마세요.

속삭이듯 웅얼거리자 대공의 깊은 눈빛이 닿아왔다.

서로 시선이 맞닿은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적막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기묘하게도.

“폴루티아에 가야 하지 않나.”

나지막한 음성에 잠시 멈춰줬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생기를 되찾은 정원 위로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이 보였다.

“음, 오늘은 안 되겠네요.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것 같아요.”

“오늘 꼭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빨리 해결하는 게 좋긴 하지만 오늘 꼭 마쳐야 하는 건 아니에요.”

“다행이군.”

“내일 다시 올게요. 단, 폴루티아에는 저 혼자 갈 거예요. 스승님은 쉬세요.”

단호하게 말하자 대공의 불퉁한 시선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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