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43)화 (43/140)

43화

필립은 한동안 자리를 지키다 조용히 침실을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수건과 함께 물이 든 대야가 들려 있었다.

“너무 오래 아프지는 마십시오.”

낮게 가라앉은 음성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수건에 물을 적신 후 카이스의 뜨거운 이마에 올려놓았다.

황금사슬의 후유증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필립은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송구한 말을 조용히 삼켰다.

* * *

“흠, 이상하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피리를 빼내 유심히 살폈다.

조금 전 모험 퀘스트 알림을 확인하자마자 대공이 준 피리를 불었더랬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전령새가 왔을 텐데 십여 분이 지났는데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깨진 곳도 없고 멀쩡한데 왜 이러지?

혹시나 부는 힘이 부족했던 건가 싶어 크게 숨을 들이켠 뒤 힘차게 불었다.

그런 뒤 한참을 더 기다렸으나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었다.

‘대공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내겐 유일한 희망이 아닌가.

‘어차피 퀘스트를 수행하려면 대공저에 들려야 하니 직접 가서 확인해보지 뭐.’

나는 서둘러 채비를 마친 다음 마차를 타고 대공저로 향했다.

대공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그런데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조차도 온화하고 포근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서늘했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티끌 하나마저도 숨을 죽이고 있는 느낌?

생기가 넘치던 정원의 식물들도 병든 것처럼 시들시들 말라 있었다.

‘뭐지? 여기 왜 이래?’

설마 대공이 또 다시 잠에 들기라도 한 건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번 회차가 마지막인데 유일한 희망이 잠들어 버리면 내 엔딩은?

원래 세계로의 귀환은 어찌 되는 거지?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종국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정문에서 피리를 불어야 한다는 생각은 새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손을 뻗어 현관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대공인줄 알고 반갑게 고개를 들었는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필립이었다.

“대공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인사도 잊은 채 다급하게 물었다.

“오늘은 훈련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방문하신 것인지요?”

필립의 너무나도 차분한 응대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일도 없는 건가? 그럼 왜 전령새는 오지 않았던 거지?

“폴루티아 일 때문에 왔어요.”

필립도 계시몽에 관해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언뜻 필립이 곤란해 하는 것 같았지만 워낙 표정이 없는 사람이라 잘 구분되진 않았다.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까?”

“네.”

“환복하실 수 있도록 방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필립이 옆으로 물러서며 내가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었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피리를 불어도 전령새가 오지 않았어요.”

나는 필립을 따라가지 않고 문 앞에 선 채 물었다.

“전하께서는 중요한 일로 출타 중이십니다.”

“오래 걸리는 일인가요? 그런 게 아니라면 기다렸다가 만나 뵙고 일을 처리하고 싶은데요.”

“동행이 필요하시면 오늘은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필립이 동행하겠다고?

그는 대공저에 있는 유일한 사용인이라 다양한 일을 도맡고 있었다.

총괄 집사이자 대공의 보좌관이며 나를 데려다 줄 때는 마부 일도 자처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무예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체격은 다부지게 보이지만…….’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필립이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뒤늦게 시선을 거두었지만 민망함이 밀려왔다.

“전하를 호위하는 업무도 맡고 있으니 실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위라니 정말 전천후인 모양이었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저리 자신하는 걸 보면 헛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퓨릭서를 그에게 내보여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무엇보다 대공이 아무리 외출 중이라고 해도 전령새가 오지 않은 게 이상했다.

‘내게 숨기는 게 있는 건가?’

대공저를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졌던 위화감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생기를 잃어버린 정원이.

“정말 전하께서 출타 중이신가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시고요?”

마지막 물음에 필립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찰나이긴 했지만 똑바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기에 그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역시 뭔가 있어.’

“전하께 안내해줘요.”

“전하께서는 지금…….”

“내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대공저는 전하의 신력을 원천으로 유지되죠. 그런데 정원의 수목들이 모두 시들어 있었어요. 전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해요.”

무뚝뚝한 필립의 얼굴에 곤란한 낯빛이 어렸다.

“안내해 주겠어요? 아니면 내가 직접 찾아갈까요?”

“……송구합니다. 영애를 기만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필립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다만 전하께서 많이 편찮으신 터라 편히 쉬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의원은 다녀갔나요?”

입을 꾹 다무는 걸 보니 의원도 부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무슨 비밀이 그리 많아서 아픈데 의원도 부르지 않은 거야?

“의식은 있으신 거죠?”

“…….”

“의식이 없으신 데도 의원을 부르지 않았다고요?”

“의원이 온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치병에 걸리시기라도 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일단 전하가 계신 곳으로 안내해줘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하자 필립이 난색을 표했다.

“안 된다고 말할 생각하지 말아요. 막으면 쳐들어 갈 테니까.”

눈에 힘을 주며 으름장을 놓자 필립이 할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침실에 들어서자 한여름도 아닌데 공기가 후끈했다.

벽난로에 불을 땐 것인가 싶어 살폈지만 벽난로는 깨끗하기만 했다.

‘뭐지?’

이상하단 생각을 하며 침대로 향하자 불가마를 마주한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대공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넓고 커다란 침대 위에 고이 누워 있었다.

다만 평안하게 누워 있었던 그때와 달리 신음을 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하며 거친 숨소리, 더불어 침대에서 느껴지는 열기까지.

이마에 손을 대보지 않아도 지금 그가 얼마나 불덩이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신력이 무한대이신 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야?’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왜 이렇게 아프신 건가요?”

대공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필립에게 물었다.

“거기까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대공의 개인적인 사정과 관련된 일이란 건가?

그렇다면 더 캐묻는다고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약은 드셨어요?”

“……약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의원도 안 돼, 약도 안 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황당하게 필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듯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으실 수 있나요?”

나는 반쯤 체념한 채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으실 겁니다.”

“그럼, 이대로 그냥 앓아야 한다는 거예요?”

무겁게 침잠하는 필립을 보니 더는 추궁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손쓸 방도가 없는 걸까?’

아니, 신력 max를 찍은 분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당신, 제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나는 아픈 게 싫다. 

조금만 아파도 제단 위에서 겪었던 끔찍한 고통이 되살아나니까.

온 몸이 쥐어 짜이고 뼈가 으스러지던 그 고통이 뼈 깊숙이 아로새겨진 탓에 작은 통증에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탓이었다.

비단 내게만 국한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대공의 얼굴을 보니 멀쩡하던 뼈가 욱신거리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나는 필립 몰래 슬쩍 욱신거리는 팔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둘 순 없어.’

그때의 나와 같은 고통은 아닐지라도 약도 못 먹고 앓고 있는 사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침대 맡을 보니 젖은 수건과 물이 담긴 대야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내가 오기 전까지 필립이 간호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수건이랑 물 좀 교체해 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영애께서는 폴루티아에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폴루티아가 중요해요? 사람이 다 죽어가게 생겼는데?”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아 버티자 필립이 난색을 표했다.

“전하께서 괜찮으실 때까지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니 그렇게 아세요.”

“……새로 물을 받아 오겠습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필립이 이내 포기하고 침실을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 지경이 된 거야?”

한숨을 내뱉으며 대공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어찌나 뜨겁던지. 펄펄 끓는 냄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건 뭐. 물수건으로는 턱도 없겠는데?”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생으로 앓으라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약도 안 듣는다고 했으니 신력과 관련된 문제인가?’

문득 포피룬 마수를 처리할 때 보상으로 받았던 회복 포션이 떠올랐다.

대공이 나를 치료해주는 바람에 계속 쓸 일이 없어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회복 포션은 듣지 않을까?’

아무 효과가 없으면 포션을 버리는 꼴이 되겠지만 이대로 내버려두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까지 대공 덕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잖아.

포션 한 병 가지고 아까워하면 너무 양심이 없지.

나는 필립이 오기 전에 얼른 인벤토리를 열어 회복 포션을 꺼냈다.

“말은 하고 먹여야겠지?”

부작용이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만약 포션이 효과가 있다면 생색도 내야 하고.

나는 필립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머지않아 필립이 수건과 찬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저, 필립 경. 내가 회복에 좋은 포션을 가지고 있는데 전하께 도움이 될까요?”

“포션이요?”

“네.”

이 세계에는 연금술사들이 만든 포션을 파는 상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포션이 낯선 물품은 아니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포션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이건 다를지 몰라요. 최상급 포션이거든요.”

시스템이 보상으로 주는 포션은 모두 최상급 포션으로 이 세계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리 귀한 것이라면 넣어 두십시오. 효과도 없이 버리게 될 뿐입니다.”

“효과가 없더라도 괜찮아요. 전하께서 여러 번 저를 구해주셨는데 제가 해드릴 거라고는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요.”

잠시 망설이던 필립이 내게 정중히 부탁했다.

“제가 포션을 확인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선뜻 그에게 포션을 건네었다. 유리병 안에 든 하얀색 액체가 넘실거렸다.

꼼꼼히 포션을 살펴보던 검은색 눈동자가 일순 크게 부풀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럴 리가 없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