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로웨나 케인.”
그 이름을 내뱉자 난폭하게 휘몰아치던 기운이 잠시 멈칫했다.
‘설마 했지만. 이런 즉각적인 반응이라니.’
필립은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남은 말을 마저 내뱉었다.
“데이먼으로부터 지키셔야죠.”
일순 카이스의 금안에 살기가 스쳐지나갔지만 이내 지그시 눈꺼풀이 감기었다.
잠시 후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불꽃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에 따라 대공저를 흔들던 진동도, 사납게 휘몰아치던 회오리도 잠잠해졌다.
마침내 카이스를 옥죄고 있던 황금사슬도 모습을 감추었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해리가 제 신력을 거두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필립도 이마에 흘러내린 땀방울을 소매로 훔쳤다.
그 순간 카이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어, 어?”
한숨 돌리고 있던 해리가 튕기듯 일어나 카이스에게로 달려갔다.
하나 필립이 더 빨랐다.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카이스를 붙들었다.
그를 침대에 눕히자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달뜬 숨을 내뱉는 것이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어휴, 완전 불덩이신데?”
카이스의 이마에 손을 댄 해리가 혀를 내둘렀다.
“그 고통을 견디셨으니…….”
황금사슬의 고통은 평범한 인간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황금사슬이 나타난 순간 거품을 물고 쓰러져 즉사할 정도의 고통이니까.
카이스를 바라보는 필립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 정도면 회복하시는데 오래 걸리겠네.”
침대 맡에 앉은 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금사슬로 인한 후유증은 약으로도 낫지 않는다.
신벌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가디언의 신력은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우리 둘 다 신력이 바닥났으니. 이것 참.”
“지금으로선 곁을 지켜 드리는 것이 최선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침실 안을 맴돌았다.
커다란 창문으로 비쳐 드는 노을이 열에 달뜬 카이스의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인어의 눈물’에 대한 건 미리 언질을 줬어야지.”
해리의 나지막한 질책이 침묵을 갈랐다.
“나도 바로 드실 줄은 몰랐다.”
“하, 정말.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주군이 어떤 분이신 줄 몰라서 그래?”
해리가 눈을 뾰족하게 뜨며 핀잔을 주었지만 필립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언제나 혼자 감당하시려는 분이잖아. 주군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대비는 해놓고 드시게 했어야지.”
“내 불찰이다.”
“주군께서 에이바님에 대한 과거를 보실 거라는 거 몰랐어? 그럼, 어찌되실지 뻔하잖아.”
“……아직 살아계실 수도…….”
“내가 헛된 희망이라 그랬어? 안 그랬어?”
해리가 필립의 말허리를 자르며 따졌다.
“에이바님께서 살아 계셨으면 주군께서 저렇게 되셨겠어?”
필립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어휴, 고지식한 녀석.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속이 터진다, 터져.”
해리가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툴툴거렸다.
“주군께서 깨어나신 이후가 더 문제야. 앞으로 황가를 가만히 두시겠어?”
“100년 전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실 거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해리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보다 로웨나 케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줘.”
“왜? 이미 주군의 명으로 한 번 조사해봤잖아.”
“아까 보지 않았나.”
필립의 착잡한 눈빛을 본 해리가 반듯한 미간을 찌푸렸다.
“로웨나 케인이 그렇게 매력이 있나?”
“주군의 관심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필립이 해리의 호기심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 영애가 특별하다는 건 알지. 무려 주군을 깨운 사람이니.”
해리가 빙긋 웃자 귀엽게 패인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주군 외에도 그 영애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누가 또 조사를 의뢰한 것인가?”
“너도 알지? 제페스 하이먼. 그 자가 뒷조사를 의뢰했었지. 영애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건 아닌지 알아봐달라고.”
제페스가 누구인지 몰라 필립이 고개를 기울이자 해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케인 영애를 호수에 빠뜨린 사람. 영애의 전 남자친구.”
“아, 감옥에 갇힌 사람.”
필립은 그제야 카이스와 함께 감옥으로 찾아갔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어떻게 하이먼 영식을 모를 수가 있어? 두 사람이 얼마나 유명했는데. 심지어 이번 재판은 어린 아이도 알 정도라고!”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인가?”
“아이고, 답답해. 세상사에 관심 좀 가져.”
“그건 네 할 일이지 않나. 내 임무는 주군을 호위하는 것이다.”
“주군 옆에서 검만 들고 있으면 다냐? 돌아가는 정세도 알아야 황가로부터 주군을 지킬 수 있지. 이번에도 또 허망하게 당할 생각이야?”
“연애사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케인 영애가 관련된 일이잖아!”
로웨나가 언급되자 필립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생각해 보면 제페스라는 자를 찾아간 일부터가 카이스답지 않은 일이었다.
무리하게 실레니아 호수를 복원시킨 일도 그렇고.
필립이 보기에도 그의 주군은 그 여자와 관련된 일에는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아까도 로웨나 케인의 이름을 외친 것이지만.’
그렇게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실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필립이 힐끗 해리를 쳐다보았다.
‘감옥에 다녀온 일에 대해 말해야 하나?’
해리는 카이스가 실레니아 호수를 무리하게 복원한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필립이 말하지 않았으므로.
잠시 고민하던 필립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 모든 사실들을 알게 되면 해리는 호들갑을 떨며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질 것이다.
‘해리가 알면 피곤해진다.’
필립, 그 자신은 물론이고 카이스까지.
필립은 해리와 상의해보려던 생각을 깔끔하게 접었다.
“제페스라는 자는 이미 감옥에 갇히지 않았나. 더는 영애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하이먼 영식이 끝이 아니야.”
“조사를 맡긴이가 또 있었단 말인가?”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황태자가 케인 영애에게 관심이 많다는 거?”
“황태자는 모든 여인에게 관심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하지만 로웨나 케인에겐 일절 관심이 없었거든. 아니 오히려 피하는 쪽에 가까웠지. 황태자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를 모두 갖추었거든.”
해리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덧붙였다.
필립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 두 가지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니까. 그것도 꽤 많이.”
필립은 황태자가 로웨나를 찾으러 대공저를 찾아왔던 때를 떠올렸다.
‘주군이 황궁에 모습을 드러내신 일 때문에 달려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그는 이미 약혼한 걸로 아는데.”
“그러니까. 그게 좀 의문이긴 해. 평생 결혼은 안 할 것처럼 굴었거든. 케인 영애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고.”
“어쨌든 약혼했으니 이제 관심을 끊겠지. 잘 감시해.”
반드시 끊어야 했다.
로웨나 케인이 황가와 엮이게 된다면 골치 아파질 테니.
“안 그래도 감시하고 있었어. 오늘 보니 더 신경 써야겠네.”
필립의 말뜻을 알아들은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황태자 약혼 말이야.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말해 보라는 눈짓에 해리가 잠시 할 말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황태자 약혼녀가 누구인지는 알지?”
필립이 말갛게 쳐다보자 해리의 얼굴에 체념이 어렸다.
“카밀라 체임버.”
“체임버면 공녀겠군. 공작가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몇 달 전에 공녀가 황태자를 찾아왔었어. 그리고 이상한 말을 남겼었지.”
“이상한 말?”
“베히른 영지에 일어날 홍수를 예언했었어.”
“……!”
“그것만이 아니야. 자신이 미래를 안다고 자신 있게 말했었어.”
해리는 카밀라가 카지노로 황태자를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황태자의 부탁을 받고 로웨나의 의뢰 여부를 확인하러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황태자는 카밀라를 출입제한구역으로 데리고 왔었다는 사실은 순순히 시인했다.
다만 어떤 용건으로 찾아온 것인지에 대해선 함구했었다.
그러나 해리가 누구인가.
레드빅 카지노의 사장이자 정보 길드 카펜의 마스터가 아닌가.
카지노는 해리의 영역.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직접 보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가디언 해리의 능력이었다.
‘정말로 홍수가 일어날 줄은 몰랐지.’
신의 권능을 받았다고는 해도 카이스를 비롯해 필립과 해리 모두 예지 능력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밀라 체임버를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신력을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해 봤나?”
“신력은 없었어.”
“그렇다면 또 다른 신의 사자는 아니다.”
“혹시 데이먼과 관련되어 있는 건 아닐까?”
데이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침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렇다면 죽여야지.”
필립의 흑요석을 닮은 검은 눈동자가 어둑하게 빛났다.
“우선은 주군과 논의한 다음에 결정하자.”
“왜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나?”
“정말 미래를 알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했어.”
“다음부터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보고부터 올려.”
“알았어.”
책망이 담긴 시선에 해리가 대충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이 깨어나신 이후로 이상한 일이 많이 생기네. 케인 영애도 계시몽을 꾼다며?”
“폴루티아 한정이다. 그리고 케인 영애는 데이먼의 수하가 아니다.”
묘하게 로웨나를 감싸는 것 같은 뉘앙스에 해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필립은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카이스를 살피고 있었다.
“다행이네. 케인 영애가 데이먼이나 황가와 연관되어 있었다면. 아유,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해리가 머리를 감싸며 풀썩 침대에 누웠다.
“일어나. 주군께선 쉬여야 한다.”
“아, 정말. 잠깐 누운 거 가지고 되게 야박하게 구네. 여기 다섯 명은 거뜬히 누워 잘 정도로 크거든?”
해리의 투정은 고지식한 필립에겐 통하지 않았다.
엄한 눈빛에 침대에서 일어난 해리가 너무하다며 투덜댔다.
“여기는 내가 지킬 테니 넌 하던 일이나 마저 해. 바쁠 거 아니야.”
“바쁘지, 바빠. 그래도 주군이 깨어나셔서 살맛나. 너도 나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줄 알았거든.”
카이스가 잠든 지난 100년간 가디언인 필립과 해리도 잠들어 있었다.
해리가 잠에서 깨자마자 한 일은 꽤나 이름 있는 정보 길드 카펜을 인수한 것이었다.
정보 길드를 관리하는 건 카이스의 가디언이 되면서부터 계속 해오던 일이었다.
그가 가진 능력이 정보 수집에 안성맞춤이었으니까.
불행히도 100년 전에 운영하던 길드는 이미 사라진 상태라 새로운 기반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카펜을 인수한 그는 바로 레드빅 카지노도 사들였다.
지난 100년 동안의 일들은 물론 현재 정세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재 카펜의 규모로는 턱도 없기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단골손님이란 점도 레드빅 카지노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돈이야 지난 세월 모은 돈이 대공저 금고에 100년이나 모셔져 있었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해리는 카지노를 인수하자마자 황태자에게 바로 접근했다.
카펜의 마스터라는 신분을 밝히고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니 빠른 속도로 친밀감을 쌓을 수 있었다.
덕분에 황가에 관한 정보를 수월하게 얻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또다시 그런 일은 없어야지.”
“여기를 떠나려면 데이먼을 찾아내 죽여야겠지?”
항상 온기를 품고 있던 해리의 보랏빛 눈동자가 일순 냉랭해졌다.
“그래야겠지.”
“그러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네. 나 이만 갈게.”
해리가 평소처럼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