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헉, 헉.”
번쩍 눈을 뜬 카이스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인어의 눈물’을 통해 본 과거는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던 바로 그 날의 일이었다.
결계가 뚫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겁지겁 대공저로 달려갔을 때.
침대 옆, 유리 보관함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었다.
만약 가디언들이 함께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저택을 모두 불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신의 선물, 에이바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곧바로 그녀의 기운을 추적했다.
에이바와는 반려의 각인을 마친 상태이니 그녀의 기운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황궁.
그녀가 있는 곳을 확인한 순간, 밀려오는 배신감과 분노에 머리가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황궁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에이바가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던 것만 기억날 뿐.
알현실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황제는 뻔뻔하게 부인했다.
에이바를 납치하지 않았노라고.
오히려 그에게 황제를 모함하였다며 호통을 치고 제압하려 했다.
분명 에이바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심장이 그녀가 여기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는데.
감히 일개 인간이 그를 기만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참지 못했다. 아니 참지 않았다.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 땅을 지켜야 함을 알면서도.
참지 않았다.
그의 또 다른 심장인 반려를 빼앗겼으므로.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면 신의 명령도, 신의 사자로서의 책무도 모두 져버릴 수 있었다.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쓸어버릴 생각으로 힘을 개방한 순간 신이 개입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벌을 받았다.
끝내 황제를 죽이지도, 에이바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동면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닐 거라고, 에이바는 살아 있을 거라고. 황가에서 숨기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를 굴복시키고 싶어 훔쳐간 것이니 인질로 삼기 위해서라도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 여기며 그 오랜 세월을 버텨왔건만.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이 갈가리 찢겨져 버렸다.
가슴이 아리다 못해 심장이 쥐어뜯기는 고통에 가슴께를 부여잡은 손에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에이바, 나의 반려.’
태어나지도 못하고 떠나버린 나의 가여운 신부.
에이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찢기는 고통에 카이스가 몸을 웅크렸다.
“윽.”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단단한 손아귀에서 형편없이 구겨진 붉은색 이불이 마치 그가 토해낸 핏물처럼 보였다.
‘에이바, 에이바.’
속으로는 하염없이 반려를 부르짖으면서도 차마 소리 내어 부르지 못했다.
이대로 이름을 내뱉는 순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 감히 이름 한 자락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카이스. 네게 주는 선물이다.”
세상이 안정되고 아버지, 아기오께서 신계로 돌아가시던 날 그에게 주었던 하얗고 작은 알.
“제가 가르쳐야 할 아이입니까?”
카이스는 아기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 그렇게 물었더랬다.
자신의 뒤를 이어 이 세계를 지킬 아이를 맡겨 주시는 건가 해서.
그렇다면 성심을 다해 아이의 스승이 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기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가 생각하던 답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성을 다해 돌봐주어라. 내가 널 보살폈던 것처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의문스러운 말만 남긴 채 아기오는 신계로 돌아갔다.
그 날 이후 카이스는 아기오의 충직한 종으로 최선을 다해 알을 돌봤다.
꼬박꼬박 자신의 신력을 공급해 주고 매일 같이 부드러운 천으로 알을 닦아주었다.
아기오가 제게 해 주었던 것처럼 말을 건네고, 동화책도 읽어주었다.
때로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신수의 알은 평범한 동물의 알과는 다르다.
알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껍질 너머의 세상을 느끼고 사고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을 기억한다.
에이바도 마찬가지.
그녀는 카이스의 정성에 감응했고 둘은 교감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카이스는 에이바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반려의 각인이 이루어졌다.
그러는 사이 황제가 몇 번이나 바뀌며 시간이 흘러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에이바를 만날 날이 다가왔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 날을 고작 며칠 앞두고 허무하게 잃고 만 것이었다.
“아아.”
카이스에게서 목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짐승의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잔뜩 웅크린 몸이 분노와 슬픔으로 잘게 떨렸다.
점점이 젖어 들어가던 붉은 이불은 이내 눈물에 흠뻑 잠겨들었다.
카이스의 울부짖음에 대공저 기류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원에 자리한 수목과 꽃들이 슬픔과 고통에 아우성을 쳐댔다.
유유히 날아다니던 나비들도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분노와 슬픔이 한계를 벗어나자 카이스의 몸에서 화르륵 불꽃이 일어났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신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평소와 같이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채찍과 같은 흉포한 기운이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잡아채 목을 조를 것처럼 날뛰었다.
“주군!”
이상 현상을 알아챈 필립이 벌컥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주군! 진정하십시오!”
필립이 다급하게 달려갔지만 너무나 강력한 힘의 파동에 카이스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젠장.”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말렸어야 했다.
과거를 보시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거늘.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필립의 얼굴 위로 짙은 자책이 어렸다.
필립은 가만히 자신의 신력을 끌어올렸다.
이대로 두었다간 주군이 위험했다.
그의 몸에서 노란색 신력이 솟구쳐 올랐다.
카이스의 것만큼 순도가 높진 않지만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필립에게서 흘러나온 신력이 카이스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사나운 이를 드러내고 있는 붉은 신력은 필립의 신력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필립이 접근하려고 하면 할수록 붉은 신력은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철컥.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황금사슬이 카이스의 몸을 칭칭 감으며 옥죄기 시작했다.
“으윽!”
에이바를 잃어버린 고통에 황금사슬의 고통까지 더해지자 그가 목이 졸린 것처럼 헐떡거렸다.
“주군!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평소의 카이스였다면 황금사슬이 나타날 기미만 보였어도 기운을 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카이스는 이미 이성이 날아간 지 오래였다.
분노와 슬픔에 삼켜진 탓에 그를 죽일 수도 있는 황금사슬에 오히려 맞서고 있었다.
거대한 붉은 신력이 황금사슬을 끊어버릴 것처럼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때 허공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다.
“뭐야? 여기 왜 이래?”
앳된 목소리, 백금발의 꽁지머리.
황금사슬이 나타나자마자 소환된 또 다른 가디언, 해리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할 일부터 해.”
“아, 알았어.”
무뚝뚝한 채근에 해리가 얼른 자신의 신력을 개방했다.
보랏빛 신력이 필립의 것과 합세해 거칠게 날뛰는 카이스의 기운을 제어하기 위해 씨름했다.
그러는 동안 황금사슬은 카이스의 힘에 반발해 그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조여 댔다.
수려한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제대로 된 신음 하나 내지 못하고 앓는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필립과 해리도 점점 힘이 부치는지 시간이 갈수록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급기야는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필립, 더는 못 버텨.”
“죽을 각오로 임해.”
“물론 그러고 있지. 하지만 이제 곧 신력이 바닥날 것 같단 말이야.”
“주군을 돌아가시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버텨.”
“아, 진짜. 이러다 우리 둘 다 쓰러지면 그땐 어떡하려고?”
해리가 답답한 마음에 소리치자 굳게 다문 필립의 입매에 힘이 들어갔다.
필립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해리와 힘을 합친다고 해도 카이스를 이겨내긴 어렵다는 걸.
둘이서 목숨을 내놓는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래도 실패한다면?
황금사슬은 기약 없는 동면과 함께 내린 또 다른 신벌.
살의를 품고 폭주할 때 나타나는 황금사슬은 신벌이라는 명분답게 끔찍한 고통을 준다.
그럼에도 살의를 거두지 않으면 황금사슬은 그 대상자를 소멸시킨다.
육체와 영혼 모두.
지금 필립과 해리가 카이스를 막지 못한다면 그는 소멸되고 말 것이다.
필립이 괴로움을 참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현재로선 도저히 카이스의 분노를 멈추게 할 방법이 없었다.
“주군! 정신 좀 차려 봐요. 우리 다 죽게 생겼다고요. 아니, 100년이나 주군만 기다렸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해리가 투덜대며 울상을 지었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카이스의 기세는 여전히 사납게 날뛰었다.
“필립, 주군을 말릴 방도가 없어?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
“인어의 눈물을 드셨다.”
그 말에 방방 뛰던 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방법 좀 찾아봐. 이대로 주군을 잃고 싶진 않아.”
한참 만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필립에게선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리 신력으로 유지되는 저택이라 해도 카이스의 폭주에 더해 필립과 해리까지 가세하니 곧 무너질 것처럼 진동이 심해졌다.
만약 침실에 가구가 단출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군, 복수하셔야죠. 이대로 소멸되시면 에이바님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드려요?”
“해리!”
필립이 질책하는 어조로 해리를 불렀다.
‘복수’와 ‘에이바’는 카이스에게 금기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이스의 기세가 바뀌었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황금사슬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대신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가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카이스의 긴 머리가 태풍을 만난 깃발처럼 휘날리고 창가에 달린 커튼이 펄럭이다 못해 찢겨졌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삼켜버릴 것처럼 사납게 휘몰아치는 회오리 탓에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움푹 파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오직 카이스만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화르륵.
그의 발밑에서부터 솟아오른 불길이 몸에 칭칭 감긴 굵은 황금사슬을 따라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커다란 불꽃 그 자체가 되어버린 카이스가 번쩍 눈을 떴다.
태양을 닮은 금안이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해리.”
필립이 이를 으득 갈았다.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하잖아. 결계도 깨질 것 같았단 말이야.”
해리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웅얼거렸다.
결계가 깨지기라도 하면 에일숲 너머의 지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하나 지금 카이스의 분노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하하, 우리는 못 막아. 절대 못 막아. 아기오님께서 개입하시겠지?”
해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뒷걸음질쳤다.
반면 필립은 이를 악물었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반드시.
주군을 잃을 순 없었다.
그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