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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40)화 (40/140)

40화

“비노쉬.”

카이스의 나지막한 부름에 하늘이 비칠 만큼 맑고 푸른 호수에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호수를 둘러싼 능수버들과 꽃나무들까지 안개에 휩싸이자 호수면 위로 파문이 일었다.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호수와 같은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인어였다.

정확히 말하면 인어의 형상을 한 호수의 정령이었다.

“신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시여,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면 위로 몸을 띄운 비노쉬가 신을 대하듯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말에 카이스의 입가가 살짝 굳었지만 찰나였다.

“고생이 많았다.”

인간들에 의해 호수가 오염되었다면 터전을 잃었더라도 정령계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데이먼에 의해 폴루티아가 되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연에서 태어난 모든 것을 증오하는 그가 비노쉬를 순순히 보내주었을 리 없으니까.

분명 암흑에 갇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당했겠지.

아니나 다를까 비노쉬의 창백한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처연하게 눈을 내리깐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다시 한 번 정중히 인사하려하자 카이스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내가 구한 것이 아니다.”

이곳은 로웨나가 정화시킨 곳이었다. 자신은 그저 그 위에 씨를 뿌리고 가꾸었을 뿐.

“그 분께는 이미 감사 인사를 전했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카이스는 물론이고 필립도 미간을 좁혔다.

“내 제자가 이곳에 다시 왔었나?”

“그건 아닙니다.”

“그럼, 인사를 전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지?”

“송구합니다. 그 이상은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비노쉬가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령은 언제나 그의 물음에 답해야 하며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다만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신의 명령이 있을 때.

비노쉬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건 바로 그 일에 신이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카이스의 무표정한 낯에 혼란이 어렸다.

‘그래, 로웨나는 대공저의 결계를 뚫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지.’

그녀의 해머에 신력이 흐르는 것은 물론이고 계시몽과 폴루티아 정화까지.

모두 신의 권능과 관계된 것들이 아닌가.

자신이 잠든 100년 사이에 새로운 가디언을 내려 보내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로웨나는 처음부터 자신을 알아봤어야 함은 물론이고 제 뜻에 복종해야 한다.

‘내 제자는 맹랑하지.’

문득 따박따박 말대꾸하던 로웨나를 떠올린 카이스가 자기도 모르게 엷게 미소 지었다.

“주군.”

그를 이상하게 여긴 필립이 조심스럽게 카이스를 불렀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카이스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가 무슨 일이냐며 눈으로 묻자 필립은 원래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카이스 본인이 미소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으므로.

“안개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곳이 정화되었다는 건 아직 알려지진 않았으나 근처에 사는 이들은 변화를 알아차렸을 터.

새벽녘이라고는 하나 날이 밝아오고 있으니 사람들 눈에 띌 지도 모른다.

카이스는 일단 로웨나에 대한 생각을 미뤄두고 비노쉬를 찾아온 목적을 상기했다.

“비노쉬,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인어의 눈물’이 필요해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카이스가 ‘인어의 눈물’을 찾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비노쉬의 눈매가 슬프게 늘어졌다.

“알아야 하는 일이다.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고.”

그는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분명 괜찮지 않을 걸 아니까.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비노쉬는 잠시 슬픈 눈빛으로 카이스를 바라보다 살짝 손을 말아 쥐었다가 폈다.

하얀 손 안에는 이전에는 없던 우윳빛 구슬 한 알이 놓여 있었다.

바로 ‘인어의 눈물’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원하시는 날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공손히 내미는 구슬을 받아든 카이스가 잠시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굳은 낯 위로 무수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비노쉬와 필립은 그런 카이스를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잠시 후 카이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그러쥐자 손 안에 있던 구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맙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이스가 몸을 돌리자 비노쉬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그를 배웅했다.

이내 비노쉬의 모습이 사라지고 실레니아 호수를 감쌌던 하얀 안개도 말끔히 걷혔다.

그 사이 카이스와 필립도 대공저로 돌아왔다.

* * *

카이스는 대공저에 돌아오자마자 필립을 방에서 내보냈다.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손을 쥐었다 펴자 아무것도 없던 손 안에 인어의 눈물이 나타났다.

그는 한참 동안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평범한 인간이 ‘인어의 눈물’을 사용하기 위해선 정확한 날짜를 떠올려야만 한다.

하지만 카이스는 신의 사랑을 받는 자.

그는 그저 누가 무엇을 하는 날이 보고 싶다 생각하면 관련된 날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기억뿐만 아니라 원하는 자의 기억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망설임을 끝낸 카이스가 침대에 바르게 누웠다.

‘인어의 눈물’은 혀에 닿자마자 녹아버렸지만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의식 너머 어딘가로 그를 이끌 뿐이었다.

* * *

100년 전 그 날.

“이게 바로 그 신의 선물이란 말인가?”

“네, 폐하.”

머리가 희끗한 황제의 물음에 시종장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들 앞에는 보라색 벨벳 쿠션 위에 놓인 알이 하나 있었다.

두 손으로 겨우 감싸질 정도 크기의 알은 표면이 백자처럼 하얗고 매끄러우며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리 평범하게 생겼는데. 정말 신수의 알이 맞는 거냐? 어디서 새알을 주워온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알현실까지 알을 운반해 온 기사가 정색했다.

“버몬트 대공의 침실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분명 신수의 알이 맞습니다.”

“지금까지 침실엔 접근조차 할 수 없었지 않느냐. 이번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던 거지?”

황제가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자 줄곧 기사 옆에 조용히 서 있던 금발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 결계는 제게 쉬운 일이라고.”

“그래, 그대가 그랬지. 그렇지만 버몬트 대공의 신술은 신의 권능과 맞먹는 수준이 아닌가?”

금발 사내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졌으나 금세 지워졌다.

“물론 대공의 신술이 뛰어나긴 하지요. 하지만 보십시오. 그 모든 결계를 뚫고 제가 저 알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사내의 말을 반쯤은 흘려듣고 있던 황제가 시종장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시종장이 알이 놓여 있는 쿠션을 조심스럽게 들어 황제 가까이 다가갔다.

황제가 심드렁하게 손을 뻗어 알 위에 대었다.

순간 검지에 끼고 있던 반지의 보석이 투명하게 변했다.

신력을 감지하는 반지.

불투명한 하얀색을 띄는 반지의 보석이 투명하게 변했다는 건 알에 신력이 흐른다는 뜻이었다.

“호오, 정말 신수의 알이군.”

그제야 황제의 얼굴에 흥미가 어렸다.

금발의 사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워낙 찰나였던 지라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대 말이 맞았군. 미안하네. 짐이 그대의 실력을 믿지 못해서.”

뒤늦게 사내의 공을 인정한 황제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저걸 가져왔으니 조만간 대공이 제 발로 달려올 것입니다.”

“하하하, 그 콧대 높은 대공이 꽁지 빠지게 달려올 걸 생각하니 천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야.”

“꽁지가 빠지다 뿐이겠습니까? 아마 영혼이 탈탈 털리는 기분일 겁니다.”

금발의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황제의 장단을 맞추었다.

“그놈의 대공이 사사건건 황가를 무시하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꼴을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뒤틀리던지.”

황제가 생각만 해도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대공이 아무리 신의 사자라고 해도 그가 신은 아니지요. 폐하 또한 신의 선택을 받은 분. 대공이 예를 갖추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대와는 말이 통하는군. 그대야 말로 이 제국의 충신일세.”

금발의 사내가 듣기 좋은 말만 속살거리자 황제가 연신 즐거워했다.

“폐하, 이건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없애버려야지.”

일순 웃음기를 싹 거둔 황제의 눈이 번뜩였다.

“이걸 이용해 대공을 통제하려던 것이 아니셨습니까?”

“생각이 바뀌었어. 떠받들어 모시는 건 대공 하나로 족하지.”

금발 사내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지어졌다 사라졌다.

“그러시다면 대공이 오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짐은 대공이 보는 앞에서 깨뜨릴 걸세. 그 자가 절망하고 무너지는 꼴이 꼭 보고 싶네.”

“대공 앞에서 그게 가능하시리라 보십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대공의 신술이 뛰어나다고.”

금발의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의 손에 이 알이 있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그제야 사내의 말뜻을 알아들은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군. 대공이라면 얼마든지 알을 보호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대공의 분노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긋한 물음에 황제가 움찔했다.

알현실 내에 있던 시종장과 근위대원들의 얼굴도 일순 굳어졌다.

“짐은 신의 선택을 받은 아카르트 제국의 황제다. 대공 하나 감당하지 못할까? 신께서 짐을 지켜주실 거다.”

“당연히 폐하께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지요. 하지만 황궁엔 연약한 백성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굽어 살피시지요.”

금발의 사내가 만용을 부리는 황제를 능숙하게 달랬다.

황제가 힐끔 그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 짐에겐 백성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으니 그대 뜻을 따르도록 하지.”

“제국의 만백성이 폐하의 자비로우심에 탄복할 것입니다.”

사내의 아부에 황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자, 그럼 이 알을 깨뜨리면 되겠는가?”

“아, 이 알은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알에게로 손을 뻗으려는 황제를 사내가 부드럽게 만류했다.

“뭐라? 아무리 신수의 알이라고는 하나 이것도 알은 알이지 않나.”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사내가 시종장이 들고 있던 알을 거침없이 들었다.

“어, 저기…….”

주변에 있던 시종장과 기사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한번 던져보시지요.”

사내가 건네는 알을 당황스럽게 쳐다보던 황제가 머뭇거리며 알을 받아들었다.

그는 알을 없애버리겠다며 호기롭게 외쳤던 것과는 달리 쉬이 내던지지 못했다.

“못하시겠습니까? 제가 대신 해드릴까요?”

“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짐의 손으로 직접 처리할 것이다.”

황제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알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작게 숨을 들이켠 그가 알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던졌다.

쿵. 데구르르.

사내의 말대로 바닥에 떨어진 알은 깨지기는커녕 흠집 하나 없이 카펫 위를 굴러갔다.

순간 알현실 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허, 이게 어찌.”

“‘신의 선물’이라 불리는 건 허명이 아닙니다. 신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허면 이를 어찌 깨뜨릴 수 있단 말인가?”

자신감에 차 있다 못해 기세등등하던 황제의 얼굴에 당혹과 불안이 어렸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신의 가호를 일개 인간이 어찌 깰 수 있단 말이냐?”

“할 수 없었다면 처음부터 나서지도 않았겠지요.”

잔잔하게 미소 지은 사내가 바닥에 떨어진 알을 성의 없이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서 퍼져 나간 검은 기운이 알을 감싸자 알에서 흘러나오던 영롱한 빛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 해보시지요. 이번에는 원하시는 대로 될 겁니다.”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황제에게 알을 건네었다.

얼떨떨하게 알을 받아든 황제가 잠시 망설이다 알을 힘껏 바닥에 던져버렸다.

퍽!

신비롭고 고귀해 보이던 알이 순식간에 조각나며 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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