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벨라, 어떻게 됐어요?”
나는 조급한 마음에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나를 기다리며 차를 마시고 있던 벨라가 얼른 찻잔을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났다.
벨라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나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관에 답신을 맡겨놓았는데 라이 측에서 연락을 해왔어요.”
“거래에 응하겠다고 하던가요?”
“네. 정보값을 지불하면 세공사에 대해 알려준다고 하더군요.”
벨라가 어떻게 할지 내게 눈으로 물었다.
“원하는 대로 정보값을 지불하겠다고 해요. 단, 직접 만나지 않으면 줄 수 없다고 전해요.”
돈이야 문제될 것 없으니 부르는 대로 줄 수 있었다.
그러니 정보값을 빌미로 만남을 압박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만남을 거절하면 어떻게 할까요?”
“우선은 설득해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원하는 대로 해줘요. 여관 주변에 사람들을 붙여놓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라이에 관해 일단락되자 그제야 벨라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매튜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아이작이 카라나이트 세공에 성공했다네요.”
“정말입니까?”
“매튜가 공방 손님인 척 세공 의뢰를 맡겼는데 깨지지 않고 해냈다고 하더라고요.”
“아, 정말 다행이에요. 아가씨 말씀대로였네요.”
벨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다.
아이작 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에 내 뜻을 따라주고는 있었지만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매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최근에 아이작과 따로 접촉한 이는 없었다고 해요.”
“그럼, 라이가 말하는 세공사는 아이작이 아닌 걸까요?”
“그거야 확인해 보면 알겠죠.”
일단 라이는 우리가 아이작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세공사 정보를 거래로 요청했겠지.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나는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아이작과의 고용 계약은 어떻게 되었나요?”
벨라가 다소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이작이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고 해서 애를 먹었나 보더라고요.”
“그럼……?”
긴장한 벨라를 향해 씩 웃어주었다.
“계약은 성공했어요. 며칠 내로 황도에 올라올 거예요.”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벨라가 두 손을 모으며 감격했다.
“내 보좌관이 좀 유능해요.”
아이작은 임신한 아내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걸 원치 않아 했다.
매튜는 고향에서부터 황도까지는 물론이고 아내가 출산할 때까지 의원을 붙여주겠다며 제안을 했다.
물론 황도에 거주할 주택과 공방을 차려주기로 한 기존 제안은 유효한 상태로.
결국 아이작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조만간 황도로 올라올 예정이었다.
“아이작이 올라오면 벨라에게도 소개시켜 줄게요.”
“그 전에 공방 준비부터 마쳐야겠군요. 이거 몸이 여러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네요.”
입으로는 바쁘다며 엄살을 부리면서도 만면엔 웃음이 가득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당연하지요. 카라나이트를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잖아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건 아닌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나 몰라요.”
그랬겠지. 운 좋게 새로운 보석을 발견했으나 자본금도 기술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광산에 대한 건 언제고 소문이 퍼져나갔을 테고 누군가는 광산을 가지려고 달려들었을 테지.
아무런 뒷배가 없는 신생 상단이 광산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 구호소에서 아가씨를 만난 건 정말 천운이었어요. 아가씨께 국자를 드리길 잘했지 뭐예요.”
장난스레 웃는 얼굴 위로 호기롭게 국자를 건네던 모습이 겹쳐졌다.
“나야말로 벨라를 만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지난 회차들에서 평판은 물론 공략캐들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치러야했던 사교계의 진력나는 신경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고생을 안 해도 되니 복덩이가 넝쿨째 굴러온 거지, 암.’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꼭 성공해요.”
“물론이지요. 이번 사업, 반드시 해낼 거예요.”
벨라가 의지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벨라가 다녀간 지 며칠 뒤.
“아가씨, 오늘 온 우편물이에요.”
조이가 커다란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설마 오늘도 전부 초대장이야?”
나는 질린다는 듯 그 바구니를 쳐다보았다.
“음, 전부는 아니고 대부분?”
조이의 어색한 웃음에 혀를 찼다.
“그냥 전부라고 말해.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내가 툴툴대자 조이가 한숨을 흘리며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놓았다.
“원래도 초대장이 많았지만 하이먼 영식이 투옥되고 나서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저 초대장들은 나를 위로하거나 걱정해서 보낸 것들이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에 너도나도 보낸 것이었다.
장미 축제 때 있었던 일은 황태자가 입단속을 시켰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제페스가 나를 호수에 빠뜨려 죽이려 했다는 죄목은 재판 때문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은 제페스가 아니면 죽을 것처럼 굴었던 내가 갑자기 그와 헤어진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런 사건까지 터졌으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경쟁적으로 초대장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정보를 얻어 남들에게 자랑하고 나를 비웃으며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쯧, 남의 불운에 이러쿵저러쿵 떠들 시간에 자기들 교양이나 더 쌓으라 그래.”
“그러게 말이에요. 그 일로 아가씨께서 죽을 뻔 하셨는데 위로는 못할망정……. 다들 진짜 너무하네요.”
사교계의 생리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교계에서 로웨나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조이가 울상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슬픈 표정과는 달리 자그마한 입술에서 험악한 욕설의 향연이 펼쳐졌다.
나는 모른 척 찻잔을 들어 향긋한 차를 음미했다.
매일 같이 날아오는 초대장들을 처리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텐데 이럴 때라도 풀어야지.
초대장과 사람들에 대한 분풀이가 끝났는지 어느새 욕설의 대상이 제페스로 넘어가 있었다.
그놈은 싹수부터 노랬었다는 둥, 징역으론 부족하다는 둥, 당장 가서 사지를 찢어놔야 한다는 둥.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분풀이를 배경음악 삼으며 바구니를 엎었다.
안에 들어 있던 서한이 우르르 쏟아졌다.
“앗, 아가씨. 그거 살펴보지 않으셔도 돼요.”
내게 달려온 조이가 미리 작성해둔 초대장 목록을 내밀며 나를 말렸다.
더불어 내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서한만 추려 놓은 묶음을 건네었다.
“고마워. 나머지 초대장은 불쏘시개로 써.”
“어, 답장은 보내지 않으세요?”
“한두 장이라면 모를까 너무 많잖아. 하나같이 다 날 비웃으려는 초대인데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조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도 오는 초대장은 그냥 다 태워버려.”
“네, 알겠어요.”
금세 얼굴이 밝아진 조이가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쏟아 놓은 초대장을 한 장도 빠짐없이 바구니에 넣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조이가 추려준 서신들을 차례로 확인했다.
「피니티아 화원」
그 중에서 익숙한 화원 이름이 적힌 봉투를 집어 들었다.
‘피니티아 화원’은 카펜에서 연락할 때 사용하는 상호명이었다.
카펜과 거래할 때 첫 거래를 제외하고는 우편이나 인편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때 사용하는 상호명이 피니티아 화원이었다.
나는 소담한 꽃문양이 그려진 봉투를 열고 안에 든 카드를 꺼냈다.
거기엔 며칠 전 맡긴 의뢰에 대한 답이 적혀 있었다.
「- 여인, 보라색 머리, 가면과 후드 착용.
- 체임버 공작저로 들어감.」
손에 들려 있던 카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카펜에 부탁한 의뢰는 라이에 대해 조사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결과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체임버 공작가에서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카밀라밖에 없었다.
‘아니, 고용인들 중에도 있을지 몰라.’
아니면 가발을 착용했을 수도 있고.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달래었다.
바로 펜을 들어 카펜에 의뢰할 내용을 적었다.
카밀라를 제외하고 체임버 공작저에 라이와 비슷한 체형과 머리색을 가진 이가 있는지 찾아달란 내용이었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라이가 카밀라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추가 기울고 있었지만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체임버 공작가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되니까.’
확실해진 뒤에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겠지.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켠 뒤 의뢰 내용이 적힌 카드를 봉투에 넣었다.
수신인에는 ‘피니티아 화원’이라고 적었다.
설렁줄을 당기자 조이가 바로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이거 최대한 빨리 보내줘.”
“알겠습니다.”
조이는 수신인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의문 없이 방을 나갔다.
“하아.”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그런지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생각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 * *
그 시각, 카이스는 필립과 함께 모처럼 대공저를 벗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예전에 로웨나와 함께 정화시켰던 실레니아 호수였다.
“굳이 확인해 보셔야 하겠습니까?”
필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카이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여긴 것인지 필립이 화제를 돌렸다.
“솔직히 신께서 황가에 저주를 내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가를 아끼시지 않았습니까?”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신의 선물에 손을 댔으니 벌이 내려질 거라 예상은 했지만 대대로 속박될 정도로 강력한 저주가 내려질 줄은 몰랐다.
황가에 저주가 내려졌다는 사실은 이미 가디언의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황태자를 만났을 때 직접 확인하기도 했고.
그의 이마에는 저주의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황가에서 철저히 입단속을 한 모양이야. 아는 이가 없는 걸 보면.”
“마음 쓰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거기엔 숨기지 못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주군께서 당하신 모욕과 고통에 비하면 부족할 지경이지요.”
필립의 음성이 한겨울 북풍처럼 냉랭했다.
“더구나 저들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데다 황태자는 황가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지 않았습니까.”
필립의 빈정거림에 카이스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황가의 비사(祕史)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테니 황제는 저주의 원인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깨어났을 때 바로 달려와 용서를 구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황제는 지금까지 서신은커녕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다.
‘저주를 푸는 일이 시급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누구의 도움을 받고 있는 걸까.
이 세상에서 신이 내린 저주를 풀 수 있는 존재는 없다.
하나 저주를 완화시킬 수는 있는 존재는 딱 한 명 있었다.
그를 떠올린 카이스의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저들을 가여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목숨을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지난 백 년의 인내를 모두 끌어다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잇지 않은 뒷말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필립의 표정도 가라앉았다.
두 사람 사이로 앙증맞은 하얀 꽃잎이 바람을 타고 느릿하게 지나갔다.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그들의 발길이 멈춘 곳은 실레니아 호수 앞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군요.”
늘 고저 없이 무뚝뚝한 필립의 음성에 옅은 흥분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