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아카라다.”
바로 뒤따라온 것인지 옆에서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먼저 가버렸다고 혼내지는 않을까 싶어 힐끗 눈치를 보았으나 그는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무기를 꺼내지 않고 뭐하나.”
그의 질책에 재빠르게 해머를 소환했다.
쿵쿵쿵.
땅의 진동이 점점 커지고 이내 고목들 사이로 멧돼지와 늑대를 섞어 놓은 마수가 나타났다.
일반 늑대의 5배 정도로 큰 몸집을 보니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훈련 때 엄청 아팠었지.’
실제로는 그보다 100배는 더 아플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뼈가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길게 찢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노란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눈싸움 후 아카라가 덤벼들기 시작했다.
아래턱에 솟아나 있는 무시무시한 송곳니가 나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퍽, 퍽.
모의 훈련을 할 때마다 레벨이 올랐음에도 아카라는 한 번에 처리되지 않았다.
한 번 공격을 받고 밀려난 아카라는 더욱 사납게 공격해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공이 내 뒤를 봐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1차와 2차 공격 사이에 끼어든 다른 놈들 때문에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을 것이다.
『아카라 처리(3/350)』
아카라를 처리할 때마다 시스템창에서도 카운트가 되었다.
어느덧 그 숫자가 100을 훌쩍 넘겼을 때 메시지가 떴다.
『행운의 주사위 스킬 발동!
마수의 결정석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싸, 결정석이다.’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진 메시지에는 분명 결정석이라고 쓰여 있었다.
해머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필요한 결정석 수는 3개.
이제 한 개만 더 찾으면 돼.
‘좋았어. 결정석 창고들아, 내게 결정석을 내 놓아라.’
결정석에 눈이 벌게진 나는 미친 듯이 해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러자 레벨 업 메시지가 짧은 간격으로 계속 떴다.
330, 331 ……340 ……349, 350.
드디어 목표치 350이 되자 퀘스트 1차 완료 메시지가 떴다.
나는 대공에게서 살짝 등을 돌린 뒤 인벤토리에서 퓨릭서를 꺼내 바닥에 쏟아버렸다.
내가 서 있는 자리부터 진득한 검은 액체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해머를 늘어뜨리며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와, 못해 먹겠다.”
아핀트 때와 고작 50마리 차이인데 꽤나 체력 소모가 심했다.
결정석을 향한 집착이 아니었다면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것이다.
‘에이, 결국 결정석은 못 얻었네.’
한 개만 더 찾으면 되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고개를 드니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우중충하던 하늘이 맑게 개어있었다.
그것도 잠시, 기다란 그림자가 내게로 뻗어졌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내게 다가오는 대공이 보였다.
“스승님, 제 말이 맞죠? 이번엔 다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물론 대공의 도움을 받은 탓이겠지만 레벨은 내 노력으로 올렸으니 뻔뻔하게 웃었다.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아무렇지 않다고 의기양양하게 쳐다보자 그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샅샅이 내 몸을 살피는 시선이 상당히 집요했다.
그러다 갑자기 불쑥 나를 안아 들었다.
“어? 스승님?”
이 사람이 뭐하는 거지?
당황스럽게 올려다보니 무심한 눈초리가 닿아왔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거 아닌가?”
“네에?”
“안아 달라고 두 팔을 뻗었지 않나.”
네에?
아니, 그건 다친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잖아.
“여전히 체력이 형편이 없군.”
“아닌데요.”
내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마수 350마리는 거뜬히 처리한다고.
아무리 항변해도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인지 대공은 눈썹만 까딱였다.
“우긴다고 없던 체력이 생기는 건 아니다.”
“진짜로 저 멀쩡해요.”
대공이 어리지 않다고 우기는 아이를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팔을 내민 건 괜찮다는 걸 보여드리려고 그런 거란 말이에요.”
그제야 대공은 내 말을 좀 믿는 듯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당황한 낯은 아니었다.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면 서 있을 기운도 없는 것 아닌가.”
나는 힐끗 대공의 얼굴을 살폈다.
나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아카라를 처리했을 텐데 호흡이 가쁘기는커녕 이마에 땀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그래, 내가 개복치처럼 보일 만 하네.’
결국 내가 먼저 포기하고 말았다.
맑은 정신일 때 처음 안겨보는 품은 생각보다 편하고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몸이 찬 편이라 그런지 나보다 높은 체온이 따뜻해서 좋았다.
커다란 핫팩을 안고 있는 기분에 긴장이 절로 풀렸다.
나는 대공의 품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이동 스크롤 하나 아낀다고 생각하지 뭐.
대공은 나를 힐끔 내려다보더니 말없이 신술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대공저로 돌아온 그는 나를 침대에 내려주었다.
갑자기 몸을 데워주던 온기가 멀어지자 순간 아쉬움이 들었다.
“힘들면 쉬었다 가도 된다.”
서늘함이 느껴져 팔을 문지르고 있으니 대공이 툭 말을 내뱉었다.
“아니에요. 바로 가봐야죠.”
마음 같아서는 잠시 눈을 붙이고 싶지만 그랬다간 집에서 걱정할 것이다.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대공은 그렇게 하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휴우.”
퀘스트 목표치도, 난이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뻐근한 팔을 두드리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퀘스트 ‘삼림지대 무법자를 잡아라!’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드루이드의 과녁이 지급됩니다.』
‘드루이드의 과녁?’
처음 보는 물품에 아이템을 켰다.
거기에는 과녁판이 새겨진 외알 안경이 새로 들어와 있었다.
『아이템 : 드루이드의 과녁
종류 : 유물
적중률 : 100%
쿠올라 삼림지대를 지키던 드루이드의 유물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녁을 통해 목표 지점을 조준하면 그대로 무기를 적중시킬 수 있습니다.
목표 지점을 타격한 무기는 자동으로 주인에게 되돌아옵니다.』
‘와, 횡재했네.’
안 그래도 장거리 공격엔 취약한 해머의 단점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던 참이었다.
문득 매일 체력 훈련에 있던 과제가 떠올렸다.
과녁 맞히기.
이 아이템을 위한 훈련이었나?
황당한 과제라 생각했었는데 시스템도 다 뜻이 있었군.
오해해서 미안.
드루이드의 과녁은 대공과 모의 훈련을 할 때 미리 사용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아이템 창을 정리하고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방을 나가니 그냥 가버렸을 줄 알았던 대공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어?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
대공이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그냥 가 버리신 줄 알았거든요.”
“배웅은 해야지.”
무심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
뭐, 해준다는데 사양할 이유는 없지.
“그럼, 마차 앞까지 부탁드려요.”
손을 내밀자 잠시 내 손을 쳐다본 대공이 에스코트를 위해 팔을 내주었다.
“널 호수에 빠뜨린 범인은 어찌 되었지?”
“징역형을 받고, 가문에서도 쫓겨났어요.”
“그렇군.”
단순히 재판 결과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담백한 어조였다.
“이제는 만날 일이 없다 생각하니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해요.”
“많이 좋아했었나?”
절대, 아니요.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대신 로웨나로서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잘생기고 상냥한 사람이 저를 좋다고 해주니 마음이 끌리긴 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제페스에게 상처받은 척 살짝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위협까지하다니. 저를 좋아하긴 했을까요?”
처연한 듯 흐리게 미소 지으며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내 뜻을 알아챘는지 대공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가라.”
마차 앞까지 데려다 준 그는 평소와 달리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나를 배웅하려는 사람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나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며 태연하게 대공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이틀 뒤에 훈련하러 올게요.”
대공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마차가 출발한 뒤 창문을 통해 뒤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것이 기분이 이상했다.
* * *
로웨나와 쿠올라를 다녀온 날 밤.
대공은 필립과 함께 어딘가로 향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황도 북쪽에 위치한 타이룬 감옥.
그곳에서도 귀족들만 수용된 동관이었다.
감옥 내부로 들어서니 살갗이 움츠러들 만큼 한기가 밀려들었다.
서관과 달리 청소가 잘 된 편이긴 한지 썩은 내가 심하진 않았다.
다만 일정한 간격으로 벽에 달린 기름등 탓에 매캐한 탄내가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간수를 비롯해 갇혀 있는 죄수들 중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다.
신술로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인가?”
나지막한 물음에 필립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감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죄인들의 영혼에서 나는 악취 때문이었다.
몇 발짝 더 걸어간 필립이 어떤 감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어떤 사내가 더러운 몰골로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있는 작은 창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와 사내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제 색을 잃은 은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대공이 가볍게 손짓하자 감방을 중심으로 결계가 둘러졌다.
“제페스 하이먼.”
대공의 부름에도 제페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잠든 얼굴에서도 고단함이 읽혔다.
필립이 발로 툭툭 건드리자 그제야 제페스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누구냐!”
제 감방 안에 들어온 낯선 사내들을 확인한 제페스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윽.”
상처를 입고 있던 모양인지 갑작스런 움직임에 신음을 내며 몸을 웅크렸다.
“네가 제페스 하이먼인가?”
감방을 울리는 저음에 제페스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항상 촉촉하던 입술은 다 터져 피딱지가 않아 있었고 반짝반짝 윤이 나던 얼굴엔 얼룩덜룩 멍이 들어 있었다.
“누구냐! 여긴 왜 온 거지?”
항상 웃음기가 어려 있던 눈동자에는 독기만이 남아 있었다.
“이봐, 간수. 여기 침입자들이 있는 거 안 보여?”
제페스가 감방 쇠창살 너머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 여긴 제페스가 창살로 다가가 몇 번이고 간수를 불렀지만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심지어 바로 옆 감방에 있는 죄수들조차도 깊은 잠에 빠진 듯 반응이 없었다.
“이게 대체…….”
삐걱거리며 대공을 향해 고개를 돌린 제페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늘색 눈동자도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난 죽기 싫어.”
그가 엉덩이로 뒷걸음치며 돌벽에 바짝 붙었다.
“널 죽일 생각은 없다.”
혹시나 살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제페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그럼 여긴 왜 온 거지? 뭐하는 놈들이야!”
“처벌이 미흡한 것 같아서.”
“뭐?”
“감히 내 제자를 죽이려 했으니 제대로 된 대가를 치러야겠지.”
“제자? 무슨 소리야?”
“로웨나 케인.”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크게 부풀어 올랐던 눈동자가 이내 독기를 품었다.
악에 받쳐 소리치기 직전.
갑자기 하늘색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제페스를 향해 대공의 나지막한 명령이 이어졌다.
“잠이 들 때마다 악몽이 이어질 것이다. 평생 속죄해라. 내 제자를 아프게 한 만큼.”
풀썩.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제페스가 모포 위로 쓰러졌다.
무감하게 그를 쳐다보다 몸을 돌린 대공이 작게 혀를 찼다.
“마수 훈련보다 사람 보는 안목부터 길러줘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