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제페스에 대한 처벌은 빠르게 결정되었다.
제페스를 구하기 위해 하이먼 백작가에서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장범으로 잡힌 데다 제페스가 나를 호수로 미는 걸 봤다는 애런의 증언 때문에 죄를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황태자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하이먼 백작가도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제페스는 살인 미수죄로 20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가문에서도 제명되었다.
“순순히 물러났으면 좋았을 텐데.”
참으로 짜증나고 질긴 인연이지만 제페스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처음부터 기대치가 없었던 지라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
다만 지난 회차 모두 나와 헤어진 뒤에도 그럭저럭 잘 살았던 터라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어쩌다 모든 걸 잃게 된 것인지.
아주 조금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응접실로 모셔.”
기다리던 손님이라 가볍게 방을 나섰다.
“벨라, 오랜만이에요.”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벨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따라 하나로 묶은 파란색 머리카락이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몸은 좀 어떠세요?”
“들었어요?”
“네. 하이먼 영식 일로 황도가 시끌시끌해요. 헤어졌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벨라가 시원스레 뻗은 눈매를 찌푸렸다.
“그러게요. 내가 정말 만만해 보였나 봐요.”
나는 벨라의 맞은편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사고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만에 하나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겨도 사업은 우리 가문에서 끝까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 분이 사람 이상하게 만드시네. 제가 아무리 상인이라지만 동업자의 안위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진 않아요.”
벨라가 팔짱을 끼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내가 벨라에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니 기쁘네요.”
빙긋 웃어주자 벨라가 피식 웃었다.
“의논하고 싶은 게 있다면서요?”
벨라는 요즘 베히른 영지에 있는 카라인 지역에서 새로운 보석인 카라나이트를 채굴하고 있었다.
바빠서 눈코 뜰 새 없다던 사람이 갑자기 급히 의논할 사안이 있다며 황도로 올라온 것이었다.
“카라나이트 세공에 문제가 생겼어요.”
“심각한 문제인가요?”
나는 벨라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벽개성이 강해서 도저히 세공을 할 수가 없어요. 보석은 세공이 생명인데 이를 어쩌죠?”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던 낯빛에 그늘이 졌다.
카라나이트는 투명도가 높고 색상이 아름다운데다 희소성까지 갖춰 보석으로서 가치가 높지만 딱 하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벽개성이 강하다는 점이었다.
벽개성이란 어떤 충격을 받았을 때 특정한 방향으로 쪼개지는 성질을 말한다.
다른 보석들도 벽개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카라나이트는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강한 편이었다.
조금만 손을 잘못 대도 깨져 버리니 세공이 어려울 수밖에.
세공을 하지 못하는 보석은 투박한 돌덩이에 불과한 것.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면 이 사업은 접어야 했다.
채굴 비용은 모두 내가 대고 있으니 손실 또한 고스란히 내 몫이 될 터.
하지만 난 이 문제의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카라나이트가 벽개성이 강하긴 하지만 세공이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혹시 해결 방법을 아시는 건가요?”
벨라는 내게 물으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날 무시해서라기보다 보석 세공은 전문적인 분야이니 관련 지식이 부족할 거라 여기는 것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세공사를 찾으면 돼요.”
“설마 지금 그걸 해결책이라고 말씀하신 건 아니죠?”
벨라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죠.”
“그냥 한 번에 말씀해 주시지 뭘 그렇게 뜸을 들이고 그러세요? 사람 궁금하게.”
툴툴대는 벨라를 향해 빙긋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카라나이트와 같이 까다로운 보석을 세공할 수 있는 뛰어난 실력의 세공사를 알아요.”
“정말이요?”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아이작 팬튼이라는 세공사예요.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연마 기술을 가진 마스터라고 들었어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예요?
“독특한 장신구가 없나 수소문하다 보니 자연히 세공사에 관한 정보도 들려오더라고요.”
보석이든 드레스든 늘 남들과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로웨나이니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벨라는 내 설명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요. 이름만 들었던 터라 지금부터 찾아봐야 해요.”
사실 아이작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카펜을 통해 알아낸 상태였다.
그는 베히른 영지와 멀리 떨어진 남부 지방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시골 공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신의 손’이라고 불리며 유명해지게 된 것은 카라나이트 때문이었으니까.
아카르트 제국은 보석 연마 기술이 별로 발전하지 않아서 연마 방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주로 8면으로 연마하거나 테이블 컷 방식을 사용했고 발을 이용해 세팅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카라나이트를 세공하게 되면 이가 빠지거나 깨지기 쉽다는 것.
아이작은 이름을 알리기 전에도 이미 기존의 연마 기술에서 한 발 앞선 24면체로 이루어진 로즈 컷 방식을 개발한 상태였다.
카라나이트 세공을 맡게 된 그는 기존 방식으로는 연마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연마 방식을 개발한다.
바로 쿠션 컷과 오벌 컷.
쿠션 컷은 사각 형태의 스톤 측면에 약간의 커브를 더한 방식이고 오벌 컷은 타원형 형태에 로즈 컷 방식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또한 그는 카라나이트의 벽개성을 고려해 발을 이용한 세팅이 아니라 보석을 감싸서 보호하는 셋팅 방식을 시도했다.
결과는 대성공. 그 덕분에 카라나이트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다.
지난 회차에서는 벨라에게 투자한 애플린 자작이 수소문 끝에 어렵게 찾아낸 사람이었다.
“어디에 거주하는지 아시게 되면 제게 알려주세요. 제가 찾아가서 실력을 확인해 볼게요.”
“알겠어요. 아이작에 대한 정보를 얻는 대로 바로 연락할게요.”
기다렸다는 듯 바로 정보를 주면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시간차를 두고 전해줄 생각이었다.
이제 좀 희망이 보인다 생각했는지 벨라는 그제야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나는 차와 함께 나온 견과류 쿠키를 집어 오도독 씹어 먹었다.
“저,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차로 목을 축인 벨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수상쩍어서 무시하려고 했는데 아가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
“편하게 말해 봐요.”
“얼마 전에 제게 서신 한 통이 왔었어요.”
벨라가 가방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게 건네주었다.
발신인에는 ‘라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꺼내자 단정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세공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나요? 뛰어난 실력의 세공사를 알고 있어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리로 연락주세요.」
나는 서신 내용을 읽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채굴을 시작했으니 알음알음 소식이 알려졌을 테고 일자리를 구하는 누군가가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후 세공 문제가 생기자 이 서신이 달리 보였다고 덧붙였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봤나요?”
“안 그래도 황도에 올라오는 길에 혹시나 싶어 서신에 적힌 주소로 가봤어요.”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돌로레스라는 여관이더라고요. 주인장은 ‘라이’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서신 부탁만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한 마디로 ‘라이’라는 이름 앞으로 서신이 오면 보관하고 있다가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 부탁을 하러 누군가 오긴 왔을 거 아니에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후드까지 쓰고 있어서 인상착의를 알 순 없었대요. 다만 목소리는 여자였다고 하더라고요.”
여자란 말에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과한 추측이라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떨칠 수가 없었다.
“벨라, ‘라이’라는 사람을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만약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세공사에 대해 알고 있다면 우리 사업을 방해할 가능성도 있어요.”
라이라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니 여러 가지로 대비를 해야 했다.
“아이작을 찾는 일은 우선 매튜에게 맡길게요. 벨라는 라이라는 사람과 접촉해 봐요.”
“그럴게요.”
부디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벨라와 이야기를 마친 뒤에는 바로 매튜를 불러 아이작에 대한 일을 맡겼다.
카펜에서 알아온 주소를 넘기며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 고용 계약을 마무리 지으라고 지시했다.
더불어 우리 이전에 아이작에게 접근한 사람은 없었는지도 알아보라고 전했다.
매튜는 다음날 아이작을 만나기 위해 남부 지방으로 떠났다.
* * *
『퀘스트> ‘삼림지대 무법자를 잡아라!’
쿠올라 지역의 무법자 아카라를 몰아내고 천혜의 자연보고라 불리던 삼림지대의 영광을 되찾게 해주십시오.
목표 1 : 아카라 처리(0/350)
목표 2 : 쿠올라 삼림지대 정화
보상 : 드루이드의 과녁』
벨라와 매튜가 바쁘게 다닐 동안 내게는 퀘스트가 떨어졌다.
퀘스트를 받자마자 약속대로 바로 대공에게 연락을 취했고 다음날 나는 대공저로 향했다.
정문을 통과한 뒤 타고 온 마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피리를 불었다.
붉은 피리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작동은 제대로 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눈앞에 대공이 나타난 것을 보면.
“스승님!”
반갑게 외치자 대공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은 기운이 넘치는군.”
“마수를 잡으러 가는데 기운이 없으면 되나요? 가서 잔뜩 힘을 써야 하는데.”
“아카라라면 이미 훈련을 해 봤으니 어렵지 않을 거다.”
“모두 스승님 덕분이죠.”
대공을 향해 방싯 웃었으나 돌라오는 거라고는 무감한 시선뿐이었다.
에잇,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세계관 최고 미인이 웃어주는데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안 할 수 있어?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호감도를 생각하며 얼굴엔 미소를 유지했다.
“스승님, 방 하나만 빌려주세요. 옷을 갈아입어야 하거든요.”
퀘스트용 바디슈트는 인벤토리에서 꺼내야 하기에 직접 갈아입어야 했다.
대공은 별 말 없이 나를 빈 방으로 데려다 주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전신 바디슈트를 꺼내 입고 부츠와 장갑까지 착용을 마쳤다.
똑똑.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붉은 비단과 같은 장발이 보였다.
“다 갈아입었나?”
“네. 들어오세요.”
“꼭 그 옷을 입어야 하는 건가?”
어째서인지 내게서 살짝 시선을 비껴 내린 대공이 물었다.
“저는 스승님처럼 신술로 몸을 보호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내 바디슈트가 마음에 안 드는지 대공이 작게 혀를 찼다.
‘자기가 입을 것도 아닌데 왜 저런담.’
대공 몰래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출발할 건가?”
“네. 이동 스크롤을 찢으면 바로 쿠올라에 도착하게 될 거예요.”
나는 미리 인벤토리에서 꺼내 놓았던 이동 스크롤을 대공에게 보여주었다.
“그럼, 가지.”
“어? 같이 가시게요?”
대공이 뭐가 문제냐며 눈썹을 슥 들어올렸다.
“아카라는 이미 모의 훈련을 해봐서 잘 처리할 수 있어요.”
“실전은 더 많은 마수를 상대해야 하지 않나.”
“혹시 제가 걱정되어서 같이 가주시는 거예요?”
에이, 설마.
바로 앞에서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얼굴인데 걱정은 무슨.
“네게서 알아내야 할 것들이 아직 남았다.”
네에, 네에. 역시 그러시군요.
떨떠름하게 서 있자니 나를 힐끗 보는 대공의 시선이 느껴졌다.
“너는 꼭 나가기만 하면 다쳐오지 않나.”
“저 실력 많이 늘었어요. 이번에는 다치지 않을 거예요.”
그 사이 매일 체력훈련이랑 대공과의 모의 훈련으로 벌써 레벨이 14로 오른 상태였다.
“마수를 상대할 때 자만은 금물이다.”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스승님! 저 먼저 가볼게요.”
대공의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것 같아서 얼른 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순식간에 눈앞의 풍경이 달라졌다.
검은 땅, 폴루티아가 되어버린 쿠올라.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찬 삼림지대로 유명했다던데 지금은 부러진 고목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폴루티아 특유의 검은 액체로 뒤덮인 탓인지 전체적으로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역시 기분 나쁜 곳이야.”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쿵쿵.
땅이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