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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36)화 (36/140)

36화

이대로 있다간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내뱉고 말 것 같아 부드럽게 애런을 떼어냈다.

“아, 미안. 너 힘들 텐데.”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그제야 날 오래 세워두었다는 것을 깨달은 애런이 미안해하며 나를 얼른 소파에 앉혔다.

“많이 걱정했어?”

“응. 네가 잘못 되는 줄 알고…….”

애런은 감정이 북받치는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네가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어.”

“주변을 순찰하던 중이었어. 말소리가 들리길래 호수로 향했는데 네가…….”

“그럼, 대공 전하께서 나를 구하신 것도 보았겠네.”

“……그래.”

대공이 언급되자 애런이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처음에는 너를 납치해 간 줄 알았어. 대공 전하가 누구인지 몰라서.”

대공이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도, 최근에 깨어난 것도 황족과 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 했다.

다른 이들은 대공이 깨어난 순간 원래부터 있었던 존재로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된 것 같았다.

다만 깨어난 이후에 대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놀랐겠네.”

“…….”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애런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아마 당황하고 놀랐겠지.

신분이 불명확한 자가 갑자기 나타나 나를 데려간 것도 모자라 이능력까지 사용했으니.

“대공 전하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내 스승님이셔.”

“스승?”

“응, 전하께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거든.”

“왜 ……내겐 말 안 했어?”

언뜻 애런의 낯에 서운함이 어렸다.

“얼마 되지 않았어. 네가 근위대에 입단한 뒤로는 서로 바빠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잖아.”

“아…….”

그가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었다.

“대공 전하와는 언제 만나게 된 거야? 대외 활동을 전혀 안 하시는 분이잖아.”

조심스러운 물음과는 달리 나를 살피는 시선은 꽤나 세밀했다.

왜 그러는 걸까?

애런의 의도가 명확히 잡히지 않았지만 일단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에일숲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

“에일숲에?”

“응. 처음에는 나도 전하이신 줄 몰랐어. 대화를 나누다보니 알게 되었고 내가 부탁을 드렸어. 스승이 되어 달라고.”

“네가?”

얼마나 놀랐으면 되묻는 음성이 살짝 엇나가 있었다.

멍청한 데다 머리 쓰는 일이라면 질색하던 로웨나가 갑자기 가르침을 청했다고 하니 놀랄 만도 하지.

그렇다고 저렇게 얼빠진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지 않나.

애런도 제가 실수했다 생각했는지 작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변명했다.

“아니, 그게, 네 말을 못 믿는 건 아니고.”

“알아. 나답지 않은 행동이지.”

“로나, 그게…….”

내가 정곡을 찌르자 애런이 어쩔 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배우는 게 귀찮고 싫었는데 요즘엔 생각이 달라졌어.”

“솔직히 베히른에서 네가 운동하는 거 보고 많이 놀랐었어.”

“운동도 처음엔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어. 그런데 제페스를 생각하니 오기가 생기더라.”

제페스의 이름이 나오자 일순 애런의 벽안이 날카로워졌다.

“계속 하다 보니 재미가 붙고, 성취감도 생겼어. 그러고 나니 다른 것도 배워보고 싶어지더라고.”

“그랬구나.”

애런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기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의 제자가 되면 내 평판도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었고.”

헤어지던 날 제페스가 내 평판을 가지고 무시했던 일을 덧붙이자 애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정도면 납득하겠지.’

내가 갑자기 달라진 점과 대공과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도록 일부러 제페스 이야기를 언급한 것이었다.

제페스에 대한 분노가 깊게 생각하는 걸 방해할 테니까.

“내 평판에도 불구하고 전하께서 제자로 받아들여 주셨으니 다행이었지.”

“네가 어때서.”

애런이 불만스런 어조로 말했다.

“내 평판이 어떤지 잘 알잖아.”

“그건 사람들이 널 잘 모르니까 그런 거야.”

로웨나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 텐데 그래도 친구라고 감싸는 모양이었다.

친구.

그 단어에 새삼 입안이 씁쓸해졌다. 

1회차 때 제단에 나를 버려두고 뒤돌아서던 애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혹여 이런 감정이 드러날까 싶어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네가 친구라서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거야.”

나는 일부러 장난스레 말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애런은 그런 거 아니라며 반박했지만 난 웃음으로 넘겼다.

“저기, 대공 전하께서 왜 너를 대공저에 데려가신 거야? 황궁에서 의원을 불렀어도 되잖아.”

“나를 배려하신 거겠지. 내가 호수에 빠졌다는 게 알려지면 어떤 말이 나올 지는 뻔하니까. 더구나 제페스까지 엮인 일이잖아.”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내가 있었잖아. 충분히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어.”

“대공 전하께서는 널 모르시잖아. 믿고 맡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으셨겠지.”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 가셨을 때에라도 널 보내주셨어야지.”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어투에 그제야 아까부터 들던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대공과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 당하는 느낌이 들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착각이 아니었어.’

애런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해 정중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일면식도 없는, 더구나 친구인 나를 구해준 대공에게 저리 불만을 표할 리가 없었다.

‘왜 대공을 향해서 날을 세우는 거지?’

애런의 태도가 이해할 수 없지만 일단 지금은 그의 오해를 풀어주는 게 우선이었다.

대공과 애런이 대립해봐야 두 사람 모두의 호감도를 높여야 하는 내게는 이득될 게 없었다.

“그때는 내가 깨어나지 못했을 때라서 그러신 거야.”

나는 애런의 기분을 달래주려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 내가 깨어나면 황궁으로 데려다 주신다고 약속하셨대. 그 약속을 지켜주셨고.”

 왜 내가 이런 변명까지 해야 하는 건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빨리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애런의 옆에 앉았다.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애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걱정 많이 했지? 미안.”

나보다 큰 손을 도닥이며 눈꼬리를 늘어뜨리자 당황한 애런이 안절부절못했다. 

“네가 왜 사과를 해? 이게 다 하이먼 영식 때문인 걸.”

“도망가려는 제페스를 붙잡은 게 너라며?”

“그냥 옆에 있길래 붙잡아서 근위대에 넘긴 것뿐이야.”

“만약 어제 네가 사고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제페스를 처벌할 수 없었을 거야.  

아마 그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도망간 뒤 나와 있었던 모든 일을 부인했겠지.

“고마워. 네 덕분이야.”

“순찰을 돌다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야. 내가 아니라 다른 기사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야.”

애런이 겸연쩍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니까 나를 알아보고 바로 달려왔던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밀회를 즐기는 연인인 줄 알고 모른 척 했을 지도 몰라.”

애런도 반박할 말이 없는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있어서 든든해.”

애런을 향해 웃어주자 그제야 그도 응접실에 들어와 처음으로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도 바쁠 텐데 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네가 괜찮은지 걱정돼서 어제 한숨도 못 잤어.”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말투에 투정이 섞였다.

“나는 괜찮으니까 염려하지 마. 아버지 오시면 바로 백작저로 갈 거야.”

“백작님께서 어제 걱정 많이 하셨어.”

“응, 아까 나보고 우시더라.”

“그러실 줄 알았어.”

애런이 작게 웃었다.

“비번인 날 백작저로 갈게.”

“바쁜 거 아니야?”

“어차피 쉬는 날인 걸. 숙소에만 있어서 그런지 요즘 백작저의 오리구이가 자꾸 생각나더라.”

“주방장에게 미리 일러둘게. 네가 온다고 하면 아마 반가워할 거야.”

애런의 방문이 달갑지는 않지만 호감도 10%를 달성해야 하기에 흔쾌히 받아들이는 척 했다.

“다들 오랜만에 보겠네. 기대된다.”

“나 때문에 근무 중에 온 거지? 얼른 가 봐.”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다음에 봐.”

“그래.”

나는 애런을 배웅하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탁.

문이 닫히고 억지로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애런이 나가기 전 머리 위로 보인 호감도는 9%였다.

그 사이 만난 일도 없는데 호감도가 올라가 있었다.

내가 사고를 당해서 그런가?

어제 오늘 나를 걱정하며 호감도가 오른 모양이었다.

‘10%, 얼마 남지 않았어.’

* * *

탁.

응접실 문이 닫히고 애런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복도에 이르자 벽에 몸을 기대었다.

‘내가 뭘 한 건지.’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스스로도 왜 대공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해지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호숫가에서 처음 대공을 만났을 때는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니 경계하고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그의 신분도 로웨나를 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대련 상대가 꼼수를 쓰는 바람에 시합에서 진 기분이었다.

짜증과 화가 나는 것도 모자라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처음 대공이 로웨나를 안고 호수에서 나오는 걸 봤을 때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로웨나가 잘못 되었을까봐.

뒤이어 대공이 로웨나를 데리고 사라졌을 때는 걱정과 함께 황망한 마음이 들었었다.

마치 아버지로부터 처음 선물 받았던 검을 도둑맞은 것처럼.

로웨나를 데려간 자가 대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치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당신이 뭔데.

내가 로웨나의 친구이고 가족 다음으로 제일 가까운 사람인데.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로웨나에게 대공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었던 것은.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하는 꼴이 꼭 바람난 여자 친구를 의심하고 질투하는 남자 같지 않은가.

스스로도 생경한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너무 놀라서 그런 걸 거야.’

로웨나가 죽을 뻔 했으니까.

대공의 품에서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던 로웨나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금 손끝이 차가워졌다.

언제나 씩씩하던 로웨나가 쓰러진 모습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래, 그래서일 거야.’

애런이 스스로를 세뇌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심란한 마음이 정돈되지 않았다.

‘우선 할 일부터 하자.’

무엇이든 집중할 거리가 생기면 번잡한 마음도 가라앉겠지.

‘하이먼 영식부터 처리해야지.’

어제 대공저에서 돌아온 이후로 애런은 계속 제페스를 심문했다.

제페스는 지금까지도 모든 죄를 부인하고 있었다.

로웨나를 겁박한 적도 없고 그녀를 호수에 떠민 일도 없다며 뻔뻔하게 굴었다.

다행히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바람에 대공의 목소리만 얼핏 들었을 뿐 그를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제페스는 지금까지도 다른 기사가 로웨나를 데려간 줄 알고 있었다.

그의 주장 중 가장 황당했던 건 로웨나가 때리는 바람에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비열한 놈.’

로웨나가 아무리 체력훈련을 했기로서니 제페스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때릴 수 있겠는가.

제 죄를 감추고 로웨나를 가해자로 몰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왜 하고 많은 남자들 중에 겉만 번지르르한 그런 놈을 고른 것인지.

제페스가 로웨나와 함께 있는 걸 볼 때마다 속이 터지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느라 힘들었었다.

‘잘됐어. 지금까지 로나를 모욕하고 이용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애런의 단정한 입매가 일순 사납게 비틀어졌다.

감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분노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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