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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35)화 (35/140)

35화

“하이먼 영식은 어떻게 되었어요?”

“내가 널 구했을 때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해머에 맞긴 했나보네. 쌤통이다. 

몇 대 더 때려줬어야 했는데. 아쉽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제가 거기 있는 걸 아셨어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내가 호숫가에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황궁도 아니고 대공저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내가 호수에 빠진 걸 안 거지?

‘아리파 산에서 쓰러졌을 때도 구해줬었지. 그때도 내가 거기 있는 걸 아무도 몰랐는데.’

그때는 죽다 살아난 게 감격스러워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여러 모로 미심쩍었다.

대공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설마 제게 위치 추적 마법 같은 걸 걸어놓으신 건 아니죠?”

그냥 농담 삼아 말한 것뿐이었는데 대공의 눈썹이 움찔했다.

“진짜예요? 그럼, 지금까지 제가 어디 있는지 몰래 확인하고 미행하고 그러신 거예요?”

와, 배신감 느껴지네.

그래서 나를 순순히 보내준 거였어?

“아니다.”

“뭐가 아니에요? 이제 와서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내가 눈을 뾰족하게 뜨자 대공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위치 추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다만.”

“다만 뭐요?”

“보호술을 걸어 놓았을 뿐이다. 네가 다치면 안 되니.”

어쩌면 그럴 수 있으냐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따지려던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보호술이요?”

“그래. 네가 다치거나 위험해지면 내게 신호가 오도록 되어 있다.”

“그런 건 왜?”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 않나. 그대가 나를 어떻게 깨운 것인지.”

아, 그렇지. 그에겐 아직 풀지 못한 의문들이 남아 있었지.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면서도 이상하게 뭔가 찝찝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남아 있는 기분이 든 단 말이야.’

힐끗 대공을 보니 그는 사실대로 말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건가?’

“그리고 ……너는 내 제자이지 않나.”

예상치 못한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내가 스승이라고 부르긴 했어도 그건 내 마음대로 붙인 호칭일 뿐.

대공은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얼떨떨하면서도 기쁨이 차올랐다.

제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것도 아닌데 입꼬리가 제멋대로 실룩거렸다.

“스승님, 진짜 제자로 인정해 주시는 거예요?”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 널 가르친 줄 아나?”

“감사합니다. 저, 열심히 배울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대공의 팔에 찰싹 매달리자 움찔거린 그가 싸늘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떨어져라.”

내가 정말 싫으면 팔을 내치면 될 텐데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내게 명령만 내렸다.

그 모습에 슬그머니 장난기가 솟아올랐다.

“싫어요. 저는 평생 이렇게 딱 스승님 옆에 붙어 있을 거예요.”

어리광을 부리듯 대공의 팔에 매달리며 고개를 젓자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메인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공이 꼭 필요하니 절대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이 불쌍한 제자를 내치지 말아주세요. 스승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 언제 어디서 마수들의 밥이 될 지도 몰라요.”

마수들을 생각하니 절로 울적해져 굳이 표정을 꾸밀 필요도 없었다.

“네? 스승님~.”

대공의 옷깃을 붙잡은 채 흔들어 대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제자란 말 못 들었나? 내칠 생각 없으니 이거 놓아라.”

그가 팔짱을 풀며 슬쩍 내 손을 떼어냈다.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철부지 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에 나는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는 어디 가서 허접한 놈들에게 당하고 오지 마라.”

갑자기 정색하며 던진 말에 순간 긴장이 되었다.

질책하는 건가? 아니면 ……걱정인가?

“최하급 마수에 당하고 오질 않나. 덜 되먹은 인간에게 당하고 오질 않나. 네가 내 제자라는 게 부끄럽다.”

뭘 또 그렇게 말씀하시나.

내가 조금, 아주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제 레벨 13이 넘은 지 얼마 안 되는데 이 정도면 선방했지.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는지라 두 손을 모으며 방긋 방긋 웃었다.

“열심히 훈련할게요. 그러니 예쁘게 봐주세요.”

대공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 너무 오버했나?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낼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샐쭉하게 대공의 뒤통수를 흘겨보았다.

“황태자가 왔다 갔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요? 왜요?”

“네가 호수에 빠진 일을 알게 된 것 같더군.”

“전하께서 절 바로 데려오셨으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을 텐데요.”

제페스가 스스로 제 잘못을 이실직고했을 리는 절대로 없을 테니까.

“그 자리에 근위대원이 하나 있었어.”

“근위대요? 제가 정신을 잃기 전만 해도 없었는데.”

“금발의 기사였다.”

금발이라는 말에 일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애런은 아니어야 해.’

“스승님, 혹시 그 기사가 누구인지 아세요?”

“모른다. 다만…….”

대공이 답지 않게 말하기를 주저하며 나를 살폈다.

왜 저러나 싶다가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널 잘 아는 자 같더군. ‘로나’라 부르는 걸 보니.”

‘이런.’

미처 새어나가지 못한 탄식이 입안에서 터져 나왔다.

하고많은 기사들 중에 왜 하필 애런이냐고.

애런과는 좋은 일로 마주해도 감정적으로 힘든데 걱정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그 자와 친한 게 아니었나?”

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인지 대공의 눈초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는다면 아마 제 소꿉친구일 거예요.”

“소꿉친구.”

대공이 왜인지 그 단어를 곱씹듯이 중얼거렸다.

“아, 혹시 신술을 사용하시는 걸 제 친구가 목격했나요?”

“그래.”

“제가 잘 말해볼게요.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대공의 신력은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대공 스스로도 밝히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알려지게 생겼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

“왜요? 알려지길 원하지 않으시잖아요.”

“상관없어. 알려져도.”

“네? 그럼 왜 대공저에 사람을 들이지 않으세요?”

“귀찮으니까.”

나는 황당하게 대공을 쳐다봤다.

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대공은 평소처럼 무감한 얼굴이었다.

“황태자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케인 백작에게도 잘 설명했을 거다.”

“아…….”

이런. 무도회에 아버지와 함께 왔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스승님, 저 가볼게요.”

허겁지겁 침대에서 일어나자 대공이 나를 붙들었다.

“황태자가 황궁에서 진료 받고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더군.”

“그래도 걱정하실 거예요.”

“이미 밤이 깊었어. 지금 간다고 한들 백작을 만날 수는 없을 거야.”

창문을 힐끗 보니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올라 있었다.

확실히 마차를 타고 가기에는 밤이 깊었다.

대공에게 신술을 이용해 데려다 달라고 하기에도 염치가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쉬어. 아침이 되면 황궁에 데려다 주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면 새벽녘에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신술을 이용할 거니 상관없어.”

“직접 데려다 주시게요?”

“그게 눈에 띄지 않는 제일 안전한 방법이지 않나.”

물론 그렇긴 한데 대공이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터라 얼떨떨했다.

“황태자가 방도 미리 내주었으니 거기서 백작을 만나면 될 거다.”

참 치밀하게도 말을 맞춰 놓았군.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감사드려요.”

대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라.”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바로 사라졌다.

나는 침대헤드에 몸을 기대며 숨을 내쉬었다.

제페스가 그렇게까지 야비하게 나올 줄이야.

내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지난 회차들에서도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했었지.

조용히 넘어갔다면 그게 더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제페스는 화근 자체였으니 이참에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좋겠지.

스스로 몰락의 길을 자처하는데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 *

대공은 약속을 지켰다.

아침 일찍 황궁으로 데려다 주었고 덕분에 무사히 아버지와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는 대공으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것인지 황태자도 함께 있었다.

아버지는 걱정을 많이 하셨는지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무사한 나를 보고 눈물을 터뜨리신 아버지는 제페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에 가만두지 않겠다며 펄펄 뛰셨다.

황태자는 내게 사고 경위에 대해 소상하게 들은 뒤 일을 마무리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아버지도 그 뒤를 따라가셨다.

하이먼 백작가에서 제페스를 빼내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하아.”

아버지가 당장이라도 제페스를 죽일 것처럼 흥분하신 바람에 말리느라 진이 쏙 다 빠졌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내가 황궁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황태자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한 덕분이었다.

내 의문에 답하듯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런 하퍼 경께서 오셨습니다.”

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내가 백작저로 간 뒤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나는 표정을 가다듬은 뒤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문이 열리고 남색의 근위대 제복을 입은 애런이 들어왔다.

근위대는 서임식이나 무도회와 같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가 아니고서는 남색 제복을 갖춰 입었다.

“로나!”

애런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괜찮아? 다친 곳은?”

나를 붙든 채 이리저리 살피는 눈길이 몹시 분주했다.

걱정으로 흐려진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애런. 나는 괜찮아. 다친 곳도, 아픈 곳도 없어.”

진정시키기 위해 애런의 커다란 손을 도닥이자 그가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옷 너머로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과 맞닿은 체온이 상당히 불편했다.

하지만 그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괜한 오해로 피곤해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입안의 살을 깨물며 참았다.

빨리 떨어졌으면 좋겠건만 애런은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인지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렇게 나를 걱정하면서 왜 나를 제물로 바쳤던 거니?’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그동안 외면하고 눌러왔던 원망이 불쑥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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