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34)화 (34/140)

34화

“주군, 진정하시지요.”

그때 갑자기 나타난 필립이 카이스와 클로디안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몸을 짓누르던 살기가 흩어지자 클로디안이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카이스는 형형하게 타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요동치던 응접실의 공기는 물론 대공저를 두르고 있던 결계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아카르트의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피가 어디 가겠나.”

클로디안은 불쾌했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실감한 터라 쉬이 반박하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대공의 분노를 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더 그를 자극하면 위험했다.

허나 대공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궁금한 건 지금 모두 물어봐야 했다.

“혹 제가 미욱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까?”

“황태자. 네가 오늘 나를 위해 수고한 점을 참작하여 한 가지만 일러주지.”

평생 품어왔던 의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클로디안이 기대감을 내비쳤다.

“황가의 저주는 내가 아니라 신이 내리신 거다.”

“……!”

예상치 못한 진실에 클로디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걸 왜 내게 묻는 거지? 죄를 지은 건 너희 아카르트이지 않나.”

클로디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버지는 황제에 즉위하게 되면 저주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판타시아 별궁.

그것이 아버지가 말씀하신 방법이겠지. 

그 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곳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난 절대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래서 기다렸다. 대공이 깨어나기를.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황가의 저주와 대공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에일숲에 왔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단 사실에 버틸 수 있었건만.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희망이었다니.

신의 뜻을 과연 누가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클로디안이 피가 나도록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카이스는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진 클로디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저주에 대한 진실을 밝혀낸다면 내가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던 클로디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약조하셨습니다.”

“나는 두말하지 않는다.”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어둠에 잠식되어 가던 녹안에 다시금 희망 한 자락이 피어났다.

“케인 영애가 깨어나면 황궁으로 데려다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케인 백작에겐 제가 잘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이만 가 봐라.”

클로디안은 카이스의 손짓 한 번에 바로 정문으로 쫓겨났다.

예를 갖춰 인사하려던 클로디안이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전하!”

정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근위대장과 애런이 클로디안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

클로디안은 잠시 달빛 아래 고요히 자리하고 있는 대공저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정문을 나서는 그의 두 손에 의지가 가득 차올랐다.

* * *

“떠났습니다.”

응접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필립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던 그대로 의자에 앉아 있던 카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알려주실 겁니까?”

“뭘?”

“저주를 푸는 방법이요.”

“내가 왜?”

낮게 깔린 음성엔 차가운 분노가 스며 있었다.

“하오시면 왜……?”

“누명을 쓰는 건 억울하잖아. 황태자도 알아야지. 제 핏줄이 저지른 짓을.”

만약 황태자가 진실을 알아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 핏줄들처럼 진실을 덮고 숨기려 할까? 아니면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으려 할까?

뭐, 선택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볼만할 것 같았다.

카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왜 일어나지 않을까?”

창백했던 뺨에 혈색이 돌아왔는데도 로웨나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로웨나에게서 신음이 들려왔다.

카이스가 미간을 좁히며 그녀에게로 몸을 숙였다.

고운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엄마, 엄마.”

끊어질 듯 가느다란 음성이 애타게 흘러나왔다.

“엄마, 가지 마세요.”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따라 투명한 방울이 맺혔다.

물끄러미 로웨나를 응시하던 카이스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눈물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훔쳐냈다.

아이를 달래듯 동그란 이마를 부드럽게 쓸자 로웨나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엄마, 더 해주세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로웨나는 아예 카이스의 손에 제 얼굴을 기대었다.

커다란 손에 로웨나의 작은 얼굴이 폭 파묻혔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필립의 눈이 살짝 커졌지만 카이스는 당황치 않고 손을 내주었다.

마치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로웨나는 응석을 부리듯 카이스의 손에 얼굴을 비비대다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이전과는 달리 평온한 낯이었다.

카이스는 로웨나가 잠이 들고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깊이 잠들었다 생각되었을 때 잡힌 손을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카이스의 낯선 모습에 필립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카이스는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가만히 로웨나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도 눈이 퉁퉁 부은 채 어머니를 애타게 찾았었지.’

실레니아 호수에서 보여줬던 슬픔은 역시 어머니 때문이었던 건가?

백작부인은 로웨나가 어릴 적에 병으로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상당한 것 같았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 대해선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카이스로선 로웨나의 슬픔이 잘 공감되진 않았다.

다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로웨나가 우는 모습을 보게 되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는 애써 생각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필립, 내 제자를 죽이려 한 놈이 누군지 알아내라.”

로웨나에겐 보호술과 추적술을 걸어 놓은 상태였다.

대공저에 머물 수 없다고 했기에 취한 조치였다.

오늘 로웨나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녀의 생명이 위독할 때는 장소 불문하고 신호가 오도록 되어 있으니까.

‘목격자는 근위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옆에 쓰러져 있던 자가 범인일 터.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카이스에게 중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로웨나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리다니.’

카이스의 기분에 반응하듯 평온하던 대공저의 공기가 웅웅거리며 사납게 일렁였다.

의식을 잃고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진 로웨나를 본 순간 분노가 치솟아 시야가 붉어질 정도였다.

간신히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금발의 기사 때문이었다.

그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지금쯤 범인이 어찌되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 기사도 거슬려.’

로웨나를 걱정하던 눈빛.

제 사람인 양 로웨나를 달라며 당당하게 요구하던 태도.

그 모든 것이 불쾌했다. 

“범인을 잡은 근위대원이 누구인지도 알아봐.”

카이스는 애런의 외양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필립이 사라지고 침실에는 로웨나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아름다운 연주를 음미하듯 카이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눈을 뜨자 사방이 어두웠다.

‘여긴 어디지?’

몽롱하던 정신이 차츰 또렷해지자 제일 먼저 붉은색 캐노피가 눈에 들어왔다.

‘……?’

생경하면서도 어딘지 익숙한 캐노피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깨어났나?”

데자뷰인가?

언젠가 겪어본 것 같은 상황에 의아하던 순간 아리파 산에서 쓰러졌던 때가 떠올랐다.

“……아.”

그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옆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스승님.”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갑자기 어둑하던 주위가 밝아졌다.

벽에 달린 등에 불이 들어온 탓이었다.

“아픈 곳은?”

느릿하게 걸어온 대공이 침대 옆에 서자 머리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아, 괜찮아요.”

몸은 가뿐했다. 예전에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와 똑같이.

“혹시 스승님께서 치료해 주신 건가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드려요. 그런데 왜 제가 여기에…….”

“호수에 빠진 건 기억나나?”

“아…….”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났다.

제페스와 실랑이를 벌였고 해머를 휘둘렀었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몸이 기우는 느낌이 들었는데 결국 호수에 빠졌나 보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호수에 빠진 건 기억이 안 나요. 약에 당해서 정신을 잃었거든요.”

제페스가 뿌린 액체의 잔향에는  알싸한 향이 묻어났었다.

백합 향기가 진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냄새를 가리기 위함이었던 거겠지.

교활한 자식.

제페스를 생각하니 절로 이가 갈렸다. 그때 갑자기 방안의 온도가 훅 올라갔다.

이상 현상에 놀라 고개를 드니 형형하게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마치 커다란 불덩이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스승님?”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표정은 고요한데 내뿜는 기세가 살이 떨릴 정도로 살벌했다.

“누구지?”

“네에?”

“약을 쓴 자와 호수에 빠뜨린 자가 같나?”

“네.”

제페스가 직접 밀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약 때문에 빠지게 된 것이니 제페스 탓이었다.

“그 자가 누구지?”

“하이먼 영식이요. 제페스 하이먼.”

그게 왜 궁금할까? 

의아하긴 했지만 특별히 감출 이유도 없어 순순히 대답했다.

“……남자친구였다던?”

“어떻게 아세요?”

“유명하더군. 너와 그자의 이야기가.”

나와 제페스의 연애사가 아무리 유명해도 그렇지.

저택에서 폐쇄적으로 지내는 사람이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단 말인가.

‘설마 내 뒷조사라도 한 건가?’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조사해 볼 것이라 생각했던 터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고.

그냥 올 것이 왔구나. 뭐, 그런 느낌?

굳이 감흥을 찾으라면 낯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정도?

제페스와의 연애사는 흑역사들로 가득하니까.

“왜 그자와 함께 호수에 있었던 거지? 헤어졌던 게 아니었나?”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호수까지 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우연히 만났고요.”

왜 추궁을 당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식과의 관계를 오해하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영식과는 헤어진 지 오래되었어요. 그 자……아니 하이먼 영식이 계속 질척댄 것뿐이에요.”

정말이냐는 듯 대공의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정말이에요. 그날도 다시 만나자고 절 협박하다가 안 되니까 약을 뿌린 거였단 말이에요.”

그날 분명 해머를 휘두르긴 했는데. 제페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