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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33)화 (33/140)

33화

“황태자 전하께서 버몬트 대공 전하를 만나시고자 합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사내의 존재를 알아챈 근위대장이 침착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암갈색 머리의 사내, 필립이 클로디안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리 야심한 시각에 방문을 하는 것이 실례인 줄 알지만 긴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네.”

“케인 영애 때문에 오신 겁니까?”

필립의 입에서 로웨나가 언급되자 애런이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서려던 그가 클로디안을 의식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영애는 이곳에 있나?”

“케인 영애는 무사하십니다. 지금은 주무시고 계신 터라 내일 아침에 저택으로 모셔다 드릴 예정입니다.”

“다행이군. 지금 대공을 만나고 싶은데.”

“아시지 않습니까? 대공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리라는 걸.”

어투는 정중한 데 반해 필립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럼에도 클로디안은 담담했다. 대신 근위대장이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찾아오셨는데 이 무슨 무례입니까?”

“미첼 경.”

나지막한 음성으로 근위대장을 부른 클로디안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근위대장은 마지못해 뒤로 물러섰다.

저자는 평범한 사용인이 아니었다. 대공의 가디언 중 하나일 터.

대공을 설득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 번 더 부탁하지. 대공이 영애를 데려갈 때 목격자가 있었다네. 이대로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케인 백작에겐 어떻게 설명할 셈인가?”

잠시 고민하던 필립의 입에서 클로디안이 기대하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대공 전하께 다시 한 번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딱딱하게 말을 내뱉은 필립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전하, 어찌 저런 무례를 참으시는 겁니까?”

근위대장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애런 또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

아무리 대공이 황족이라고는 하나 황태자보다 높을 수는 없는 법.

황태자가 대공저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황태자가 대공에게 부탁하는 입장이니 이상하게 보이겠지.

저들은 대공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황제도, 대공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대공가와 황가의 관계는 다른 귀족가와는 달라. 대공이 황족이라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하나…….”

클로디안이 손을 올려 근위대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대공가에 관한 일은 황가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명심하도록.”

버몬트 대공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근위대장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뜻에 따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클로디안은 초조한 마음으로 필립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체감상 십여 분 정도 흘렀을까? 마침내 필립이 돌아왔다.

“황태자 전하께서만 들어오시랍니다.”

“안 됩니다.”

근위대장과 애런이 동시에 반대하고 나섰다.

“두 사람은 여기서 대기하도록.”

“전하, 혼자 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미첼 경, 명령이야.”

근위대장이 더는 반대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를 달래듯 클로디안이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몰래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말게. 결계 때문에 힘만 낭비할게 될 거야.”

정문 안으로 들어가던 클로디안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 주의를 주었다.

결계라는 말에 근위대장과 애런 모두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클로디안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카이스님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

정문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클로디안이 필립에게 인사를 건넸다.

대공이라는 직위는 카이스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형식적으로 내려진 것일 뿐 사실상 그의 지위는 황제보다 높았다.

단지 지금은 모종의 제약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보는 눈이 사라지자마자 클로디안이 바로 호칭을 바꾼 것이었다.

필립이 클로디안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저는 그저 주군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고려했을 뿐입니다.”

선을 긋는 말에도 클로디안은 빙그레 웃었다.

“바로 저택 안으로 이동할 겁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택까지 걸어가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나름 각오하고 있었는데.

예상외의 배려에 클로디안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주군께선 시간 낭비를 싫어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클로디안이 작게 미소 지었다.

“카이스님께 실례를 범할 수는 없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머리가 어지러움과 동시에 시야가 이지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커다란 방에 도착한 후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과는 달리 방 내부는 벽에 달린 등으로 인해 상당히 밝았다.

방 한가운데에 티테이블과 함께 놓여 있는 의자에는 그토록 만나기를 고대하던 대공이 앉아 있었다.

“아카르트의 수호자께 인사 올립니다. 클로디안 체바노 호엔 아카르트입니다.”

클로디안이 오른손을 가슴에 대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리 와서 앉게.”

나지막한 음성에는 상대를 압도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위압감에 늘 웃음기가 어렸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클로디안이 카이스 맞은편으로 다가가 앉았다.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황제는 알고 있나?”

“모르십니다. 카이스님이 케인 영애를 데려가신 일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클로디안을 바라보는 금안은 어두운 밤임에도 한낮의 태양을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단지 눈을 마주했을 뿐인데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클로디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케인 영애는 보낼 수 없다.”

“케인 백작이 많이 놀란 상태입니다.”

“알아서 수습하고 왔겠지. 내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 그래서 직접 온 것이 아닌가?”

속내를 들킨 클로디안이 속으로 혀를 찼다.

케인 백작을 설득해 이 일을 덮어주겠다는 빌미로 대공의 협조를 얻어 볼까 했는데 시도도 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백작은 카이스님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케인 영애가 사고를 당해 안정이 필요하다고만 말해두었습니다.”

로웨나가 호수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딸이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는 백작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었다.

다행히 무사하지만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라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로 일단 발을 붙들어 놓고 온 길이었다.

“그렇다고 백작을 언제까지나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자입니다.”

“깨어나기 전에는 보낼 수 없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황궁에서 사고가 나지 않았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어.”

예상외의 답변에 클로디안이 내심 당황했다.

‘세상사에 무관심하고 오만한 자라고 했었는데.’

대공을 직접 만난 것은 오늘 처음이지만 황가의 기록에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기록을 통해서 상상하던 이미지와는 다른 행보에 당황스러웠다.

‘대공이 케인 영애를 보호하려는 이유가 뭘까?’

어떻게 로웨나가 위험에 빠진 것을 알았으며 대공저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던 이가 어째서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인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 케인 영애와는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대공이 물끄러미 클로디안을 쳐다보았다.

무감한 눈빛이었지만 담담하게 마주하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클로디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버텼다.

이윽고 대공의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내 제자다.”

“……?”

클로디안은 하마터면 새된 소리로 되물을 뻔 했다.

“영애가 어떤 것을 배우고 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역사와 교양. 케인 백작도 알고 있을 거다.”

오만하다 못해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대공이 누굴 가르친다고?

아니, 그보다 공부하는 건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로웨나가 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게다가 케인 백작도 대공과 로웨나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니.

‘내가 헛수고를 한 것인가?’

클로디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교류가 있었다고는 하나 갑자기 황궁에 나타나 영애를 데려가 버린 일은 백작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백작이 카이스님과 케인 영애와의 사이를 알고 있다고 해도 영애가 대공저에 있는 건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황궁에서 사고가 일어났다면 황궁에서 치료받고 쉬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대처였다.

대공도 그에 관해선 반박할 말이 없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영애를 데리고 가도록 해주십시오.”

대공이 미간을 좁히며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왜 케인 영애를 데리고 있으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클로디안은 일단 의문을 접어두었다.

대공의 이유 모를 고집이 오히려 자신에겐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었으니까.

“정 원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클로디안이 조심스럽게 말을 전하며 대공의 반응을 살폈다.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모습에 클로디안이 말을 이었다.

“대신 카이스님께서도 제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어떠십니까?”

“네가 백작에게 사실대로 털어놓는다 해도 상관없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흘러나오는 거절에 클로디안이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영애를 구한 것은 사실이고 안전을 위해 대공저로 데려왔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할까.”

“신술은…….”

“그 또한 알려져도 상관없다. 내 능력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건 너희들이겠지.”

무감하던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협상을 해보려고 했는데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겠군.’

클로디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지금 절실한 건 대공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클로디안이 고개를 숙이자 카이스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됐다.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가도록.”

“잠시만 시간을 더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카이스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황가에 저주가 내린 건 아십니까?”

카이스의 매끈한 미간이 좁혀지자 클로디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모르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100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그 사이 일어난 일에 대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안다.”

다행히 클로디안이 바라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낮은 숨을 흘려낸 그가 마음 깊이 간직해왔던 물음을 꺼내들었다.

“저주를 푸는 방법도 아십니까?”

“황가에 저주를 내린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클로디안은 차마 직접 말할 수는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카이스를 응시했다.

카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넌 내가 왜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고 있겠군.”

“신벌을 받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 신벌을 받았는지는 알고 있나?”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멸망시키려 하셨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클로디안은 카이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도 아나?”

“송구하오나 그 당시 선조께서 카이스님의 명령에 불복종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순간 클로디안은 무형의 기운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살기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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