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제국의 광영을.”
황태자 클로디안이 근위대 회의실로 들어서자 모여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일어들 나게.”
그는 무도회 도중에 소식을 듣고 온 터라 화려한 예복 차림 그대로였다.
“일단 자세한 보고부터 듣도록 하지.”
클로디안이 상석에 앉자 나머지 사람들도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에는 근위대장을 비롯해 총 다섯 명의 황실 기사단 단장들과 목격자인 애런이 함께 하고 있었다.
“하퍼 경이 최초 목격자로 사건 발생을 알려왔습니다. 현재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하이먼 영식은 조사를 위해 구금해 놓았습니다.”
근위대장, 아일스 미첼이 보고의 서두를 열었다.
“하퍼 경, 당시 상황을 설명하도록.”
“정원 북쪽을 순찰하던 중 말소리가 들려서 호숫가로 향했습니다.”
애런은 자신이 목격한 그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보고가 이어질수록 클로디안의 얼굴이 점점 서늘하게 변했다.
그러다 납치범의 인상착의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하퍼 경, 분명 케인 영애를 데려간 사내가 붉은 장발에 금안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그 사내가 호수에 빠진 케인 영애를 구했고?”
“네. 분명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클로디안이 두 손에 깍지를 낀 채 턱을 기대었다.
애런이 말한 인상착의는 분명 문헌으로 전해진 버몬트 대공과 일치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황실 기록에서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마법 같은 것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버몬트 대공이 확실했다.
“전하, 마법사든 주술사든 특별한 힘을 가진 자가 황궁에 불법으로 침입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사안입니다.”
“맞습니다. 혹시 제피루스의 첩자가 아닐까요?”
근위대장에 이어 제1기사단장이 말했다.
아카르트 제국은 아기오 신을 따르기에 마법보다는 신성력을 숭상했다.
신전의 권력이 강하다 보니 마법사들은 대우받지 못했고 그들은 하나둘 제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제국을 떠난 이들이 향한 곳은 제피루스였다.
제피루스는 마법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마법사를 양성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제피루스는 현재 마도 왕국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제피루스에서 케인 영애를 납치할 연유가 있습니까?”
제3기사단장의 물음에 회의실 내에 침묵이 흘렀다.
“이상하긴 합니다. 영애를 구했으면서 왜 납치를 한 걸까요?”
제2기사단장이 의문을 제기하자 또 한 번 적막이 흘렀다.
“전하, 한시라도 빨리 케인 영애를 찾아야 합니다. 수색대를 허락해 주십시오.”
애런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클로디안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버몬트 대공이 왜 케인 영애를 데려간 것일까?’
대공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대외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케인 영애를 만날 기회가 없었을 텐데 어째서?
문득 에일숲이 변하던 날 케인 영애를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단순히 춤을 추러 온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대공을 만나러 왔었다는 것도 말이 안 돼.’
대공이 깨어나기 전까지 그를 인지할 수 있는 자는 황제와 자신밖에 없으니까.
‘두 사람이 어떻게 아는 거지?’
그동안 대공의 행적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했었다.
결계 때문에 대공저엔 들어갈 수 없었고 염탐꾼을 보내는 족족 들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클로디안은 늘어나는 의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한편 애런은 긴장과 불안이 뒤섞인 얼굴로 클로디안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허락에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아무리 공작가 후계자라고 해도 고민에 잠긴 황태자를 재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런은 말아 쥔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추며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클로디안의 입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분침이 몇 번 더 움직이고 난 뒤였다.
“납치범을 쫓지 마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궁에 무단으로 침입한 자를 이대로 두시겠다는 겁니까?”
“케인 영애는요? 아직 백작님께 알리지도 못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의문에 클로디안이 가만히 손을 들었다.
곧바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영애를 데려간 자가 누구인지 안다.”
클로디안의 나지막한 음성에 기사단장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게 누구입니까? 명령만 내리시면 제가 바로 잡아 오겠습니다.”
애런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하퍼 경.”
애런 옆에 앉아 있던 근위대장이 나지막하게 그를 제지했다.
“송구합니다.”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애런이 클로디안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영애는 내가 직접 데려오도록 하지. 납치에 관한 일은 모두 함구하도록.”
“하오나…….”
근위대장이 우려 섞인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황궁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자는 아니니 안심하게.”
모두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황태자의 명에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케인 영애의 납치 사건은 일단 덮어두도록 한다. 일절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입단속 시키도록.”
“네. 염려치 마십시오.”
“경들은 우선 하이먼 영식을 심문해 죄상을 낱낱이 밝히도록 하게. 하이먼 백작가에도 알리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하퍼 경은 케인 백작을 불러오도록. 사건 얘기는 하지 말고 최대한 조용히 데려와주게.”
자리에서 일어난 애런이 클로디안에게 인사한 뒤 바로 회의실을 나갔다.
* * *
카이스는 로웨나를 안은 채 바로 대공저로 돌아왔다.
넓은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으로 인해 카이스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졌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로웨나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아름다웠던 올림머리는 헝클어졌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신상 드레스는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주군…….”
갑자기 사라진 카이스를 기다리고 있던 필립은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러그를 적시는 것도 잠시.
카이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붉은빛이 두 사람을 감싸자 순식간에 물기가 증발해버렸다.
카이스는 로웨나의 핏기 없는 얼굴을 확인하고는 성큼성큼 걸어 침대로 다가갔다.
필립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카이스의 뒤를 따랐다.
로웨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카이스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와 동시에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던 화려한 드레스가 가벼운 침의로 바뀌었다.
카이스는 로웨나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로웨나의 얼굴이 한 손에 다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손에 붉은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창백했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고 가늘었던 숨소리도 안정되었다.
그제야 카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주군, 어찌된 일입니까?”
“황궁 호수에 빠졌더군.”
카이스는 여전히 로웨나에게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대답했다.
“황궁에 다녀오신 겁니까?”
필립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걱정할 것 없다. 그들과는 만나지 않았으니.”
“그들은 주군께서 다녀가신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황궁 출입은 물론이고 신술 사용 또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유일한 존재가 자신이었다.
그러니 그들도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케인 백작은요? 딸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카이스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필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애를 돌려보내시지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군께서 이미 치료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대로 돌려보낸다 한들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카이스가 당장이라도 로웨나를 안아들으려는 필립을 붙잡았다.
필립이 눈으로 이유를 물었지만 카이스는 로웨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필립이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편지를 써 줄 테니 네가 백작가에 다녀 오거라.”
“뭐라고 하실 겁니까? 목격자는 없었습니까?”
카이스는 로웨나를 구하던 때를 떠올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금발의 기사.
‘로웨나를 알고 있는 자였어.’
친근하게 애칭을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무척이나 걱정이 된다는 듯 안절부절 못했던 것을 보면 분명 친분이 있는 자였다.
사실 그자에게 로웨나를 맡겼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영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대공저로 데려온 것이었다.
‘내가 왜 그랬지?’
다시 생각해 봐도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스스로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있었다. 근위대 기사가 나를 봤어.”
필립은 뭐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걱정을 드러냈다.
카이스가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대공저를 둘러싼 결계가 침입자를 알려왔다.
“손님이 찾아왔나 보군. 필립, 나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이미 필립도 침입자를 감지하고 있던 터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사라졌다.
* * *
대공저 정문 앞에는 클로디안이 와 있었다.
그는 근위대장과 애런 그리고 마부와 동행한 상태였다.
원래는 근위대장만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근위대장이 호위 인원을 늘리지 않으면 황궁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고집 부리지만 않았다면.
결국 애런과의 동행을 허락한 후에야 황궁을 나올 수 있었다.
애런이 뽑힌 이유는 버몬트 대공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대공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지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근위대장의 보고에 클로디안이 마차에서 내렸다.
요요한 달빛 아래 보이는 광활한 대공저는 어둠에 잠긴 에일숲보다도 고요했다.
“어떻게 방문을 알려야 할까요?”
당황한 근위대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클로디안은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겨 철문에 손을 대었다 뗐다.
이 정도만 해도 대공은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 안에서 사람이 나올 거야. 우리는 기다리면 되네.”
근위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클로디안의 말에 따랐다.
클로디안은 그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는 애런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로웨나를 데려간 이가 버몬트 대공이란 사실을 안 뒤부터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지금도 차분한 낯을 유지하고 있지만 푸른 눈동자는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케인 영애와는 소꿉친구이니 걱정이 되겠지.’
그렇다고 대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수는 없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보다는 대공이 자신을 만나줄 것인지가 더 중요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서신을 보냈지만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기에 긴장되었다.
‘아바마마께 보고가 올라가기 전에 대공을 만나야 해.’
아버지께서 이 상황을 아신다면 당연히 대공과 만나지 못하게 하실 테니까.
아직은 자신의 권한으로 보고를 차단하고 있지만 내일까지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초조함을 감추며 철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암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사내는 정문을 열지도 않은 채 가만히 클로디안 일행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