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제페스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너무 응석을 많이 받아줬나 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꼴을 보니.”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선 탓에 짙은 음영에 가려진 얼굴은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피식하고 흘러나오는 웃음에 어떤 표정일지 짐작이 되었다.
“로나, 너만은 끝까지 부드럽게 대해주고 싶었는데. 할 수 없지. 제대로 교육시켜 주는 수밖에.”
“교육을 받아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네.”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자에겐 매가 정답인가 보다.
제페스를 설득하는 건 포기하고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해머를 불러오려던 순간.
칙!
얼굴에 차가운 액체가 뿌려짐과 동시에 진한 백합 향기가 훅 밀려들었다.
얼른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자 옅어진 백합 향기 사이로 알싸한 향이 도드라졌다.
“너……! 도대체 무슨……?”
불길한 예감에 이곳을 벗어나려는데 갑자기 세상이 빙글 돌았다.
“역시 멍청한 건 변하지 않아. 내가 너 따위에 겁먹을 줄 알았어?”
제페스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로나, 넌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어. 네 앙탈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는 제페스의 모습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오지 마.”
당장이라도 제페스를 밀쳐내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다리가 자꾸 휘청거리다 못해 정신까지도 점점 몽롱해졌다.
멀어지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사이 제페스와의 거리가 점점 더 좁혀졌다.
“이리 와, 로나.”
달콤하게 부르는 음성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친 새끼.’
분노가 치솟았지만 현재 상태로는 응징은커녕 내 한 몸 간수하기도 어려웠다.
점점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승리에 취한 얄미운 얼굴이 보였다.
힘껏 노려봐주고 싶었지만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 때문에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분한 마음에 남은 정신을 다 끌어 모아 필사적으로 외쳤다.
‘해……머!’
손에 차가운 미스릴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곧바로 휘둘렀다.
그 뒤로는 퓨즈가 끊어진 것처럼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상태가 상태인지라 로웨나가 온 힘을 다해 해머를 휘둘렀음에도 평소와 같은 위력을 낼 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페스와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타격할 수 있었다.
“억!”
해머에 맞은 제페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호수를 등지고 있던 로웨나는 해머를 휘두른 반동으로 그대로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경고! 플레이어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HP가 줄어듭니다.
HP: 195/210』
190, 185, 180, 175, 170…….
HP가 급격하게 감소함에 따라 위험을 알리는 알림 메시지가 연달아 울렸다.
불행히도 이미 정신을 잃은 로웨나는 알림을 확인할 수 없었다.
HP가 바닥을 치기 직전.
누군가가 다급하게 호숫가로 달려왔다.
“로나!”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애런이었다.
그는 쓰러진 제페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조급한 눈빛으로 호수를 훑었다.
로웨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시인하듯 호수의 수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단지 그뿐.
로웨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저 없이 겉옷을 벗어 던진 애런이 호수로 뛰어들려던 찰나.
그보다 더 빠른 이가 있었다.
풍덩.
누군가 검푸른 호수로 뛰어들며 수면이 크게 요동쳤다.
순식간에 물 밖으로 나온 사내의 품에는 로웨나가 안겨 있었다.
멍하니 사내를 쳐다보던 애런은 물에 푹 젖은 로웨나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축 늘어진 가느다란 팔을 보는 순간 애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떨리는 시선이 머뭇거리다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달빛에 비친 창백한 얼굴과 무겁게 닫힌 눈꺼풀이 낯설었다.
저렇게 연약한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로웨나는 늘 씩씩함이 넘쳐서 문제였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팠던 적은 없었으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로나!”
다급하게 로웨나에게 다가갔지만 바로 제지당했다.
“가까이 오지 마라.”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그제야 애런은 로웨나를 안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붉은 장발의 사내.
처음 보는 이였다.
중앙 귀족 중에 애런이 모르는 이는 없었다.
지방 귀족이라 할지라도 장미 축제에 참석할 정도의 가문이라면 한 번쯤은 봤을 터.
신분이 불명확한 자에게 로웨나를 맡겨둘 수는 없었다.
“로나를 이리 줘.”
애런이 손을 뻗었지만 사내가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로웨나에게는 닿지 못했다.
“내가 구했으니 내가 책임지지. 너는 살인미수범이나 챙겨라.”
“그게 무슨…….”
애런이 얼굴을 찌푸리며 따지려던 순간 갑자기 사내가 사라졌다.
로웨나와 함께.
“……로나!”
당황한 채 멍하니 서 있던 애런이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 어디에서도 로웨나를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신원 불명의 사내가 로웨나를 데리고 사라졌다.
마법인지 주술인지 모를 것을 사용해서.
‘로나가 위험해.’
애런이 다급하게 목에 걸고 있던 경보용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익!
고요한 정원 사이로 호루라기 소리가 퍼져 나갔다.
기본적으로 최소 세 번은 불러야 하기에 다시 호루라기를 부르려던 애런은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호루라기 소리에 정신을 차린 제페스가 슬금슬금 도망가고 있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애런이 그의 뒷덜미를 덥석 붙잡았다.
“하퍼 경, 이거 놓게. 이 무슨 결례인가.”
제페스는 방금 전 내빼려던 것을 무마하려는 듯 평소와 같이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애런은 아무 말 없이 제페스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준 채로.
애런이 호루라기를 마저 불자 제페스의 하늘색 눈동자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하퍼 경,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선 이것 좀 놔주게.”
“오해? 지금 로나를 물에 빠뜨려 놓고 오해라고?”
화를 낼 때에도 정중한 어투를 유지하던 애런의 음성이 사나워졌다.
“뭐? 물에 빠뜨려? 누가 누구를?”
제페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하, 뻔뻔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퍼 경,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
여전히 부인하는 제페스의 행태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애런이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정통으로 맞은 제페스가 힘없이 쓰러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꽤나 충격이 컸던지 잠시 멍하니 있던 제페스가 뺨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내가 분명히 경고 했었지? 다시는 로나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한기가 서린 음성에 제페스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하퍼 경, 오, 오늘은 우연히 만났던 걸세. 산책을 하다 우연히.”
“우연히?”
“그, 그렇다네. 그리고 나는 로나가 물에 빠진 줄도 몰랐어.”
“몰랐다? 내가 분명 자네가 로나를 밀치는 걸 봤는데?”
“로나에게 맞아서 쓰러져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로나를 밀 수 있었단 말인가?”
제페스가 핏대를 세우며 항변했다.
“네가 로나를 겁박해 호수로 몰아가는 걸 내가 직접 봤는데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 생각했나?”
조금 전 애런은 순찰을 돌고 있었다.
간혹 해가 진 뒤에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는 영애들이 있기에 정원 깊숙한 곳까지 꼼꼼하게 돌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호숫가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연인이 밀회를 즐기러 온 건가 싶어 모른 척 돌아가려고 했었다.
그의 발걸음을 붙든 건 어슴푸레한 가로등 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호수로 향하던 애런의 귓가에 ‘로나’라는 애칭이 또렷이 들려왔다.
그 순간 애런의 걸음이 빨라졌다.
휘청거리는 로웨나 그리고 다가오지 말라는 그녀의 외침.
상대가 제페스와 같은 은발인 것까지 확인한 애런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웨나가 호수에 빠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제페스가 진심으로 로웨나를 호수에 빠뜨려 죽이려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제페스가 로웨나를 겁박했고 로웨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는 사실이었다.
로웨나가 크게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제페스가 쓰러졌으니까.
그러니 이 모든 건 제페스의 잘못이었다.
‘다시는 로나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애런은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제페스가 로웨나를 겁박하는 것을 본 이후로 내내 불안하던 차였다.
진작 그를 처리했다면 오늘 로웨나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
자신의 안일한 대처에 후회가 밀려왔다.
“진짜일세. 피해자는 로나가 아니라 나라니까!”
죄를 부인하는 것도 모자라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하다니.
분노가 치민 애런이 제페스의 멱살을 잡아들어 올렸다.
제페스는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죽 달려 올라갔다.
“컥!”
“변명 따윈 필요 없어. 반드시 널 감옥에 처넣고 말 테니까.”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에 제페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퍼 경, 무슨 일인가?”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황실 기사들이 달려왔다.
“하이먼 영식이 케인 영애를 호수에 빠뜨리는 걸 목격했습니다. 조사를 위해 영식을 구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 두 명이 다가와 제페스를 연행했다.
“아니야. 나는 잘못이 없어.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니까?”
“그건 조사해보면 알 테니 일단 함께 가지.”
제페스가 끌려가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건장한 기사들을 이기지는 못했다.
“몸수색도 해 보십시오. 케인 영애가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친 것을 보면 무언가로 위협한 것 같습니다.”
제페스를 연행해 가던 기사들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 영애는 어디에 있나?”
“설마 아직 구하지 못한 건 아니겠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호숫가로 다가갔다.
“어떤 사내가 영애를 구한 뒤 납치해갔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선배 기사들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키는 저와 비슷하고 붉은 장발의 사내였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보아 마법이나 주술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애런이 차분하게 로웨나를 데려간 사내의 인상착의를 읊었다.
“황궁에서 허가되지 않은 마법이나 주술을 사용하는 건 처벌 대상에 해당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퍼 경, 자네는 나와 함께 보고하러 가지. 자세한 상황을 아는 이는 자네뿐이니.”
“저는 로나를…….”
애런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로웨나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제게는 상부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로선 홀연히 사라진 사내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기사단의 지원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애런은 초조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차분하게 답했다.
“나는 황궁 경비를 강화하라 알리겠네.”
“부탁하네.”
모여 들었던 기사들이 각자 역할을 분담한 뒤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 비상령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