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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30)화 (30/140)

30화

황태자의 호감도를 확인하기 위해 인물창을 열었다.

호감도 8%.

목표치인 10%까지는 앞으로 2%가 남은 상황.

사실 오늘 황태자를 만나 호감도를 올려놓으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약혼 발표 때문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호감도가 인간적인 호감도 함께 반영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카밀라는 어떻게 된 것일까.’

시스템 창을 닫고 아까 미뤄두었던 의문을 꺼내 들었다.

내 사정을 제외하고 본다면 카밀라의 약혼은 내게도 기쁜 일이었다.

그동안 내 코가 석자라 카밀라를 신경 쓰지 못했지만 마음에 걸렸던 건 사실이니까.

황태자와의 약혼으로 가문에서의 입지도 달라질 테고, 정략결혼으로 팔려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아가 혼인 후 황태자비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변화가 내 생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어쨌든 카밀라와 황태자는 서로를 선택했어.’

그렇다는 건 황태자가 나를 제물로 바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었다.

연인이나 황태자비로 엮이지 않았을 땐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오히려 긍정적인 부분이었다.

‘카밀라와도 친분을 쌓아야겠네.’

그래야 황태자의 남은 호감도를 수월하게 올릴 수 있을 테니.

‘어떤 방법으로 친해질 수 있을까?’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 사이인지라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면 황태자와의 약혼 때문에 접근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오히려 거부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사실 황태자 문제가 아니라도 카밀라와는 친해져야 한다.

중요한 뒤틀림의 주인공이니까.

뒤틀림의 이유를 찾아야 나도 대처할 수 있지 않겠나.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는데 눈앞에 요요하게 달빛이 비치는 호수가 보였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생각에 잠겨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니 분수대를 지나 장미 정원을 벗어난 줄도 몰랐다.

정원 북쪽에 위치해 있는 이 호수는 황족들이 뱃놀이를 즐기는 장소였다.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흐린 가로등 불빛 아래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로나.”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성.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는 간신히 표정을 풀며 걸음을 멈추었다.

“하이먼 영식.”

거리를 두는 부름에 제페스의 매끈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로나, 왜 그리 딱딱하게 불러.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짐짓 서운한 척하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헤어졌으니 서로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로나,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거야? 많이 서운했나보네. 미안해. 내가 로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

제페스는 도리어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유려한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반면 나는 그 뻔뻔한 작태에 어이가 없었다.

화? 서운?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발악하는 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나는 영식에게 화를 낼 생각도 없고 서운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일순 제페스의 하늘색 눈동자에 희망이 어렸다.

“난 영식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만 가줬으면 좋겠어요.”

미움이나 분노, 원망 모두 상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가질 수 있는 감정이었다.

나는 애초에 제페스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그를 만나면서 짜증은 났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일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내 말뜻을 알아챘는지 제페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로나,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게로 뻗어오는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나자 여인보다도 고운 손이 방향을 잃고 허공에 남겨졌다.

목표물을 놓쳐버린 손을 바라보며 제페스의 눈가가 굳었지만 역시나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나를 믿어주는 줄 알았어. 계속 오해하며 상처받고 있을 줄은 몰랐어.”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변명에 반박할 의지도 사라졌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자신의 설득이 통한 거라 생각했는지 제페스가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했다.

“네가 다른 영애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모두 헛소문이야. 우리의 사랑을 질투해서 이간질하려는 농간이야. 알잖아. 내겐 로나밖에 없다는 거.”

그는 지난번과 같은 변명으로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내가 그 영애들에게도 확실하게 해명할게. 다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며 제페스가 눈으로 물어왔다.

그러며 조심스럽게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내가 피하지 않으니 자신감이 생겼는지 한 걸음 더 좁혀왔다.

“그동안 네게 사과하고 싶어서 매일같이 백작저에 찾아갔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어. 네가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아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매일은 무슨.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와 놓고는.

그마저도 내가 베히른 영지로 내려간 뒤부터는 발길을 끊은 참이었다.

제페스가 찾아오든 말든 관심은 없었지만 매일같이 보고해주는 조이 덕분에 알게 된 것이었다.

“그날 네가 했던 모진 말들 때문에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몰라. 그래도 널 미워하지 않아.”

제페스가 다친 마음을 달래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날 상처 줄 만큼 네가 많이 속상하고 아팠다는 뜻일 테니까. 내가 이해하기로 했어.”

이쯤 되면 망상증에 걸린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제멋대로 상황을 각색하는 능력은 물론 비련의 남주인공 같은 뛰어난 연기력에 박수를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사랑이 부족했나 봐. 용서해줘. 그리고 기회를 줘.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할 기회를.”

숫제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그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안 그래도 카밀라 일로 머리가 복잡한데 망상증에 걸린 찌질이까지 상대하고 있으려니 두통이 일었다.

“하이먼 영식, 나는 당신과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그만해요.”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자 아련하게 연기를 펼치던 제페스의 얼굴이 대번에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 이거지. 이게 진짜 모습이지.

드디어 드러난 민낯에 나는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깨진 그릇을 붙인다고 예전과 같아질 수는 없죠. 우리 사이도 그래요. 애정은 처음부터 없었고 신뢰마저 깨진 마당에 무얼 더 할 수 있을까요?”

“애정이 왜 없어?”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어 왔다.

“영식은 내 가문과 돈을 보고 나를 선택한 거잖아요. 나보다 더 좋은 조건의 배우자가 나타나면 언제든 나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고.”

“하아, 로나. 내가 네게 애정이 없었다면 네 오만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참아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이제야 제페스의 본심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네 단점까지도 모두 받아주고 사랑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러니 내게 돌아와.”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언뜻 애절하게 보이는 손길이었지만 거기엔 ‘네가 오지 않고 배기겠느냐.’는 오만이 서려 있었다.

“너도 나 사랑하잖아. 나밖에 안 보인다며. 내게 모든 걸 다 안겨주겠다고 했잖아.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거짓말 하지 마. 넌 날 속일 수 없어.”

제페스가 인용한 말들은 분명 내가 빙의하기 전 로웨나가 한 말일 것이다.

그러니 저리 당당하게 말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 말이었다.

굳이 감흥이란 걸 찾아낸다면 사람 보는 안목 없는 로웨나에 대한 안타까움 정도?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 가만히 있으니 제페스는 내가 제 말을 부인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듯 했다.

“로나, 넌 날 사랑해. 너를 사랑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잖아. 그러니 투정은 그만 부려. 나도 더는 참기 힘들어.”

내게 사랑을 세뇌하며 나와의 거리를 점점 좁혀갔다. 은근한 협박까지 더하면서.

원만하게 넘어가려 했는데 이건 내 인내심의 한계를 넘는 수준이었다.

“하아, 낯짝이 두꺼운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뻔뻔할 줄은 몰랐네.”

말투와 태도를 확 바꾸자 내게 다가오던 제페스의 걸음이 멈췄다.

“네가 이렇게 멍청할 줄이야. 지나가는 개도 너보단 더 잘 알아듣겠다.”

“뭐?”

“헤어지자는 말이 그렇게 어려워? 그리고 뭐, 오해? 내가 정말 바보인 줄 알았니?”

제페스가 얼빠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과에 진심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건 물론이고 지금 나를 무시하며 협박하고 있다는 걸 모를 줄 알아?”

“그게 무슨 말이야?”

제페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체이시 자작 영애, 애슬란 백작 영애가 최근에 만나던 여자들인가? 아, 페일롯 상회의 딸하고는 꽤 오래 만나고 있다며. 이러면 도대체 몇 다리인 거지?”

제페스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여인들의 이름을 대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말이야? 나는 전혀 모르는 여자들이야.”

발뺌하는 그를 향해 코웃음을 쳐준 후 나를 만난 이후로 바람 펴왔던 여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댔다.

그럴수록 제페스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페일론 상회의 딸인 에이미에겐 나와 혼인한 후에도 정부로 있어주면 사업을 확장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며? 물론 우리 백작가 돈으로.”

“그, 그건…….”

내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제페스의 눈동자가 크게 부풀었다.

이 모든 정보는 지난 회차에서 황태자가 조사해서 알려준 내용이었다.

황태자와 친구가 되었을 때 제페스를 떼어내느라 어려움을 겪는 내게 잘 활용해 보라며 던져준 자료였다.

덕분에 제페스를 떼어내는 데에 유용하게 활용했었다.

물론 호감도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면 안 되니 적당히 구슬리기 위해 돈을 좀 쓰긴 했지만.

“제페스, 지금 네 모습 너무 구질구질하고 구차해 보여. 그러니 그만해.”

한심한 눈길을 보내자 제페스가 입을 꾹 다물며 양손을 말아 쥐었다.

“다음에는 우리 아는 척하지 말자.”

“거기 서.”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자 제페스가 음산하게 명령했다.

무시하고 걸음을 옮기자 제페스가 내 팔을 잡아챘다.

“멈추라고 했잖아!”

결국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거 놔.”

“못 놔주겠다면?”

제페스가 입매를 비틀었다. 달빛에 음영이 진 얼굴이 비열해 보였다.

나는 내 팔을 붙들고 있는 손을 잡아떼며 그의 팔을 비틀었다.

“악!”

제페스의 비명이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잇새 사이로 짓씹듯 내뱉자 하늘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내 경고가 그리 우스웠어?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악!”

제페스의 팔을 더욱 비틀어 꺾자 그의 비명 소리가 더 커졌다.

“네게 손목 한 번 잡혀줬다고 착각하지 마. 네 놈 하나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으니.”

그대로 제페스를 밀쳐버리자 그가 휘청거리며 밀려났다.

제페스는 내게 꺾였던 팔을 붙든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예전의 로웨나가 아니란다.’

드레스 탓에 특별훈련으로 다져진 몸을 자랑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낮게 경고하자 당황으로 물들었던 제페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 가진 건 돈밖에 없는 주제에. 어디서 건방지게.”

그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내게 모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힘으로도 밀렸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본심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을 보면.

‘해머로 날려버릴까.’

해머에는 투명화 기능이 있어서 내가 원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제페스에게 사용한다 한들 문제될 건 없었다.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고 해가 져서 어두우니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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