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카르트 제국의 태양, 이그레인 푸스트 호엔 아카르트 황제 폐하와 엘레나 헤시안 이슬레인 아카르트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제는 조각 미남이라 불리는 클로디안과는 달리 선이 굵고 남성적인 느낌이 강한 인상이었다.
젊은 시절 무위로 이름을 날렸다는 명성답게 쉰을 넘긴 나이에도 장수의 기백이 느껴지는 풍채였다.
그의 옆에는 고혹적인 미인이 서 있었다. 황태자는 황제보다도 황후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제국의 광영을.”
참석한 귀족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태자가 아직 입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연회의 입장 순서는 작위가 높을수록 늦는 법.
황제와 황후는 항상 맨 마지막에 입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황태자는 황제 전에 입장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황태자의 신상에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싶어 사람들이 동요했다.
높은 단상 위로 올라선 황제가 위엄 있게 손을 들었다.
“일어들 나게.”
황제의 명령에 모두들 자세를 바로 했다.
“올해의 장미는 꽃송이가 탐스럽고 향이 진하더군. 이번 여름도 아름답고 향기롭게 보내길 바라네.”
장마와 더위로 인해 습하고 땀을 흘리게 되는 계절인지라 향기롭게 보내라는 말은 여름철 관용적인 인사였다.
더위에 고생하지 않고 무탈하게 잘 보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무도회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하네.”
황제는 기쁜 소식이라며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굳은 눈빛엔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엿보였다.
그걸 알아챈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했다.
대부분은 기쁜 소식이라는 말에 집중해 황제의 발표 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황태자의 약혼 소식을 전하네.”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회홀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약혼이라고? 허, 평생 연애만 하실 것 같더니.”
“그러게 말이에요. 좀 갑작스럽긴 하네요.”
“황태자 전하께서 연애만 하시는 걸 폐하께서 그냥 두고 보실 리 없지요.”
“하긴 지금까지 많이 참아주신 것이지요. 후계가 황태자 전하 한 분뿐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약혼녀는 누구일까요?”
“최근에 전하와 교제하다 헤어진 영애가 베르탈 백작 영애가 아니었나요?”
“그 뒤론 특별히 관심을 가지시는 영애는 없었던 것 같은데.”
경악과 당황이 한차례 지나가자 저마다 황태자의 약혼녀가 누구일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후보자들이 언급되는 와중에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고 있던 가문들은 물론이고 황태자를 사모하던 영애들 또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반응한 이는 카밀라의 언니 낸시 체임버였다.
“마, 말도 안 돼. 전하께서 약혼이라니.”
카밀라보다 진한 회색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요동쳤다.
“여보,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공작부인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체임버 공작에게 물었다.
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비는 당연히 우리 낸시가 되어야 하잖아요. 공작가들 중에서 황태자 전하와 나이가 맞는 아이는 우리 낸시 밖에 없잖아요. 안 그래요? 당신도 그렇게 말했었잖아요.”
남편의 묵묵부답에 공작부인이 답답하다는 듯 다그쳤다.
하지만 공작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공작이 과묵한 편인지라 공작부인은 이내 대답을 듣기를 포기하고는 충격을 받은 낸시부터 챙겼다.
그러나 여기 모인 이들 중에서 나만큼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태자가 약혼을 했다고? 그것도 낸시가 아니라 다른 여자랑?’
이건 앞서 애런과 카밀라의 만남과는 급이 다른 뒤틀림이었다.
황태자는 언제나 스토리 후반에 약혼을 했다.
1회차 때에는 낸시와 했고 2회차 때는 내가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였다.
그런데 시기가 빨라진 것은 물론이고 제3의 약혼녀까지 등장했다.
‘버그가 생긴 것인가.’
스토리 초반부터 이렇게 큰 뒤틀림이 일어나면 어쩌자는 건지.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벌써부터 두려워졌다.
그러나 이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어진 시종의 외침에 나는 내 청력을 의심해야만 했다.
“클로디안 체바노 호엔 아카르트 황태자 전하와 약혼녀이신 카밀라 체임버 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뭐? 카밀라가?”
낸시의 비명 같은 외침이 황족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소리에 묻혀 버렸다.
에메랄드 홀의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며 클로디안의 팔에 살포시 손을 얹은 카밀라가 보였다.
두 사람은 복장을 맞춘 듯 하얀색 예복과 드레스로 통일한 상태였다.
정원에서 봤을 때 카밀라의 드레스가 암녹색이었으니 그 이후에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머리 모양과 화장, 화려한 장신구까지. 새롭게 치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왜 카밀라가 시간을 확인하며 조급하게 정원을 나갔는지 이해가 되었다.
입장하기 전 새로 치장을 받아야 하는데 낸시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진 탓이었다.
그건 곧 이 모든 일이 황태자와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었다는 걸 의미했다.
힐끗 카밀라의 오른쪽 팔뚝을 보니 드레스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디자인이라 붉은 손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표정 또한 지치고 그늘진 기색은 사라지고 편안하고 밝아보였다.
클로디안도 기쁨을 머금고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약혼녀인 카밀라를 향할 때는 녹음을 닮은 눈동자에 애정이 묻어났다.
카밀라도 수줍은 미소로 그 눈빛에 화답했다.
나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카밀라가 황태자와 약혼이라니?
물론 카밀라로 플레이할 때 황태자를 공략하면 볼 수 있는 해피엔딩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플레이어는 카밀라가 아니잖아!’
리라이트는 솔로 플레이어 게임.
내가 플레이어인 이상 카밀라는 제 인생을 바꾸어 나갈 수 없다.
그저 기본 설정대로 시스템이 부여한 운명에 따라 살아가게 될 뿐.
지난 두 번의 플레이에서 카밀라의 운명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
‘가만, 두 번 다 카밀라가 에슬라 후작과 혼인한 것이 맞나?’
공작가의 사생아인 카밀라의 결혼에 대해선 다들 별 관심이 없기에 별로 이슈가 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혼인에 대해선 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내 일만으로도 바빠서 대충 흘려들은 데다 어차피 혼인 상대는 후작일 거라 생각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낸시와도 친하지 않았었고.
‘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이번 회차에서 변한 것인지, 아니면 지난 회차들에서부터 뒤틀림이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약간 찌르르하게 아프던 머리가 지금은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통증이 일었다.
사실 누가 황태자비가 되든 상관은 없었다. 카밀라가 잘 되어서 배가 아픈 것도 아니고.
지금 내게 중요한 문제는 원래의 게임 스토리가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지난번 베히른 홍수 때도 그렇고, 조금 전 카밀라와 애런도 그렇고.
한 번도 아니고 벌써 여러 번 뒤틀림이 일어났다.
‘왜 자꾸 어긋나는 거지?’
앞으로도 이런 변수가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니 또 생길 가능성이 컸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지금은 이 균열들이 내 일에 방해가 되진 않지만 앞으로 그 균열이 점점 커지기라도 한다면?
그럼,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내가 혼돈에 빠진 사이 장내도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세상에. 카밀라 체임버라면 그 사생아 아니에요?”
“맞아요. 체임버 공작가의 천덕꾸러기.”
“황태자 전하께서 왜 체임버 공녀를 택하신 거죠?”
“그러게요. 체임버 공작가가 필요했다면 첫째 공녀도 있는데.”
“아니, 전하와 공녀는 언제 저리 가까워졌답니까?”
“공작부인과 첫째 공녀가 황태자비 자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안 됐네요.”
“누가 됐든 공작부인 입장에서는 황가와 혼약을 맺게 되었으니 나쁠 건 없지 않겠어요?”
“공작 각하야 그렇겠지만 공작부인은 아니죠. 아무리 넓은 아량으로 사생아를 품었다고 해도 친자식과 같겠어요?”
“하긴 그렇겠네요. 굴러 들어온 돌이 친딸의 자리를 빼앗아 간 거나 다름없을 테니.”
“한동안 시끄럽겠네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웅웅거리는 이명으로 들려왔다.
황태자와 카밀라가 단상에 올라가 약혼을 발표하고 사람들의 축하가 이어졌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아가, 괜찮은 게냐?”
그때 아버지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제야 이명이 멈추고 제대로 된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가, 안색이 안 좋구나.”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다. 그저 머리가 띵하게 아플 뿐이었다.
“조금 전에 마신 와인이 도수가 좀 있었나 봐요.”
나는 서둘러 변명거리를 대며 어색하게 웃었다.
“휴게실에 잠시 가 있겠느냐?”
“잠깐 어지러웠는데, 이제 괜찮아요. 아버지와 함께 춤춰야 하니 여기 있을래요.”
“춤이야 나중에도 얼마든지 출 수 있잖니. 나는 괜찮으니 가서 좀 쉬거라.”
“싫어요. 약속하셨잖아요. 아버지랑 같이 춤추고 싶단 말이에요.”
“원, 녀석도.”
결국 아버지께서 못 이기는 척 웃으셨다.
로웨나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주목을 받는다.
그런 인사가 황태자가 약혼을 발표하자마자 아프다며 자리를 비우면 구설에 오를 가능성이 컸다.
황태자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냐는 둥, 제페스와 헤어진 것이 황태자 때문이었다는 둥.
별의별 소문이 다 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 사이 악단이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황태자와 카밀라가 중앙으로 나와 무도회의 처음을 열었다.
화려한 시폰이 레이어드 된 드레스는 카밀라가 턴을 돌자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아름답게 퍼졌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뿌득.
살벌하게 이를 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카밀라를 노려보고 있는 낸시가 보였다.
그건 공작부인도 다르지 않았다.
부서질 듯 쥘부채를 쥐고 있는 표독스런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체임버 공작만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황태자와 카밀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연달아 두 곡을 춘 뒤 답답하다는 핑계를 대며 홀을 나왔다.
때마침 아버지의 친우이신 헤세르 후작님이 아버지께 대화를 요청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가 진 뒤의 정원은 햇살 아래 화려하게 피어나던 한낮의 정원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어둠이 다채로운 색을 덮어버렸지만 풀벌레 소리와 고즈넉함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에메랄드 홀에 모여 있어서 그런지 장미 정원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화단 사이로 걸어 들어가니 장미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매혹적인 향기임에도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지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황태자와 카밀라가 약혼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우선은 황태자와 만날 기회가 줄어들겠지. 호감도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리 10%를 만들어 놓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