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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28)화 (28/140)

28화

“뭐, 그건 집에 가서 따로 교육하면 되겠지.”

교육이란 말에 카밀라의 작은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제야 낸시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교육이란 카밀라의 종아리를 때리고 하루 종일 굶기는 것이었다.

“내 말 명심해.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마. 하, 아버지께서는 왜 가문의 수치를 무도회까지 데리고 오신 건지.”

낸시가 짜증스럽게 내뱉으며 도자기처럼 매끈한 미간을 찌푸렸다.

유서 깊은 체임버 공작가의 사생아. 그게 카밀라였다.

카밀라는 영지 시찰을 나갔던 체임버 공작이 시중을 들던 시녀와 하룻밤을 보낸 결과로 태어나게 되었다.

체임버 공작은 카밀라의 존재를 알고 제 딴에는 책임을 지겠다고 양육비를 지급했으나 저택으로 데리고 오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정식으로 혼인한 부인이 있었고 그 사이에 태어난 딸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밀라의 어머니가 병을 얻어 죽게 되고 혼자 남겨진 카밀라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고귀한 체임버의 핏줄이 고아원을 전전하게 둘 순 없다 여긴 것인지 카밀라가 9살 되던 해에 저택으로 데려와 가문에 입적시켰다.

공작부인의 허락을 얻기 위해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갔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용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었다.

여하튼 그 뒤로 공작은 제 소임을 다했다는 듯 카밀라에 대한 관심을 끊었고 그녀는 공작가의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공작부인과 그녀의 친딸인 낸시는 카밀라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늘 구박하고 괴롭혔다.

그렇다고 집 안에만 숨겨 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체임버 공작은 황궁의 3대 무도회에 항상 카밀라를 동행시켰다.

체임버 공작은 명망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생아라 할지라도 정식으로 가문에 입적시켜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깎인 평판을 올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건 공작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집안에서는 카밀라를 학대하면서도 외부에서는 살뜰하게 챙기는 척 했다.

사생아까지도 따뜻하게 보듬은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하며 동정과 찬사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카밀라가 오늘 장미 축제에 참석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네, 알겠어요.”

카밀라가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만약 무도회에서 내 눈에 뜨이면 그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낸시가 카밀라의 가는 팔을 힘주어 쥐며 협박했다.

카밀라의 눈가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아예 마차 안에서 조용히 있는 것도 좋겠구나. 해가 지면 서늘해질 지도 모르니.”

낸시는 아량을 베푸는 척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카밀라의 오른쪽 팔뚝에 붉게 손자국이 남았다.

“하아.”

낸시의 모습이 멀어지자 카밀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도회 때마다 낸시는 카밀라에게 패악을 부렸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지는 못하니 이렇게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협박하거나 제 친구들을 데려와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도와줘야 할까?’

지난 두 번의 회차에서 장미 축제가 있던 날 이런 장면을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번 모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미지 쇄신을 위해 힘쓰거나 공략캐들의 호감도를 올리느라 바빴으니까.

그 이후에도 카밀라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내 코가 석자인데 그녀를 도와줄 정신이 있었겠는가.

‘이번이 마지막 플레이인데.’

바깥세상에서 카밀라가 되어 수도 없이 플레이를 해서 그런지 낸시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찌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카밀라가 낸시와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디로 가는 거지?’

리라이트 게임을 할 때 18살의 장미 축제는 카밀라의 첫 이벤트였다.

‘카밀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더라.’

카밀라로 게임을 할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카밀라는 낸시의 협박대로 숲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주변을 돌다 로웨나가 아닌 다른 영애와 밀회를 즐기던 제페스와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해가 지고 나면 연회홀을 빠져나와 혼자 쉬려던 황태자와도 만나게 된다.

황태자는 무도회로 인해 평소보다 이목이 쏠릴 것을 고려해 순찰을 돌던 기사를 불러 카밀라를 마차까지 안내하도록 맡긴다.

그때 우연히 불려온 기사가 애런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 명의 공략캐와 첫 인사를 나누는 것이 장미 축제의 이벤트였다.

어디까지나 이 모든 건 카밀라가 메인 플레이어일 때의 이야기였다.

게임 리라이트는 카밀라에게 운명이란 말로 설정 스토리를 부여하면서 시작한다.

공작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구박받다가 돈 많은 에슬라 후작의 후처로 들어가 불행하게 살다 죽는 것.

그것이 카밀라의 운명이었다.

플레이어가 할 일은 카밀라가 되어 공략캐들을 공략하면서 주어진 운명을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마치 회귀한 것처럼.

그래서 게임 제목이 ‘Rewrite’였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빙의한 이후 카밀라는 게임에서 부여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 명의 공략캐들과도 특별한 접점이 없었다.

그건 곧 내가 빙의한 이후 플레이어가 교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곳의 플레이어는 나야. 그럼 카밀라는 공략캐들과 어떤 이벤트도 발생하지 않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카밀라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방향을 보아하니 사람들이 몰려있는 중앙 출입구가 아니라 동쪽 출입구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확실히 동쪽은 숲이 조성된 곳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카밀라가 뒤돌아 있어 무슨 표정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이 꽤나 조급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왜 그러는 거지?’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는 카밀라 혼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공작에게 혼날 테니까.

그러니 그녀가 갈 만한 곳은 마차밖에 없을 터.

왜 조급하게 움직이는 것일까.

점점 카밀라에 대한 의문이 늘어갈 무렵 출입구에 세워진 하얀색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임버 공녀.”

나지막한 음성과 절도 있는 발음. 

애런이었다.

“아, 하퍼 경.”

애런의 부름에 카밀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음성에 안도와 반가움이 묻어났다.

‘……?’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일 텐데 왜 친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나는 얼른 걸음을 멈추고 아름드리나무로 몸을 숨겼다.

“왜 여기 있는 겁니까? 혹 지난번처럼 길을 잃은 겁니까?”

지난번? 애런의 물음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전에도 만났던 걸까?

물음의 내용을 보면 단순히 소개로 인사만 나눈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애런에게서 카밀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는데.’

1회차 때 애런과 이야기를 나누다 간혹 카밀라가 언급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이름만 들어본 것처럼 굴었었다.

2회차 때에도 애런과 카밀라 사이에 특별한 친분이 보인 적은 없었다.

“아, 네. 정원이 이렇게 넓은 줄은 몰랐어요.”

카밀라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도 아직 정원의 지리는 다 익히지 못했습니다.”

애런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희들이 왜 순찰을 돌고 있겠습니까? 길을 잃으신 분들을 에스코트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앞서도 길을 잃은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며 애런이 친근하게 말을 덧붙였다.

“목적지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애런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공녀, 정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버린 애런의 표정에 카밀라가 동그란 눈을 굴렸다.

이내 애런의 시선이 닿은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는 슬쩍 제 팔뚝을 가렸다.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니라니요. 이렇게 손자국이 날 정도인데. 도대체 누가 이런 겁니까?”

카밀라가 난처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공녀, 저는 근위대원으로서 장미 축제 참석자들의 안위를 지킬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묵과할 수 없습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단호한 어조에 카밀라가 잠시 하늘을 쳐다보고는 시선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홍색 입술이 작게 열렸다.

“언니와 다툼이 있었으니 모른 척 해주세요.”

목소리를 낮춘 카밀라는 민망한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고집스럽게 추궁하던 애런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어렸다.

가문 내에서 카밀라의 위치가 어떠한지 모르는 귀족들은 없었다.

괜히 카밀라의 상처와 집안의 치부를 건드린 것 같았는지 애런이 난처해했다.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던 그가 대뜸 재킷을 벗었다.

하얀색 바탕에 금색 단추가 달린 근위대 제복이 카밀라의 어깨에 살포시 둘러졌다.

품이 큰 재킷 아래로 붉어진 팔뚝이 모습을 감추었다.

“아, 감사해요.”

애런의 의도를 파악한 카밀라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요. 근위대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평소와 같이 담백한 어투이건만 카밀라를 내려 보는 벽안이 안타까움으로 가라앉았다.

하나 그건 카밀라가 시선을 들자 금세 사라졌다.

“그럼, 제가 목적지까지 에스코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가 다시금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부탁드려요.”

카밀라가 큼지막한 손 위에 가녀린 손을 살포시 얹었다.

두 사람은 아치 형태의 철 구조물을 통과하여 정원을 벗어났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도 나는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 이런 만남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이전 회차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번 회차에서 변한 것일까?

‘그리고 그 눈빛은 뭐였지?’

카밀라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

그 감정은 연민을 닮아 있었다.

왜 애런이 카밀라를 가엾게 바라본단 말인가?

세간에 알려진 카밀라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다.

게다가 오늘 낸시 때문에 팔에 상처를 입기도 했으니 안타까웠겠지.

애런은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우연히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가질 만한 가벼운 동정은 아니었다.

‘뭐지?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지난 두 번의 회차 내내 애런이 카밀라를 저런 식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다.

뭔가 석연찮음이 발걸음을 붙들었다.

나는 하늘의 끝이 불그스름하게 변할 때쯤 정원을 빠져나왔다.

황제와 황태자가 입장할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었다.

애런과 카밀라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금 더 지켜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3회차의 시스템 변화로 생긴 나비 효과인지 아니면 버그인지.

그도 아니면 지난 회차들에서도 일어난 일들을 내가 모르고 있었던 건지.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애써 털어내며 에메랄드 홀로 돌아갔다.

“정원에 다녀오는 길이냐? 오래 있었구나.”

에메랄드 홀로 들어서자마자 아버지가 내게 다가오셨다.

“찾으셨어요?”

“그래, 딸과 오붓하게 장미 구경 좀 하려했더니 그 사이 냉큼 나가버렸더구나.”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셔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서운하셨어요?”

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배시시 웃자 서운함으로 늘어져 있던 입가가 스륵 올라갔다.

“그래, 이 녀석아. 품 안의 자식이라더니. 이제 다 컸다고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나 보구나.”

“죄송해요, 아버지. 지금부터는 아버지 옆에 꼭 붙어 있을게요. 춤도 아버지 외에는 아무하고도 안 출 거예요.”

어떤 춤 신청도 받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에이, 그건 안 되지. 젊은 영식들을 울리면 쓰나. 나랑은 첫 춤만 함께 추자꾸나. 그거면 충분하다.”

“한 번 만이요?”

시무룩하게 되묻자 아버지의 입가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좋다. 내 두 번은 같이 춰 주마.”

“와아, 신난다.”

아이처럼 폴짝거리자 흐뭇한 시선이 닿아왔다.

앞서 못 다한 부녀간의 시간을 즐기는 사이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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