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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27)화 (27/140)

27화

“애런은 오늘 근무예요. 신입이잖아요.”

“그래? 난 또 그 녀석이 우리 로나를 두고 다른 이에게 한눈이라도 판 줄 알았지.”

“한눈을 팔다니요, 아버지도 참. 저희 둘은 친구예요. 소꿉친구.”

“너희 둘이 친구인 걸 모르는 사람도 있다더냐? 친구가 연인이 되고 또 부부도 되고 다 그런 거지.”

“아버지.”

“그래, 그래 알았다. 남녀 사이의 일은 두 사람에게 맡겨야겠지.”

아버지가 못 이기는 척 말을 돌리며 내 손을 도닥이셨다.

그가 일찌감치 애런을 사윗감으로 점찍어 두었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1회차 때 애런과 연인이 되었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뻐하셨지.’

지난 회차에 이어 이번 회차에서도 그 소망을 이루어 드리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졌다.

어느덧 덩굴 장식이 양각된 화려한 문 앞에 다다르자 사뭇 긴장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애런을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케인 백작님과 케인 백작 영애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묵직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에메랄드 홀은 그 이름에 걸맞게 천장에 박힌 큼지막한 에메랄드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덕분에 수천 개의 크리스털로 된 샹들리에가 다소 초라해 보였다.

홀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 어머 저거 셀렌느 의상실 드레스 아니에요?”

“의상실 카탈로그에서도 못 본 디자인인데 신상인가 봐요.”

“케인 백작가잖아요. 백작 영애가 셀렌느 의상실의 최신상만 입는다는 건 유명하지요.”

귀부인들은 물론이고 젊은 영애들까지 내 드레스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셀렌느 의상실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싼 의상실이었다.

그곳의 신상은 1년 전에 예약해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재물이라면 마르지 않는 케인 백작가가 아닌가. 돈으로 안 될 게 무엇이 있겠는가.

“드레스뿐인가요? 저 목걸이를 보세요. 타우라 보석점의 한정판 다이아몬드 목걸이라고요.”

“어머, 목걸이 하나만 해도 저택의 몇 채 값이라던데. 귀걸이까지. 어마어마하네요.”

“하아, 정말 저 재력만큼은 부럽네요.”

“재력뿐이겠어요? 저런 노란색 드레스는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었겠어요?”

“미모는 집안 내력인가 봐요. 백작님을 보세요. 해가 갈수록 더 멋있어지시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러게요.”

귀부인들 사이에서 앓는 것 같은 탄성이 작게 흘러나왔다.

나는 힐끗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세월이 비껴간 것 같은 뚜렷한 이목구비와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매는 물론 중후한 멋이 기품 있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젊은 시절 여인들을 여럿 울렸다더니.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미모는 여전했다.

‘로웨나의 미모가 어디에서 왔겠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도 미인이었지만 아버지인 케인 백작의 미모가 더 유명했었다.

처음 빙의했을 땐 케인 백작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려웠다.

딸 사랑이 지극한 백작의 애정공세가 어색하고 불편해서 한동안 피해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플레이 3회차가 된 지금은 아버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만큼 백작과도 많은 시간과 추억을 나눈 것이겠지.

새삼 이 세계에서 보낸 시간의 무게가 느껴져 마음이 가라앉았다.

“저렇게 다 갖췄는데 참 아쉽네요.”

어느 여인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요. 입만 딱 다물고 있으면 저리 완벽한데.”

“신은 모든 걸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 맞나 봐요.”

“안타깝네요. 백작님께서 사별하시고 애지중지 키우신 딸인데, 쯧.”

이미 잘 알고 있는 평판이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들려오니 신경이 쓰였다.

“큼큼, 로나. 요즘 매튜와 새로운 사업을 준비한다며? 매튜 그 녀석이 열의를 불태우고 있더구나.”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리시는 걸 보니 아버지의 귀에도 들렸나 보다.

내 잘못임이 아님에도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더 밝게 미소 지었다.

“네. 이번에 베히른 영지에 갔을 때 좋은 친구를 사귀었거든요. 그 친구와 함께 사업을 해 보려고요. 매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어요.”

나는 매튜와 벨라인 상단과의 동업에 대해 의논하자마자 벨라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혹시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있으면 함께 하고 싶다고 제안을 하기 위해서.

며칠 동안 함께 국자를 들고 다녔던 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는지 그녀에게서 긍정적인 답변과 함께 사업 계획서가 왔었다.

역시나 그녀는 카라나이트를 발견한 상태였다.

사업 계획서를 가지고 매튜와 검토했고 잠시 의견 충돌이 있긴 했지만 잘 마무리 되어 투자하기로 결정한 참이었다.

‘뭐, 내가 벨라를 믿어보고 싶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 잘해 보거라. 네가 사업을 배우겠다고 하니 기쁘구나.”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웃으셨다.

그렇게 부녀지간의 훈훈한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그룹을 찾아 잠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몇 영애들이 다가왔다.

“케인 영애,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모임에서 통 볼 수 없던데. 아프기라도 했던 건가요?”

내게 친근한 척 말을 건네 온 영애는 한껏 높이 올린 머리 위에 공작새 깃털처럼 보이는 장식을 여러 개 꽂고 있었다.

난해하고 과한 장식만 봐도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페니아 백작가의 샬롯 페니아.

“페니아 영애, 그동안 잘 지냈나요? 제가 좀 바빠서 모임에 나가지 못했어요.”

“아, 바빴군요.”

말끝을 늘이며 슬쩍 시선을 내렸다 올리는 것이 마치 ‘네가 바쁠 일이 뭐가 있니.’라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내가 베히른 영지에 구호물자를 가지고 갔었다는 사실은 아직 황도에까지 퍼지진 않았다.

베히른 후작가가 수해 복구 작업으로 바빠 이번 장미 축제에 참석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니 젊은 영애들이 모를 만도 했다.

다만, 베히른 영지민들에게는 많이 알려진 덕분에 명성이 10만큼 또 오른 참이었다.

“전 또 하이먼 영식과 헤어진 일로 충격 받아서 몸져누운 줄 알았지 뭐예요.”

샬롯 주위에 함께 있던 영애들이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살짝 접힌 눈매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잠시 어울려 주었을 뿐인데 제가 왜 충격을 받나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박거리자 영애들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제페스와의 관계에서 내가 매달리는 입장이었으니 태연한 내 태도가 놀랄 만도 했다.

“오히려 몸져누울 사람은 하이먼 영식이겠죠. 저처럼 모든 걸 갖춘 연인을 잃게 되었으니.”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꾸며내자 샬롯을 비롯한 영애들이 떨떠름하게 미소 지었다.

“케인 영애, 그 소문 들었나요?”

샬롯이 갑자기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넌지시 물었다.

‘또 시작이군.’

저건 로웨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발동을 거는 신호였다.

“무슨 소문이요?”

나는 적당히 맞춰주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관심을 드러내는 척 했다.

그러자 샬롯과 다른 영애들이 걸려들었구나 하는 표정으로 눈짓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황궁 정원 동쪽 끝에 미로 정원이 있는데 보름달이 떠오르는 밤에 그곳을 무사히 통과해 나오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샬롯이 내게만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속삭였다.

“마침 오늘이 바로 보름달이 뜨는 날이지 뭐예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샬롯 옆에 있던 금발 머리 영애가 의욕을 불태우는 척 호들갑을 떨었다.

“아,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딱 한 사람의 소원만 이루어준대요.”

“그럼 어쩌죠? 우리도 소원을 빌고 싶은데.”

샬롯의 말에 함께 있던 영애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순번을 정하는 게 어떨까요? 보름달이 뜨는 날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어쩜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역시 페니아 영애에요.”

서로 짜고 치는 연극이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나는 고소를 머금은 입가를 부채로 가리었다.

“케인 영애도 같이 할 거죠?” 

다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웨나의 설정대로라면 당장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모자라 제가 1번이 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영애들은 저들끼리 짜고서 로웨나가 1번이 되게 했을 것이고.

결국 오늘밤 로웨나는 혼자서 미로 정원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갇히게 되겠지.

그 정원은 매년 몇 명씩 갇히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로 매우 복잡한 미로였으니까.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외부인은 출입금지가 된 곳이었다.

저들은 그걸 알면서도 로웨나를 꼬드기는 것이었다.

멍청하고 호승심만 센 로웨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를 테니까.

나는 기대를 품은 다섯 쌍의 눈동자와 차례로 시선을 맞추고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이런, 미안해서 어쩌죠? 저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요.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를 못 느껴서요.”

샬롯은 물론이고 함께 있던 영애들 모두 대번에 뭐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다들 빠르게 부채로 표정을 감추었지만 내가 즐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저는 장미를 즐기러 가봐야겠네요. 그럼, 이만.”

그들을 향해 작게 목례를 하고는 유유히 연회홀을 나왔다.

‘어떻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사가 똑같을 수 있는지.’

세 번째 저 짓을 당하니 이젠 식상하다 못해 짜증조차 일지 않았다.

‘명성이 마이너스를 벗어나면 저런 일도 줄어들겠지.’

드레스와 맞춘 노란색 토파즈가 달린 부채를 흔들며 기분을 전환했다.

장미 축제를 위해 개방한 황궁의 중앙 정원에는 이미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연회홀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음료로 목을 축인 뒤 황제가 입장하기 전까지 장미를 구경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정원 입구에 다다르자 진한 장미향이 물씬 풍겼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량한 하늘 아래 알록달록 다양한 색상의 장미들이 가득 찬 정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채로운 색감이 기분까지도 화사하게 물들였다.

잠시 전경을 감상한 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러 번 보았던 행사라 굳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피곤하게 장미를 구경할 필요는 없었다.

장미들이 만발한 분수대 주변을 피해서 오른쪽으로 난 메타세쿼이아 길로 들어섰다.

족히 사람 키의 두세 배는 될 것 같은 높이의 나무들이 사열 받는 병사들처럼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짙은 숲내음과 함께 나를 반기는 것처럼 초록빛 잎사귀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그때 숲길의 고즈넉함을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대답을 안 해? 내 말이 우스워?”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하는데 낯설지 않은 대화 내용이 내 발목을 잡았다.

잠시 고민하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메타세쿼이아 사이로 지나가 사철나무가 울타리처럼 세워져 있는 곳을 돌자 익숙한 장면이 보였다.

오렌지빛 나는 갈색 머리를 틀어 올린 도도하고 섹시한 미인이 누군가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들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낸시 체임버. 체임버 공작가의 첫째 공녀였다.

그렇다면 낸시에게 추궁 당하고 있는 사람은 카밀라일 것이다.

원래 이 게임의 메인 플레이어이자 진짜 여주.

바깥세상에서 수도 없이 카밀라로 플레이 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플레이에서도 가끔씩 봐 왔던 인물이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카밀라는 장식이 없는 밋밋한 암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반만 올려 묶은 머리는 단조로운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동그란 눈매 안에 자리 잡은 연회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정한 눈썹 그리고 살짝 도드라진 광대와 부드러운 턱선이 잘 어우러진 이지적인 미인이었다.

“아니에요. 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셔서 놀라서 대답을 못 한 거예요.”

말만 들으면 겁에 질린 것 같지만 카밀라의 표정이나 눈빛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걸 모를 낸시가 아니었다. 그녀가 표독스럽게 카밀라를 노려보았다.

“이제 보니 겁 많은 시궁쥐인 줄 알았더니 앙큼한 고양이였구나.”

제 앞에서 주눅 들고 움츠러들어야 할 카밀라가 담담한 모습을 보이니 배알이 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사철나무 울타리 뒤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하네. 카밀라는 소심한 성격인데.’

차분하게 낸시를 대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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