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터치만 하면 되는데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이 왜 나를 배신했는지 이유라도 알면 덜 억울할 것 같았는데.
막상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고 하니 두려웠다.
어떤 진실이 나오든 그들이 나를 배신하고 죽였다는 건 변하지 않을 테니까.
나만 더 비참해질 것 같아서. 내 상처만 더 헤집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섣불리 선택할 수가 없었다.
‘……알고 싶어. 이번이 마지막 회차니까.’
만약 여기서 소멸된다면 정말 억울해서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 그것만이라도. 내가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켠 뒤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인어의 눈물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한 번 더 망설이다 결국은 수락 버튼을 눌렀다.
『확인하고 싶은 과거를 지정하십시오.
제국력 N년 N월 N일』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내가 1회차 때 제단에서 죽던 날을 입력했다.
『미래의 일자는 확인이 불가합니다. 날짜를 다시 지정하십시오.』
‘삐’하는 알림음과 함께 뜬 메시지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시간이 심장에 이리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니.
나를 배신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나의 가족이라 불리는 이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심지어 시스템조차도 부인하고 삭제해 버린 시간이었다.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해 버린 것 같아 허탈했다.
‘그래, 여기는 게임 속 세계였지. 난 게임의 캐릭터일 뿐이고.’
시스템에 의해 몇 번씩 삭제되고 재설정될 수 있는 캐릭터.
덧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나는 살아 있는 존재인데. 이렇게 가슴 아파하며 감정을 느끼는 살아 있는 존재인데.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곳은 내게 현실인데.
웃음이 흘러나왔다.
신음처럼 흘러나오던 웃음이 점점 커지고 종국에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에 결국 참지 못하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오열했다.
지난 두 번의 플레이를 하며 참아왔던 서러움과 억울함 그리고 두려움까지.
둑이 터진 듯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얼핏 조이의 놀란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눈가에 차가운 게 덧대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다시 까마득하게 의식이 멀어졌다.
설핏 감각이 돌아왔을 때 이마와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에 코끝이 찡해졌다.
‘엄마? 엄마야? 나 돌아온 거예요?’
내가 아플 때마다 엄마가 이마를 쓸어 주셨는데.
‘더 해 주세요. 엄마,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온기가 느껴지는 손에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수마에 끌려 들어갔다.
* * *
짹짹거리는 새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뻑뻑하고 둔한 느낌에 눈을 뜨는 게 힘들었다.
겨우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로 고풍스런 천장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엄마를 만났었는데.
혼란한 정신에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일어나셨네요.”
익숙한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 절망에 휩싸이게 했다.
‘꿈이었구나.’
눈물이 핑 돌아 얼른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눈이 아프세요? 그럴 만도 하죠. 어제 우시는 바람에 눈이 많이 부었으니까요.”
조이가 차가운 수건을 준비해 왔다며 침대 맡에 앉았다.
눈을 감은 채 팔을 내리자 차가운 감촉이 닿아왔다.
“어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미안, 많이 놀랐지?”
“에휴, 말도 마세요. 불편한 자세로 주무시고 계시길래 이상하다 싶었는데 눈은 부어 있고 미열도 있어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식겁했다니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어요. 처음엔 아프신 건가 해서 의원을 부르려고 했는데 이불보가 젖어 있더라고요.”
“고마워.”
만약 조이가 의원을 찾기라도 했다면 애런과 황태자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전날 무리하셔서 피곤하시다고 둘러댔어요.”
“그래. 잘했어.”
“어제 계속 차가운 수건으로 찜질을 했는데도 아직 눈이 많이 부어있네요.”
어제 왔던 건 역시 조이였나 보다.
‘엄마는 꿈이었고.’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흘러나오는 탄식을 목 너머로 삼켰다.
“이대로는 외출 못하시겠어요.”
“오후쯤엔 가라앉지 않을까?”
계속 방에 있으면 애런이 걱정된다고 찾아올지도 몰랐다.
이런 엉망인 기분으로는 애런 앞에서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최대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볼게요.”
“고마워, 역시 조이밖에 없어.”
“식사 준비해드릴게요. 잠시만 이러고 계세요.”
쉬겠다고 한 사람이 왜 그리 울고 있었는지 궁금할 법도 하건만.
조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게 너무 고마웠다.
다행히 부어있던 눈은 빠르게 가라앉았고 오후에는 구호소로 다시 나갈 수 있었다.
* * *
황태자 일행은 다음날 황도로 올라갔다.
나는 그 후에도 이틀을 더 머물다 돌아왔다.
“매튜, 벨라인 상단에 대해 알아봤어요?”
이번 구호활동에서 내 평판을 올리는 일 말고도 또 하나의 수확이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내게 앞치마를 던져줬던 벨라가 벨라인 상단의 상단주였단 사실이었다.
벨라가 상단 업무와 관련 없는 이에게 상단주임을 밝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들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벨라인 상단주임을 밝힌 것은 나를 좋게 평가했다는 뜻이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상단이긴 하지만 내실은 꽤나 튼튼합니다. 상단주도 능력이 있는 것 같고요.”
“벨라인 상단과 동업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현재 벨라인 상단에서 취급하는 품목 중에 큰 수익을 기대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만.”
매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잠시 고민했다.
“상단주의 능력을 보건대 적절한 품목을 찾아낸다면 나름 괜찮은 투자처라 생각합니다.”
적절한 품목이 있지. 아주 대박 아이템이.
벨라인 상단은 앞으로 2년 뒤에 제국 10대 상단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신생 상단이 급성장하게 된 이유는 바로 새로운 보석을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맘때일 거야. 새로운 보석을 발견하는 것이.’
베히른 영지를 돌아다니며 구호활동을 펼치던 벨라는 우연히 신비한 돌을 발견하게 된다.
홍수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난 지역에서 발견된 이 돌은 강렬한 바이올렛 블루 색상을 띠는 보석이었다.
처음에는 사파이어로 오인 받지만 사파이어와 달리 짙은 보랏빛 색감과 높은 투명도로 새로운 보석으로 인정받게 된다.
무엇보다 이 보석이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다이아몬드보다 천 배 이상 희귀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매장 지역이 전 대륙에서 오직 카라인 지역으로 제한된 데다가 한 번에 채굴할 수 있는 양도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석의 이름도 지역 이름을 따서 카라나이트로 불리게 된다.
그 희소성이 귀족들의 과시욕을 자극해 대유행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한 걸음 달리 움직였을 뿐인데 이런 대어를 낚게 되다니.’
기분이 묘하면서도 설레었다.
현재 매튜가 맡아서 하고 있는 내 사업은 커피 사업이었다.
직접 커피를 수입하거나 판매하는 일을 하는 건 아니고 몇몇 커피하우스에 투자를 하고 있는 정도였다.
나름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고는 있지만 이미 커피 시장은 레드 오션이라 큰돈을 벌 수는 없다.
하지만 카라나이트는 다르지.
벨라와 카라나이트 사업을 함께하게 된다면 명성을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돈도 벌 수 있다.
“좋아요. 그럼 벨라에게 연락해 볼게요. 혹시 준비하고 있는 사업은 없는지.”
벨라가 카라나이트를 발견했음에도 2년이나 지나 이름을 날리게 된 이유는 보석을 채굴할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투자자를 유치해야 개발이 가능하지만 아무 돈이나 받을 수는 없었다.
상단의 인지도가 낮은 데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자칫 잘못하면 투자자에게 광산을 모두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벨라는 스스로 자금을 모우면서 신중하게 투자자를 알아보았다.
그러다 보니 개발이 늦어지게 된 것이었다.
‘지난 회차에서는 쥬얼리 사업을 하는 애플린 자작의 투자를 받았었지.’
이번 회차의 투자자는 자작이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그러면 벨라인 상단의 성장도 더 빨라지겠지.
“구체적인 사업 보고서가 오면 함께 검토해 봐요.”
“함께 말입니까?”
매튜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눈썹을 으쓱였다.
“그럼, 여기 매튜 말고 내 보좌관이 또 있나요?”
“없지요.”
“사업에 대해선 매튜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요. 아, 그렇다고 매튜에게 맡겨놓고 나 몰라라 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사업 전반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은 매튜가 앞설지 몰라도 카라나이트의 상품성과 활용도에 관해선 내가 더 잘 알았다.
그러니 그에게만 맡겨둘 생각은 없었다.
“함께라고 했잖아요. 나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의견을 피력할 거예요. 그러니 가르쳐줘요. 사업에 대해서. 열심히 배울게요.”
“이거, 여러 모로 저를 놀라게 하십니다.”
매튜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기대해요. 앞으로도 더 놀라게 해줄 테니까. 내 보좌관이 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요.”
“……지켜보도록 하지요.”
그는 기대하겠다거나 약속을 지켜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충분했다.
지켜보겠다는 말은 그만큼 가능성을 타진해 보겠다는 말이니까.
이전 회차에서는 그조차도 말하지 않았던 사람이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 * *
시간이 흘러 여름 사교 시즌의 대표적인 행사라 할 수 있는 장미 축제가 황궁에서 열렸다.
황궁 정원에 각양각색의 장미가 만발할 시기에 열리는 무도회로 봄의 연회, 가을의 수확제를 포함해 황궁의 주요 행사 중 하나였다.
장미 축제는 황궁 정원에 만발한 장미를 구경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도회이기 때문에 다른 무도회보다는 이른 시간에 시작된다.
그렇다고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열리는 건 아니고 해가 한풀 꺾이고 선선해지는 늦은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황궁의 3대 행사는 황도에 거하는 귀족이라면 중병으로 앓아눕지 않는 이상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가능하면 오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나는 마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황궁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대리석과 황금 돔으로 빛나는 황궁은 오늘도 어김없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애런이 파트너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이냐.”
마차에서 내리자 아버지께서 못마땅한 투로 물으셨다.
아버지와 함께 무도회에 입장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이후부터 계속 뭔가를 묻고 싶은 눈치셨는데.
아마도 이걸 묻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혹시나 내가 마음이 상한 건 아닌가 싶어 참고 참다가 물으시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