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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25)화 (25/140)

25화

“걱정하지 마.”

다행히 이번에는 답이 돌아왔다.

아핀트를 10마리쯤 처리했을 때 발밑에서부터 땅이 정화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핀트들도 더는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종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대공이 복잡한 표정으로 퓨릭서의 빈 병을 들고 있었다.

“정화가 끝났나보군.”

대공의 짤막한 감상에 고개를 돌리니 실레니아 호수가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감탄하며 호숫가로 다가가자 얼굴을 가려주던 보호막이 사라지고 산뜻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머리까지 감싸고 있던 슈트를 벗어 내리자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목덜미를 식혀 주었다.

호수의 맑고 푸른 물 위로 뭉게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아쉽다.”

“뭐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대공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곳이 인어의 호수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웠다는데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요.”

막 정화를 끝낸 땅은 불모지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 씨앗이 심기고 싹이 터 자라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터.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기까지는 적어도 한 세대는 지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보고 싶나?”

“아마 저는 못 볼 거예요.”

몇 년 뒤에 나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원래 세계로 귀환하든 이곳에서 소멸되든.

엔딩을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 호수처럼 내 미래도 투명하게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개에 가려져 있던 에일숲보다도 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에 암담하기만 했다.

“원한다면 볼 수 있다.”

마치 내가 원하기라도 하면 지금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의아하게 대공을 바라보니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눈길이 닿아왔다.

문득 대공저의 아늑한 정원이 떠올랐다. 

여기처럼 불모지였던 곳이 대공으로 인해 한순간에 변모했었지.

이곳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건가?

이번 회차가 이 세계에서, 아니 어쩌면 모든 세계를 통틀어 내 마지막 삶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실레니아 호수의 본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고 싶어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대공이 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그의 발밑에서부터 붉은빛이 피어오르더니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캔버스에 화가의 붓칠이 더해질 때마다 색이 입혀지고 생동감이 더해지는 것처럼 실레니아 호수도 붉은빛이 닿는 곳마다 변해갔다.

새싹이 움트고 줄기가 자라나며 종국에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경이롭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호숫가 주위를 둘러싼 능수버들은 소녀의 풀어헤친 생머리처럼 가는 가지를 길게 늘어뜨렸다.

능수버들과 함께 자란 꽃나무들은 분홍색과 하얀색 꽃을 피워내 호수 위로 앙증맞은 꽃잎들을 띄워 보냈다.

“아름다워요.”

순식간에 다채롭고 매혹적으로 변한 풍경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꽃내음에 흠뻑 취해 있다가 뒤늦게 대공이 생각나 몸을 돌렸다.

평생 다시없을 큰 선물을 해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감사해요.”

인사를 전하자 대공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원래도 얼굴이 하얀 편이긴 했지만 지금은 왠지 창백하게 보였다.

게다가 날렵한 콧날 위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게 아닌가.

수많은 아핀트를 처리할 때도 호흡 한 번 흔들리지 않고,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가만히 서 있던 사람이 왜 저렇게 땀이 맺혔단 말인가.

‘아,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지.’

이 많은 꽃과 나무들은 모두 대공이 키워낸 것이 아닌가.

때마침 신력 사용에 제한이 있다는 시스템 정보가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왜 그렇게 묻지?”

“얼굴이 창백하시잖아요.”

손수건을 찾기 위해 몸을 더듬다 현재 슈트 차림인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이 장갑을 벗은 뒤 대공에게 손을 뻗었다.

“여기에도 땀이-.”

그러나 내 손은 대공에게 닿지 못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저 때문인데.”

“너 때문이 아니다.”

“여기 오신 것도 저를 도와주기 위해서이고, 호수를 복원하신 건도 저 때문이잖아요.”

“너 때문이 아니라니까.”

이 고집쟁이. 울컥 화가 솟아올랐다.

“그렇게 강하게 부인하지 않으셔도 돼요. 착각 안 해요.”

크게 소리치자 대공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전하를 어떻게 깨우게 되었는지 알기 전까지는 제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도와주신 거잖아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대공에게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나는 차분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래도 감사드려요. 전하께서 와주시지 않았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대공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몰라요. 정말 죽겠구나 싶었거든요.”

그때 만약 대공이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신 것도 감사드려요.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요. 지난 아픔이 다 잊힐 만큼.”

그래, 실레니아 호수가 생명력을 품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과정을 보며 위로받았다.

땅을 박차고 나와 움튼 새싹이, 싱그러운 꽃망울을 터트리는 들꽃이 아물지 못하고 진물을 흘려대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오랜 시간 제 모습을 잃고 고통  받더라도 포기하기 않고 견뎌내면 언젠가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게 될 거라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나도 끝까지 버티고 이겨내면 로웨나 케인이 아니라 최수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고마웠어요.

대공을 향해 진심을 다해 웃자 나를 마주한 금빛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뒤이어 그의 머리 위로 호감도 9%가 깜빡거렸다.

* * *

로웨나가 이동 스크롤을 찢어 베히른 후작성으로 돌아가자마자 필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무리하셨습니다.”

그가 굳은 얼굴로 카이스를 살폈다.

카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니까.

변명을 해보자면 자신은 볼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로웨나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려서.

힐끗 쳐다본 그녀의 얼굴이 꼭 울 것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원한다면 볼 수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 거라고.

카이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요. 지난 아픔이 잊힐 만큼.”

아련하게 흩어지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거짓말. 잊지 못했잖아.

울 것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던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웃을 거면 웃지 말았어야지.

아픈 걸 감추고 싶었으면 웃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가 감추고 싶어 했던 상처를 엿보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로웨나 케인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선 특별한 사항이 없었는데.

혹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인가.

카이스는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눈을 떴다.

“돌아가자.”

나지막한 명령에 필립이 동행했다.

대공저로 돌아오자마자 고갈되었던 신력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에 누웠다.

“아직 다 회복되지도 않으셨는데 너무 많은 힘을 쓰셨습니다.”

“앞으로 한계 이상으로 힘을 쓰는 일은 없을 거다.”

“마수 처리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늘 해오던 일이지 않습니까?”

“로웨나에게 네 정체를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

“그 여자만 아니었으면 주군께서 회복되시기도 전에 폴루티아에 가실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필립의 냉랭한 얼굴 위로 불만이 어렸다.

“정화 능력을 가진 이다. 우리 일을 도와주고 있고.”

폴루티아를 정화하고 회복시키는 건 자신과 필립의 사명이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땅인 폴루티아에 그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용병이나 사냥꾼들조차도.

그런데 여인이, 그것도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제 발로 그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해머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해야 한다고 말하던 절박함은 진심으로 보였다.

실제로도 그녀는 마수들과의 싸움에 필사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지킬 이유는 충분하지.”

문득 자신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로웨나가 떠올랐다.

갑자기 제 옷을 뒤지고 장갑을 벗길래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지켜보았다.

그러다 불쑥 뻗어온 손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었다.

뒤늦게 콧잔등을 손으로 훔쳐보고서야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

이 세상에서 제 걱정을 하는 사람은 딱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을 받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가슴께에 깃털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간지럽다고 긁기에는 애매하지만 신경은 쓰이는 뭐, 그런 느낌?

카이스의 매끈한 이마가 살포시 좁혀졌다.

* * *

 『로웨나 케인

  레벨 : 13    명성 : -87

  HP : 220    GP : 170

  체력 : 138   근력 : 136

  민첩 : 132   지성 : 100 』

후작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상태창을 켰다.

13레벨.

확실히 급이 높은 마수를 처리하니 레벨이 올라가는 속도가 달라졌다.

‘힘든 만큼 보상이 주어지니 할 만 해.’

노력한다고 해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호감도와 비교하면 모험 퀘스트가 훨씬 보람이 있었다.

그동안 매일 체력훈련의 보상으로 받은 포인트는 주로 민첩과 지성 스탯에 분배한 덕분에 스탯의 불균형도 많이 해소된 상태였다.

창밖을 보니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문에 조이가 오겠네.’

다행히 내가 자고 있는 줄 알았는지 그 사이 특별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슈트를 벗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인벤토리에 넣어 놓으면 오염도 자동으로 정화되기에 따로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당장 몸을 씻고 싶었지만 잠깐이라도 좀 쉬고 싶었다.

어차피 저녁 식사 전에 조이가 깨우러 올 테니 그때 씻어도 되겠지.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알림에 메시지함을 확인했다.

『퀘스트 ‘인어의 눈물을 멈추게 하라.’를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인어의 눈물이 지급됩니다.』

아이템 창을 열자 진주알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인어의 눈물이 두 개 보였다.

인어의 눈물이란 아이템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이템 : 인어의 눈물

 종류 : 묘약

 실레니아 호수를 지키는 인어들이 흘린 눈물로 만든 신비의 묘약입니다. 인어의 눈물을 먹으면 원하는 과거를 볼 수 있습니다.

단, 지정된 날, 하루만 볼 수 있습니다.』

원하는 과거를 볼 수 있단 말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과거라고 하면 지난 회차도 적용되는 걸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죽임을 당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지 몰라.

평온하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인어의 눈물로 뻗은 손끝이 잘게 떨렸다.

주저 없이 뻗어지던 손은 그림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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