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황태자가 대련하는 모습은 지난 2회차 때 많이 봐 왔던 터라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그럼에도 능청스럽게 구는 평소와 달리 검을 잡자마자 진중하고 날카롭게 변하는 모습이 새삼 새로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련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두 번째 상대와의 대련도 끝나 버렸다.
수건으로 땀을 훔치던 황태자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디서 뜨거운 눈길이 느껴진다 했더니 여기였군.”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늘도 전하의 대련을 보며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애런이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퍼 경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쑥스럽군. 나야말로 자네와 대련할 때마다 배우는 걸.”
“과찬이십니다.”
겸양의 말을 내뱉으면서도 황태자의 인정이 기쁜지 애런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나저나 영애가 검술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 어찌나 시선이 열렬하던지. 하마터면 그 시선에 데일 뻔했지 뭔가.”
황태자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느물거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바람둥이 같은 대사에 버터 한 통을 먹은 것 같은 느끼함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황태자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백이면 백 다 얼굴을 붉히던데. 역시 독특해.”
네에, 네에. 그러니까 나한테 헛수작질 말고 님 좋다고 줄 선 여자들에게나 가시지요.
나는 썩어 들어가려는 표정을 간신히 수습하며 영업용 미소를 만들어 냈다.
“검술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어릴 적부터 애런이 훈련하는 걸 종종 보았던 터라 익숙합니다.”
“아, 그렇군. 하퍼 경과는 어릴 적부터 친우이니 그럴 수 있겠군.”
황태자가 나와 애런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운동은 마친 건가?”
“네.”
“오늘 점심은 같이 하지 않겠나? 어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못해 서운했다네.”
그러고 보니 어제 성으로 돌아왔을 때 황태자가 나와 식사를 함께 하려고 기다렸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황태자와 함께 영주 성에 머물 경우 적어도 한 번은 식사를 하는 게 관례인지라 피하긴 어려운 제안이었다.
“알겠습니다.”
선선히 대답하자 황태자가 흡족해했다.
“하퍼 경, 자네도 함께 하지.”
“영광입니다.”
황태자는 애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머리 위로 호감도 8%가 반짝거렸다.
슬쩍 애런을 쳐다보니 그의 호감도도 8%로 올라가 있었다.
‘좋았어. 조금만 더 올리면 돼.’
10%의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의지를 다지며 말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점심 식사에는 베히른 후작과 그의 보좌관도 함께 한 덕분에 체하는 일 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오후 내내 쉴 예정이니 방해하지 말라며 사용인들을 물렸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이불 아래에 베개를 넣어 자고 있는 것처럼 꾸며놓았다.
‘이 정도면 두어 시간 정도는 괜찮겠지.’
캐노피까지 내린 뒤 인벤토리를 열어 새로운 슈트를 꺼냈다.
슈트는 전투 중 손상이 되어도 퀘스트가 새로 열리면 복구되는 것 같았다.
레벨 10이 되어서 그런지 슈트의 레벨도 2로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슈트를 갈아입고 이동 스크롤을 찢자 한 순간에 검은 땅, 폴루티아로 이동했다.
실레니아 호수는 제국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폴루티아가 확산되는 지점에 경계선처럼 자리한 곳이었다.
인어의 호수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한 호수였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눈에 둘러볼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호수에선 끈끈한 검은 액체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해머를 소환한 뒤 조심스럽게 호수 가까이 다가갔다.
아핀트는 중급 마수라 이전에 처리했던 포피룬처럼 한 방에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공과 훈련하면서 아핀트와도 모의 전투를 치러봤다는 점이었다.
호수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긴장으로 입 안이 말라왔다.
호숫가로 예상되는 지점을 세 걸음 정도 앞두었을 때 기척을 감지한 것인지 호수의 수면이 일렁거렸다.
뒤이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핀트였다.
회갈색을 띠는 아핀트는 늑대장어를 닮았지만 그보다 몇 배나 굵고 긴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수중생물처럼 생긴 외양과는 달리 물 밖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뱀처럼 기어 다녔다.
아핀트는 천천히 기어오다가 공격 가능 범위 안에 먹잇감이 들어오면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속도를 높인다.
먹잇감을 향해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게 달려든 뒤 그대로 먹잇감을 물어 즉사시킨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안 되었다.
꾸물꾸물 호수에서 기어 나오는 아핀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한꺼번에 달려들면 위험해.’
아핀트는 저들끼리 협공해서 먹잇감을 한쪽으로 몰아넣는 습성이 있었다.
나는 대공과의 훈련을 떠올리며 저들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해머는 근거리 공격엔 탁월하지만 장거리 공격엔 취약하기에 아핀트와의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내 몸보다 두꺼운 아핀트에게 칭칭 감겨 죽을 수도 있었다.
열 걸음.
아핀트의 공격 범위였다.
제일 앞에 있는 아핀트와의 거리를 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딱 열 걸음 남았을 때 아핀트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동시에 나도 해머를 크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아핀트가 저 멀리 날아갔다.
“역시 한 번으로는 안 되는구나.”
아핀트의 머리 위로 줄어든 HP가 보였다. 절반이 줄어든 것을 보니 두 번이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공격을 신호탄으로 알아들은 아핀트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어 올리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독사를 닮은 아핀트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이는 족족 해머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퀘스트창에서는 숫자가 카운트 되었다.
“젠장, 해머의 자루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좋았을 텐데.”
타격 범위가 좁아 아핀트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너무 컸다.
한 곳에 있다간 바로 포위되기 때문에 장소를 이동하며 처리하다보니 점점 숨이 가빠졌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가 발목을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아핀트였다.
‘뒤에서 공격하다니.’
앞으로 고꾸라지면서도 해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꼬리로 내 발목을 잡아챈 놈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부딪힌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몸에 힘을 주며 일어나려고 애썼다.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허벅지까지 타고 오른 아핀트부터 해머로 후려쳤다.
충격을 받은 아핀트가 힘을 빼고 늘어진 순간 얼른 몸에서 떼어내고는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내 앉은키 보다 높게 머리를 쳐든 아핀트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앉아 있는 상태라 다른 곳으로 뛰어갈 수도 없었다.
“젠장.”
이번에도 물리겠구나 싶었다.
보통 사람은 아핀트의 송곳니에 물리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플레이어인 나는 즉사하지는 않겠지만 아핀트의 독으로 인해 사지가 마비되고 HP가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만약 마비된 상태에서 아핀트에 잡혀 몸이 칭칭 감기게 된다면?
옥죄는 압력에 HP가 떨어짐과 동시에 몸이 터져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슈트 레벨이 올랐으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별로 미덥지는 않지만 지금 의지할 건 슈트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일어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쉼 없이 해머를 휘두르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가 밝아졌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아핀트들이 두 동강이 난 채 나뒹굴고 있었다.
해머를 휘두르는 것도 잊은 채 섬광처럼 지나간 붉은빛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쯧, 정신 안 차리나.”
얄밉던 목소리가 이 순간 왜 이리 반가운지.
만약 서 있었다면 달려가 안겼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대공이 퀘스트 장소와 일시를 알려달라고 했던 건 내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황도를 떠나 있는 지금은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지만 약속을 한 일이니 그냥 알려준 것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도와주러 오다니.
감격스럽다 못해 눈물이 핑 돌았다.
“스승님!”
반가움에 크게 외치자 대공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는 신력으로 만든 것인지 붉은빛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당장 일어나! 죽기 싫으면.”
대공의 호통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핀트들을 처리해주고 있어서 그렇지 결코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몇 마리 남았나?”
“247마리요.”
힐끗 퀘스트창을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아직 멀었군. 내가 엄호할 테니 빨리 목표치나 채워.”
“그런데 전하, 보호 장비도 없이 오시면 어떡해요?”
대공은 지금 가벼운 훈련복 차림에 얼굴은 물론 손도 훤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난 상관없다. 너나 신경 써.”
대공이 내 옆으로 달려드는 아핀트를 베어 버리며 말했다.
무한대의 신력이 이런 곳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건가?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나는 일단 대공에 관한 의문은 접어둔 채 아핀트를 처리하는데 집중했다.
대공이 사각지대에서 달려드는 아핀트들을 처리해주는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목표치를 채워나갈 수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중급 마수라 그런지 하급 마수인 포피룬을 처리할 때보다 레벨 업 메시지가 자주 떴다.
『행운의 주사위 스킬 발동!
마수의 결정석을 획득하였습니다.』
결정석 획득이란 말에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손에서 해머를 놓을 뻔 했다.
결정석은 마수의 핵과 같은 것으로 중급 이상의 마수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또한 모든 마수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강한 마기가 오랜 세월 응축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결정석이기 때문이었다.
결정석이 왜 값어치가 있는 것이냐 하면 이것으로 무기를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만. 결정석은 마력을 높여주는 건데. 내 해머에도 적용이 되나?’
리라이트의 무기들은 모두 마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내 해머는 신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나.
“정신 안 차려?”
“죄송합니다!”
대공의 질타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큰 소리로 대꾸한 뒤 열심히 해머를 휘둘렀다.
298, 299, 300.
드디어!
목표치인 300마리를 채웠다는 기쁨과 안도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다 멈칫했다.
‘아, 맞다. 정화부터.’
지난번 퀘스트의 경험상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바로 마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땅을 정화시키는 것이 안전을 확보하는 지름길이었다.
나는 힐끗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핀트를 처리하느라 바빠 보였다.
때는 이때다 싶어 얼른 등을 돌린 채 대공 몰래 인벤토리에서 퓨릭서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바닥에 부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퓨릭서를 채갔다.
“……!”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대공이 퓨릭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전하, 그거 가져가시면 안 돼요. 여기 정화해야 마수가 사라진단 말이에요.”
“확인해 볼 게 있으니 넌 어서 저것들이나 처리하도록.”
대공이 나를 아핀트에게로 밀어 넣었다.
“네? 저 목표치 다 채웠단 말이에요!”
반사적으로 달려드는 아핀트를 처리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하, 그거 한 병 밖에 없다고요!”
퓨릭서는 퀘스트가 열릴 때마다 한 병씩만 주어진다.
만약 대공이 퓨릭서를 가진 채 떠나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