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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23)화 (23/140)

23화

“그럼, 잠시 저곳에서 좀 쉬시지요. 마실 거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매튜가 관리자 막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마워요.”

나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여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퀘스트> ‘인어의 눈물을 멈추게 하라.’

인어의 보금자리인 실레니아 호수를 차지한 마수 아핀트를 처리하고 호수를 정화해 인어의 눈물을 멈추게 하십시오. 

목표 1: 아핀트 처리 (0/300)

목표 2: 실레니아 호수 정화

보상 : 인어의 눈물 2개』

하필 외부에 나와 있을 때 퀘스트가 뜨다니.

이곳에서는 몰래 이동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혹여 상처라도 입고 돌아오게 되면 곤란해진다.

상태창을 열어보니 어느새 레벨 10에 도달해 있었다.

아마도 대공과의 훈련과 매일 같이 이어지는 체력 훈련으로 다음 퀘스트를 열 수 있는 조건을 달성한 것 같았다.

‘일단 대공과의 약속부터 지켜야겠지.’

나는 간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찢어 퀘스트 장소와 마수의 종류 그리고 토벌 날짜를 적었다.

관리자 막사 안에는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내용을 다 적은 뒤 목에 걸고 있던 피리를 힘껏 불었다.

“어?”

분명 세게 불었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고장 났나? 그럴 리가 없는데.”

떨어뜨린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망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공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닐 것이다.

면전에서 욕을 하면 했지 뒤로 속일 사람 같진 않았으니까.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붉은색 피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얼떨결에 손을 내밀자 붉은 새가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새는 긴 꼬리와 작은 부리를 가지고 있었다.

까맣고 작은 눈으로 또랑또랑하게 쳐다보던 새가 내 손을 부리로 콕콕 쪼아댔다.

아플 거라 지레짐작하고 얼굴을 찌푸린 게 무색하게도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솜털이 건드리는 것처럼 간지러울 뿐이었다.

“편지를 달란 말이구나?”

미리 적어두었던 쪽지를 돌돌 말아 끈으로 묶은 뒤 새 다리에 달아주려 손을 뻗었는데.

“……?”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가 갑자기 내 손에 들려 있는 쪽지를 한 입에 훅 삼켜 버렸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얘, 너 괜찮니?”

아무리 작게 찢은 종이라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작은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새가 종이를 먹는 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나는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새를 살폈다. 

이대로 질식사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러나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새는 멀쩡했다.

오히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말갛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허, 참.”

잠시 뭐에 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충격을 추스르기도 전에 막사 문 너머에서 매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간식거리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게 없더군요.”

“괜찮아요. 구호소에서 간식거리를 찾는 게 양심 없는 일이지 않나요?”

“송구하오나 그런 양심이 있으신 줄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하극상을 보이는 매튜를 흘겨보았다.

무례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매튜와 말싸움을 해봐야 나만 피곤해질 뿐이었다.

몇 번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따져대는 솜씨가 아주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사니까.

“물이나 내 놔요.”

나는 매튜의 손에 들려 있는 물잔을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순순히 내게 물잔을 건네주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자 붉은 새에게 농락당해 멍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황태자 전하께선 계속 계시나요?”

“떠날 채비를 하고 계십니다. 피해 지역을 직접 돌아볼 예정이신 것 같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황태자나 애런이나 얼른 황도로 돌아가면 좋겠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처럼 저도 아가씨가 신기합니다.”

매튜가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뭐가요?”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알 것 같았지만 모른 척하고 물었다.

“사실 대뜸 구호 물품을 사들이라고 하셨을 때 아가씨 친구분들이 또 이상한 말을 전했구나 싶었습니다.”

나름 내가 달라졌다는 걸 보여준 줄 알았는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역시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말로만 끝낼 줄 알았는데 내가 직접 여기까지 오니 신기하다?”

“뭐, 그렇죠. 앞치마 차림도 그렇고. 설마 손수 국자를 드실 줄은 몰랐습니다.”

매튜가 다리를 꼬며 피식 웃었다.

“그럼 이제 상사로 따를 만한가요?”

“저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닙니다.”

네에, 어련하시겠어요. 나도 같이 코웃음을 쳐주었다.

“그래도 포기할 정도는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네요.”

“그렇다 해도 저를 해고하진 않으실 거잖습니까?”

저건 무슨 똥배짱이지?

어이없다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튜가 턱을 치켜들었다.

“저만한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가씨의 보좌관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겠습니까?”

얄미울 정도로 오만한 말이지만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짜증이 났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간 내게도 다른 선택지가 생기겠지요.”

“그때가 되면 저는 더 유능해져 있을 텐데요.”

잘난 척 좀 그만하라고 눈을 흘기자 매튜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갑자기 변하시게 된 계기가 뭡니까?”

그가 자세를 반듯하게 고치며 진중하게 물었다.

“세상이 나를 호구로 여긴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아서?”

어떤 놈은 돈줄로, 어떤 놈은 제물로 나를 이용하기만 했다.

‘생각해 보니 로웨나 케인, 너 정말 불쌍하구나.’

내가 빙의한 캐릭터이자 이제는 나이기도 한 로웨나에게 연민이 일었다.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튜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니 썩 좋은 표정은 아닐 것 같았다.

“이제부터 제대로 살아볼 테니 날 좀 도와줘요. 내 유일한 보좌관이잖아요.”

매튜를 향해 악수를 청하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가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 번의 플레이 동안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보좌관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뒤 연무장으로 향했다.

달리기를 시작하자 개별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나를 힐끗거렸다.

이런 식의 주목은 피하고 싶어 훈련을 건너뛸까도 생각했지만 훈련 보상으로 얻는 포인트가 아까웠다.

어차피 모험 퀘스트를 수행하러 가야 하니 몸도 풀어야 했고.

‘훈련을 시작할 때만도 몇 걸음도 못 뛰고 헉헉 댔었는데.’

한결 여유로워진 호흡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어? 로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크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애런이 보였다.

애런과의 만남은 예상했던 터라 당황하지 않고 그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요즘 매일 운동하고 있거든. 마침 연무장도 있길래 나왔지.”

“네가? 운동을?”

애런이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응, 지난번에 제페스가 나를 겁박할 때 결심했었어.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길러야겠다고.”

“아…….”

그때의 일을 떠올린 것인지 햇살처럼 밝았던 얼굴이 대번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처음엔 무지 힘들었는데 지금은 두 바퀴도 거뜬히 뛰어.”

애런이 강아지처럼 처진 눈을 깜박거리며 얼떨떨하게 나를 응시했다.

잠시 후 충격을 좀 추슬렀는지 그가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기특하네.”

마디 굵은 손이 아이를 칭찬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사적으로 피하려는 몸에 힘을 주었다. 이곳엔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정한 손길에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묻혀 있던 옛 추억들이 아릿한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이것 참.”

다행히 또 하나의 익숙한 목소리가 추억 속에서 허우적댈 뻔한 나를 꺼내주었다.

“전하.”

애런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예를 갖추었다.

“영애는 매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군. 이번엔 연무장인가?”

황태자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 아침 운동만한 것이 없어서요.”

나는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말을 직접 실천하는 레이디는 아마 영애밖에 없을 것 같군.”

황태자가 팔짱을 낀 채 특이한 종자를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황태자의 흥미를 채워줄 생각은 없었기에 담백하게 대꾸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사단 오전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운동을 마쳐야 해서요.”

나는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연무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로나, 같이 해.”

내 옆으로 달려온 애런이 나와 달리는 속도를 맞추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나와 애런이 소꿉친구라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굳이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 주목 받을 필요는 없었다.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애런이 기쁜 기색을 내비쳤다.

내가 애런과 함께 정해진 훈련량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동안 황태자도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여기, 물.”

목표량을 다 채우고 벤치에 앉아 땀을 닦고 있는데 애런이 물통을 내밀었다.

“어, 고마워.”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늘었던데? 솔직히 놀랐어.”

애런이 내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나는 어느 정도 갈증을 해소하고는 물통을 그에게 넘겼다.

그도 목이 탔는지 벌컥 벌컥 물을 들이켰다.

“한 달은 정말 힘들었어. 매일 같이 슐레만 경에게 안겨 다녔을 정도니까.”

“대견하네.”

애런이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도닥였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순간 움찔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숨을 죽였다.

“아, 미안. 네가 싫어하는데. 버릇이 되어서 잘 안 고쳐지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긴장을 느낀 것인지 애런이 머쓱하게 손을 물렸다.

덩달아 나도 어색해져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찰나 정적이 돌았지만 나는 애써 굳어진 근육을 움직여 미소 비슷한 걸 만들어냈다.

“괜찮아. 너도 차차 적응이 되겠지.”

“…….”

애런은 마음을 놓으면서도 어딘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불편하게 느껴질 때쯤 다행히 다른 화젯거리가 생겼다.

때마침 황태자가 후작가의 기사와 대련을 시작한 것이었다.

“애런, 저기 봐. 전하께서 대련을 하시려나봐. 나 대련하는 거 처음 보는데.”

“전하께선 황궁에 계실 때도 가끔씩 근위대 기사들과 대련을 하셔.”

애런이 내가 가리킨 곳을 확인하고는 신이 나서 근위대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매번 전하를 상대하려면 힘들겠네.”

“전하와 검을 맞댈 수 있다는 건 영광이지.”

애런의 눈빛이 자부심으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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