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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22)화 (22/140)

22화

“좋아요. 그럼, 해 보세요.”

여인이 호기롭게 내게 국자를 안겨주었다.

“대신 나중에 옷이 더러워졌네, 다쳤네 어쩌구 하면서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마세요.”

“내 가문을 걸고 맹세하죠.”

내가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듯 여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당당하게 그 시선을 마주하자 여인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게 손짓했다.

“따라오세요.”

제 자리로 돌아간 여인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내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앞치마랑 머릿수건부터 하세요.”

여인이 건넨 것들은 뻣뻣하고 거친 옷감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군말 없이 앞치마를 입고 머릿수건을 동여매자 여인이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줄 서 있는 사람들 보이시죠? 각자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시면 돼요.”

내가 복장을 갖추자마자 여인이 간단히 할 일을 설명했다.

솥단지 안을 들여다보니 야채스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알겠어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 바로 손을 움직였다.

“맛있게 드세요.”

그릇에 스튜를 덜어주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하자 옆얼굴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여인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 쳐다볼 시간에 한 국자라도 더 뜨는 게 어때요? 여기 기다리시는 분들도 많은데.”

내 핀잔에 여인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달리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나눠주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솥이 바닥을 보였다.

“다 된 건가요?”

“점심은요. 저녁 때 또 해야 해요.”

“매일 나오나 봐요.”

“일손이 부족하니까요. 다친 것도 아니고, 돌볼 아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니 도와야지요.”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까이 있는 돌들을 끌어다 그 위에 앉았다.

그동안 훈련으로 체력을 키운 덕분에 그리 힘든 건 아니었지만 오래 서 있어서 그런지 다리랑 허리가 뻐근했다.

“같이 앉을래요?”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길래 돌을 더 끌어다 옆에 놓아주며 물었다.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던 여인이 이내 돌 위에 털썩 앉았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노시네.”

“말을 너무 편하게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말 한다고 타박하실 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여인이 피식 웃었다.

“뭐, 그 정도로 속이 좁진 않아요.”

빙긋 웃어 보이자 여인이 손을 척 내밀었다.

“벨라예요.”

“로웨나 케인이에요.”

내 이름을 말하자마자 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내 이름이 유명하긴 하지만 지방에 사는 평민들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는 아닐 텐데.

예상외의 반응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 알아요?”

“아, 네.”

벨라는 본인이 생각해도 과하게 반응했다 느꼈는지 금방 표정을 가다듬었다.

“황도에서 일하는 가족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씩 황도 소식을 듣곤 해요.”

“그럼, 내 소문에 대해선 잘 알겠네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하자 벨라가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유명하시더라고요.”

“어때요? 직접 그 소문의 주인공을 만난 느낌이?”

“반전 매력이 있으시네요.”

재미있는 표현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일하고 있던 이들이 이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뭐, 이제부터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요.”

“큰 깨달음이라도 얻으셨나 보네요.”

“그랬죠. 남자친구가 날 호구로 여기는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피우고 다닌다는 걸 알았거든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자 벨라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내가 제페스를 찬 일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졌다고나 할까? 암튼 그래요.”

벨라를 향해 눈을 찡긋거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솥 어디에다 옮기면 될까요?”

“아, 그건 우리 둘이선 못 옮겨요.”

“왜 우리가 옮겨요? 주위에 든든한 일꾼들이 많이 있는데.”

“저기요, 이거 옮기는 것 좀 도와줄래요?”

식사를 마치고 앉아 있던 사내들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하자 그들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설정은 이럴 때 편했다.

“어머, 정말 고마워요. 다들 힘이 세시구나.”

작게 손뼉을 치며 감탄을 내뱉자 사내들의 팔에 힘이 불끈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벨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주방으로 솥이 옮겨지는 걸 확인하고 난 뒤 벨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저녁 식사 때 봐요.”

“저녁에도 나오시게요?”

“저녁때까지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거든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벨라를 향해 웃어주고는 물품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구호소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돌리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보였다.

그것도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이.

언제 마중을 나간 것인지 후작의 보좌관이 황태자를 향해 예를 갖추고 있었다.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자네가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짝 군기가 들어간 보좌관이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 전하시라고?”

“전하께서 정말 여길 오셨단 말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이내 진짜 황태자라는 걸 확인하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예를 갖췄다.

“다들 불의의 재해로 얼마나 황망했을지 안다. 황실에서도 구호와 복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니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가 친히 방문해 주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이들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황태자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의 뒤로 베히른 후작과 황궁 기사단이 따랐다.

그들 사이에서 비죽 위로 튀어나온 금발 머리가 눈에 띄었다.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나를 발견한 애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내가 여기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얼굴로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이미 후작에게 내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나를 발견한 황태자는 빙그레 웃었다.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온 황태자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영애를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게.”

“저도 여기서 전하를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차분하게 대꾸했지만 내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도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왜 바뀐 거지?’

지난 두 번의 회차 모두 구호팀 책임자는 리메로 백작이었다.

일정이 변한 것도 모자라 책임자까지 달라지다니.

버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큰 변화였다.

뭐가 달라진 거지? 내가 베히른에 온 것 때문인가?

하지만 지난 회차들에서도 주어진 설정값을 벗어난 행동들은 많이 했었다.

그때에는 이런 변수들이 생기지 않았는데 왜 이번 회차에선 변화가 생긴 것일까?

만약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면 내겐 여러모로 불리해진다.

게임 스토리를 알고 있다는 이점이 사라질 테니.

“안전지대였던 베히른이 수해를 입었으니 이보다 더 중대한 사안이 어디 있나? 당연히 내가 와 봐야지.”

지난 회차에서도 그 중대한 사안이 일어났지만 님은 오지 않았잖아요.

그렇다고 황태자에게 왜 왔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혼자서 답답함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난 그대가 여기 있는 게 더 신기하군.”

장난스런 어투에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애써 풀었다.

“같은 제국민으로서 베히른이 처한 어려움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귀족들도 케인 백작가를 본받아야 할 텐데 말이야.”

황태자가 함께 온 부관들과 기사들에게 들으라는 듯 언성을 높였다.

진정으로 감동을 받았다거나 단순히 칭찬을 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다른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정치적 발언이었다.

나는 황태자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창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황태자의 시선이 스튜 국물로 얼룩진 앞치마에 닿았다. 

그제야 내가 머릿수건만 풀고 아직 앞치마를 풀지 않은 걸 깨달았다. 

“가져온 물품을 확인받는 동안 일손을 조금 보탰을 뿐입니다.”

“……그대는 여러 모로 재미있는 사람이야.”

누가 들으면 내가 황태자 앞에서 광대놀음이라도 한 줄 알겠네.

재미있다는 말은 지난 회차에서 황태자를 공략하면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의외라거나 신기하단 말은 들어봤지만.

뜬금없는 말에 잠시 황당했지만 금방 털어버렸다.

어차피 깊은 관계를 맺을 사이도 아니니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아봤자 대화만 길어질 뿐이라 나는 잔잔한 미소로 응수했다.

띠링!

『명성이 +10 되었습니다.

수해 복구에 도움을 준 일로 베히른 후작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이 사실이 알려질수록 명성이 더 오를 예정입니다.』

‘오호, 역시 효과가 있어.’

황태자가 앞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전하, 해가 지기 전에 구호소들을 모두 둘러보시려면 이만 이동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때마침 베히른 후작이 나서서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그래야겠군. 영애는 나중에 후작성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

얼른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주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 황태자의 머리 위로 호감도 7%가 반짝거렸다.

황태자와 후작이 자리를 뜨자 뒤를 따르던 이들도 차례로 물러갔다.

“로나.”

슬그머니 행렬에서 빠져나온 애런이 나를 작게 불렀다.

“애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나도. 아까 네가 여기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유순한 얼굴 위로 반가운 기색이 비쳤다.

동시에 호감도 바가 앞으로 찔끔 나아갔다.

호감도 7%.

슬쩍 호감도를 확인하고는 애런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나도 갑자기 오게 된 거야. 그동안 잘 지냈어?”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연출하며 물었다.

“응. 난 잘 지냈어. 미안, 쉬는 날 찾아간다고 해 놓고 지금껏 한 번도 못 가서.”

애런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내 눈치를 봤다.

“괜찮아. 너 요즘 집에도 못 들어간다며? 많이 바쁘지?”

부드럽게 응수하자 마음이 놓였는지 애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 좋다. 황도에 올라가면 내가 꼭 시간 내서 찾아갈게.”

“너무 무리하지 마.”

“하퍼 경!”

그때 앞서 가고 있던 일행 중 하나가 애런을 불렀다.

애런이 동료 기사와 나를 번갈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얼른 가 봐.”

가보라며 등을 떠밀어주자 애런이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이따 숙소에서 봐.”

작게 속삭이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차가운 제단 위에서 나를 외면하고 돌아서던 모습과는 대조될 정도로.

베인 상처에 짠물이 닿은 것처럼 가슴 깊숙한 곳이 쓰라렸다.

이전보다 옅어진 통증에 안도가 일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해졌다.

내가 겪었던 배신의 상처와 죽음의 고통이 시간에 무뎌질 정도로 그리 가벼웠던 것인가 해서.

2회차 때는 매일 같이 죽음의 순간을 악몽으로 꾸는 것도 모자라 애런을 마주할 때마다 몸이 떨렸었는데.

아무리 게임 속 삶이라지만 내겐 현실인데 너무 덧없게 느껴졌다.

“아가씨, 물품 확인을 모두 마쳤습니다.”

때마침 매튜가 다가와 우울함에 잠겨가던 나를 끌어올렸다.

“수고했어요.”

“여기 계속 계실 겁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조금 전만 해도 저녁까지 있을 생각이었는데 황태자와 애런 때문에 빨리 떠나고 싶어졌다.

“저녁에도 나오시게요?”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묻던 벨라가 내 발걸음을 붙들었다.

‘약속을 어기면 안 되겠지.’

작게 한숨을 쉬며 매튜에게 대답했다.

“저녁 식사 때 돕기로 했어요.”

내 차림새를 살핀 매튜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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