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21)화 (21/140)

21화

“제국에서 한 해 동안 수해가 몇 건이나 일어날까요?”

“매년 서너 건은 일어나지요. 특히 여름에.”

“그렇죠. 발생 지역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매해 일어난다는 점은 확실하죠.”

베히른을 정확히 집어 말할 수 없으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국에서 폭우로 인한 수해는 여름마다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리적 특성상 수해를 입는 지역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히른이 이슈가 되었던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린 때 이른 폭우.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홍수가 일어난 적이 없는 수해 안전지대라 불리던 베히른에서 홍수가 났다는 점이었다.

후에 나온 조사 결과에 따르면 베히른 동쪽에 자리한 폴루티아의 면적이 넓어진 탓이라고 했다.

“수해를 입는 지역이 적어도 한 곳 이상은 생길 테니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복구에 도움을 주시겠다는 겁니까?”

“그래요. 멍청하다는 평판엔 별 도움이 되진 않을지 몰라도 오만하고 제멋대로라는 평가는 나아지지 않겠어요?”

매튜가 턱을 매만지며 나를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내가 생각해 낸 거예요.”

매튜의 눈초리가 의심스럽게 변했지만 나는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좋습니다.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품 구입까지 3주 안에 마쳐줬으면 좋겠어요.”

“왜 꼭 3주입니까?”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지금 준비해야 물품 구입이 수월하지 않겠어요? 여름이 되면 구호 물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거 아니에요.”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매튜는 어딘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내리떴다.

말간 미소로 응수하자 결국 그가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일단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내 부탁을 들어줘서.”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매튜가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방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만만치 않은 사람이네.”

눈빛, 표정, 말투 심지어 자세까지도 딱딱하고 차가운 사람이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돌려 말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정확하게 전달하는 점이 다른 귀족들을 대하는 것보단 편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3주 후 물품이 모두 마련되자 기다렸다는 듯 베히른에 홍수가 발생했다.

* * *

  

“생각보다 심각하네.”

홍수가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지금 막 베히른에 들어선 참이었다.

강물이 범람하면서 밀려 내려온 토사가 거리는 물론 상점과 주택들까지 덮쳐 지반 자체가 높아진 것처럼 보였다.

저지대는 여전히 물이 빠지지 않은 상태라 사람들이 나무판자를 물에 띄워 이동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물 위에 고개를 내민 채 바동거리고 있는 몇몇 동물들이 눈에 띄었다.

“산간 지대는 산사태로 인해 아예 마을이 사라진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매튜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마차 창문 너머로 무너진 집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물난리 통에 부모를 잃은 것인지 주저앉아 울고 있는 아이들도 보였다.

마음이 무겁고 착잡해졌다.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달려왔음에도 삼일 만에 도착한 터였다.

그럼에도 복구는커녕 수해민들이 머물 곳조차 아직 마련되지 않은 듯 했다.

“여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홍수가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베히른에서.”

매튜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수해 안전지대라 불렸던 곳이 이렇게 될 줄 아무도 몰랐겠지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죠. 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내게서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 매튜의 차가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늘의 일을 사람이 어찌 알겠어요. 어쨌든 다행이네요. 빠르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매튜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가씨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네요. 3주 안에 준비하지 못했다면 베히른에 도움을 주긴 어려웠을 겁니다.”

‘3주’에 힘이 들어간 것 같지만 모르는 척 했다.

“일이 되려니 또 이렇게 되네요. 우리 가문에 따르는 사업 운이 내게도 있나 봐요.”

일부러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자 매튜가 뜻 모를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 창문 너머로 슐레만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자 먼저 내린 매튜가 나를 에스코트 했다.

베히른 후작부부와 그들의 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케인 양, 이리 만나게 되어 반갑네.”

풍채 좋은 후작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먼 길 오는데 고생했죠?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후작부인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케인 양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우리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거든.”

“성에 비축된 물품을 풀고는 있지만 워낙 피해 규모가 커서 물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답니다.”

“도움을 드릴 수 있어 기쁠 따름입니다.”

내가 공손하게 대답하자 후작부부가 의외라는 듯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긴 내 딸 헤일리라네. 케인 양과 비슷한 또래일 걸세.”

“저희 영지에 도움을 주신 케인 백작님께 꼭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직접 물품을 가져온 내가 앞에 있는데도 굳이 아버지를 집어 말하는 것을 보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싹을 닮은 연두빛 눈동자에 못마땅함이 어려 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지난 2회차 동안 딱히 그녀와 인사나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내가 빙의하기 전에 로웨나와 무슨 일이 있었나?’

게임에 빙의한 시점이자 매번 리셋되는 시점이 로웨나가 18살 되는 봄이니 그 전에 일어난 일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사건 여부와 상관없이 로웨나가 언제 어디서나 제멋대로 굴었기 때문에 베히른 영애의 반응이 크게 당황스럽진 않았다.

그렇지만 내 평판을 쇄신하기 위해 벌인 일을 이대로 아버지의 공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베히른 영애의 말에 반박하려 입을 여는데 매튜가 조금 더 빨랐다.

“구호물품은 백작님이 아닌 저희 아가씨께서 직접 준비하신 것입니다. 또한 베히른 영지를 돕기로 하신 것도 오로지 아가씨의 결정이셨습니다.”

“그렇다 해도 가문의 돈을 사용한 것이니 백작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이 합당하지요.”

“헤일리.”

후작이 나무라는 투로 부르자 그녀가 입을 비죽이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베히른 영애의 감사 인사는 백작님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매튜가 공손하게 말하자 베히른 영애의 표정이 다시금 의기양양하게 변했다.

“허나, 잘못 알고 계신 부분은 정정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베히른 영애의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갔다.

“물품 대금은 모두 저희 아가씨 소유의 재산으로 구매한 것입니다. 직접 운영하시는 사업체가 있으시거든요.”

말을 마친 매튜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베히른 영애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매튜의 가문은 고든 자작가로 그는 둘째 아들이었다.

고든 자작가는 황궁의 관료들을 많이 배출한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베히른 영애보다 가문의 작위가 낮아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더는 꼬투리 잡을 것이 없자 베히른 영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당황한 후작부인이 딸에게 엄한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녀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케인 양이 사업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

후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공부 삼아 운영하는 작은 사업체입니다. 제 보좌관의 능력이 뛰어나서 제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요.”

실제로도 그러하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매튜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유능한 보좌관을 얻는 것 또한 능력일세.”

후작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여보, 영애도 피곤할 텐데 계속 밖에 세워둘 참이에요?”

“아, 내가 실례했군. 묵을 곳으로 안내하겠네.”

“감사합니다.”

후작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후작성의 전경이 제대로 보였다.

고풍스러운 성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외관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일행 모두 별관에서 지내면 될 걸세. 필요한 것이 있다면 편하게 말하게.”

“배려 감사합니다.”

“황실에서 보낸 구호품도 조만간 도착할 걸세. 복구를 지원할 인력도 보내주신다더군.”

“언제쯤 도착 예정인가요?”

지난 회차에서도 있었던 일이라 담담하게 물었다.

황실에서도 베히른의 홍수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후작의 지원 요청이 있고 나서야 움직였다.

그래서 지원팀은 홍수가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아마 내일쯤 도착할 것 같네.”

나는 순간 벌어지려는 입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경악에 찬 탄성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지난 두 번의 회차 모두 황실에서 보낸 지원팀이 베히른에 내려오는 일정은 똑같았다.

내가 이렇게 자세히 아는 이유는 애런이 늘 지원팀에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런이 오기 전에 구호활동까지 마치고 돌아가려고 했건만.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내일 도착한다는 것은 내가 출발하고 바로 다음날 황도를 떠났다는 뜻이었다.

베히른의 홍수에 대해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뭐가 달라진 거지?’

순식간에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까운 구호소로 향했다.

원래 일정보다 조금 일찍 길을 나선 참이었다. 최대한 애런과 마주치는 걸 피하기 위해서.

마을마다 구호소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오늘 방문하기로 한 곳은 성벽 근처에 마련된 곳이었다.

“이 주변을 정리하는 데도 시간이 걸려서 아직 임시 거처로 사용할 막사도 다 설치하지 못했습니다.”

안내자로 따라온 후작의 보좌관이 구호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막사 없이 바닥에 앉아 있는 이재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쪽에서는 일꾼들이 막사를 짓느라 바빴다.

“슐레만 경, 우리 기사들도 막사 짓는 일을 도왔으면 해요.”

“알겠습니다.”

슐레만 경이 다른 기사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한 뒤 내게 다시 돌아왔다.

“가져온 물품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후작의 보좌관에게 묻자 그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물품별로 보관 장소가 다르거든요.”

“매튜, 물품 전달을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그는 바로 보좌관과 함께 짐마차로 향했다.

식자재는 물론이고 옷과 신발, 모포, 이불 그리고 약품까지 준비해 온 터라 정리하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 사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싶어 둘러보던 중 커다란 솥단지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고소한 음식 냄새가 코로 흘러 들어왔다.

솥단지 주위에는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른 여인들이 음식을 배급하고 있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묻자 음식을 나눠주던 이들은 물론 줄을 서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근처에서 음식을 나눠주던 여인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바다처럼 선명한 푸른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인이 길게 뻗은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보아하니 손에 물도 안 묻혀 보신 분 같은데. 여기 있다 괜히 다치지 마시고 저기 관리인 막사에 앉아 계세요.”

“손에 물을 묻혀 봤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아요?”

물론 로웨나는 한 번도 묻혀본 적 없겠지만 나 최수현은 아니란 말씀이야.

여인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일을 하기 위해 수수한 차림으로 오긴 했지만 고급 옷감에 호위 기사까지 함께 있으니 내가 귀족이라는 건 금방 알아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뻔뻔하게 나갔다.

귀족이라고 해서 도울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 불공평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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