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윽.”
아니, 저거 그냥 그림 아니었어? 뭐 이리 실제로 부딪힌 것처럼 아파?
“실제 아카라의 힘보다 1/100로 줄인 거니 그리 아프진 않을 거다.”
“지금 놀리시는 거죠?”
배가 뚫리는 줄 알았는데 아프진 않을 거다?
통증으로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장난하나?
순간 화가 치밀어 뾰족하게 쳐다보자 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내 머리에 턱하니 손을 올리고는 신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제야 고통이 사라지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이런 체력을 가지고 무슨 배짱으로 폴루티아에 갔는지 모르겠군.”
대공이 작게 혀를 차며 내게서 물러났다.
“강해질 거예요. 오늘보다 내일 더 강해지고, 내일보다 모레 더 강해질 거예요.”
이번엔 절대로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을 거야.
입술을 꽉 깨물며 대공을 올려다보자 금빛 눈동자가 작게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일어나라.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 있을 건가.”
그러나 착각이었던 건지 다시금 마주했을 땐 평소와 같은 무감한 눈빛이었다.
대공의 핀잔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제대로 해 볼게요.”
해머를 들어 올리며 공격 자세를 취하자 대공이 다시 아카라를 움직였다.
처음 몇 번은 계속 뒤로 나동그라졌지만 아카라의 패턴에 익숙해지니 두 번 만에 처리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대공은 아카라의 수를 계속 늘려갔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고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갈 때쯤 훈련이 끝났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한 것도 아닌데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당장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대공이 함께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모험 퀘스트를 할 때 완료 보상이 따로 없는 대신 마수를 처리하면서 자연히 스탯이 올라가 레벨 업이 된다.
지금도 마수를 처리하는 것과 똑같이 움직였으니 그만큼의 체력과 기술이 향상되었을 터.
‘그래서 레벨이 올랐나보네.’
본의 아니게 모의 실전 훈련이 퀘스트와 같은 효과를 내게 된 것이었다.
피곤하게 몸만 굴리는 건 아닌가 했는데 생각보다 얻는 게 많아 절로 웃음이 났다.
“견딜 만한가 보군.”
얼굴 위로 큰 그림자가 졌다.
대공이 비딱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카라를 마스터했다는 사실이 뿌듯해서요. 모두 전하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분명 감사 인사를 전했건만 대공이 눈썹을 찌푸렸다.
‘뭐, 또 뭐가 불만인데?’
개운했던 기분이 대공의 불만 어린 눈썹에 단박에 가라앉았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신력으로 나를 회복시켜주었다.
몸이 가뿐해졌음에도 나는 여전히 누운 채 대공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하께 연락을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결계가 있어서 우편배달이 불가능하던데요.”
“넌 그냥 들어올 수 있지 않나. 오늘도 그냥 쳐들어왔으면서.”
“그거야 연락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랬죠. 전하께서 바쁘실 때도 있을 텐데 매번 그럴 수는 없어요.”
“훈련은 이틀에 한 번. 계시몽을 꾸었을 땐 이걸로 연락해.”
대공이 내게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길이가 되는 붉은색 막대기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피리. 그걸 불면 전령새가 올 것이다. 그 아이에게 서한을 전하면 된다.”
이 작고 가는 막대가 피리라니 신기했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고 있자니 대공이 다시금 피리를 가져갔다.
“어? 줬다 뺏어 가시는 게 어디 있어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따지자 대공의 단정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피리를 손으로 훑어 내리자 순식간에 목에 걸 수 있는 줄이 생겼다.
“아…….”
나는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미리 좀 말씀해주시지. 왜 사람을 오해하게 만드세요?”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참 뻔뻔해.”
“전하께서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드시는 건 맞잖아요. 조금 친절하게 알려주시면 어디 덧나나요?”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이자 대공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며 내 손에 툭하고 피리를 떨어뜨렸다.
“가져가.”
나는 못 이기는 척하며 피리를 목에 걸었다.
“아, 그리고 제 마부랑 호위기사도 들여보내 주시면 안 돼요? 정문에서 현관까지 너무 멀어요.”
“안 돼.”
“그럼, 정문 근처에서 폴루티아로 오고 가고 할 게요. 현관까지 왔다간 미리 지쳐버릴 것 같아서요.”
대공이 불만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계시 내용에 대해서는 방문하기 전에 알려드릴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대공이 팔짱을 낀 채 눈을 낮게 내리떴다.
그러다 다시금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올 땐 내가 마중을 나가지. 그리고 돌아갈 땐 필립이 데려다 줄 테니 마차와 기사는 돌려보내도록.”
“필립이 누구인데요?”
“오늘 너를 안내한 사람.”
아, 그 암갈색 머리의 그 분?
어지간히도 다른 사람을 들이기 싫은가 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오면 피리를 불어라. 그럼 내가 마중을 나가지.”
“그럴게요.”
나는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대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왜 그러냐며 스윽 눈썹을 들어올렸다.
“저 옷 바꿔주세요.”
대공이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원래대로 바뀌었다.
“다음에는 아예 훈련복으로 입고 올게요.”
“상관없다.”
“에이, 그래도 전하를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그게 편하고요.”
알아서 하란 듯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정문까지 데려다주지.”
같이 걸어가 주겠다는 말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자 순간 풍경이 달라졌다.
“어?”
“이만 가봐라.”
순식간에 정문 근처로 데려다준 대공이 짧은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대마법사도 아니고. 도대체 정체가 뭐야?’
분명 신력을 사용하는 데 제한이 있다고 했는데 그는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위급 마법 수준으로.
뭐가 어찌됐든 내게 도움이 되면 되는 거 아닌가.
악패를 뽑았다며 내 똥손을 원망했었는데 이 정도면 조커라 불러도 될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레벨 업에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사실 첫 모험 퀘스트에서 위기를 경험한 이후 다음 퀘스트가 두렵고 암담했었는데.
대공 덕분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뿐만 아니라 대공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까지 생겼으니 1석 2조가 아닌가.
연무장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대공의 호감도는 8%였다.
지난번처럼 급등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수확이었다.
나는 만족스런 기분으로 정문을 빠져나갔다.
* * *
집에 돌아와 씻은 뒤 바로 침대에 누웠다.
캐노피에 새겨진 꽃문양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제 명성도 신경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난 2회차에서는 황태자를 공략 대상으로 삼았기에 사교 모임 참석은 필수였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서는 형편없는 평판을 올리는 것은 물론 다양한 사교계 인맥이 필요했으니까.
‘생각만 해도 피곤해.’
웃으면서 돌려 깎아대는 사교계에서 다시금 밑바닥부터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뭔가 다른 방법이 없나?’
한방에 이미지를 쇄신하고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이름을 알릴만한 방법이.
“아, 맞다.”
이맘때에 큰 홍수가 났었지. 거기가 어디더라.
“그래, 베히른.”
스토리 초반에 그곳에 갑작스런 폭우가 내려 홍수가 일어났었다.
애런이 복구 작업을 위해 베히른 영지로 가는 바람에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수해로 고통 받을 이들을 생각하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지만.
“누가 내 말을 믿어주겠느냐고.”
멍청한 로웨나의 말을.
더구나 제방과 방책은 영주 관할이라 외부인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베히른 영지의 영주는 베히른 후작이었다.
‘아버지께 부탁을 드려볼까?’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패스.
‘할 수 없지. 대비를 할 수 없다면 복구를 돕는 수밖에.’
얼추 시간을 따져보니 홍수가 일어나기까지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나는 설렁줄을 당겼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매튜 좀 불러줘.”
조이가 알겠다며 방을 나갔다.
매튜는 내 보좌관이었다. 아버지께서 친히 보내주신.
케인 백작은 로웨나도 사업을 배우길 원했다.
그도 딸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사업으로 승승장구해 온 케인 백작가의 핏줄이니 배우면 될 것이라 안일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교육과 테스트 명목으로 망해도 딱히 상관없는 사업체 하나를 떼어 주고는 유능한 보좌관을 붙여주었다.
‘백작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지.’
로웨나는 머리 아픈 일은 질색인지라 사업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보좌관에게 모든 걸 맡기고 수익금만 받아다 용돈으로 탕진하느라 바빴다.
‘로웨나가 한 일 중에 유일하게 잘한 일이지.’
만약 그녀가 직접 사업에 관여했다면 지금쯤 사업체는 남아 있지 않을 테고 나는 유용한 패를 잃었을 것이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잠시 후 남색 고수머리에 은테 안경을 쓴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이번이 3회차 플레이지만 그를 직접 마주한 횟수는 다 합쳐도 채 열 번이 되지 않았다.
당장 남주들 공략이 시급했던 터라 사업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 되지 않는 만남의 경험상 매튜는 시간 낭비를 제일 질색했기에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매튜, 자료 조사를 부탁하려고 불렀어요.”
로웨나가 업무 지시를 내리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매튜의 딱딱한 눈매가 조금 크게 벌어졌다.
“필요하신 자료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자금과 수해 지역에 필요한 구호 물품과 구입비용에 대해서 정리해줬으면 좋겠어요.”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눈썹을 덮을 정도로 내려온 고수머리 아래 올리브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냥 궁금해서요.”
“단순히 아가씨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한 작업 치고는 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인력 낭비, 시간 낭비입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딱딱한 어조였다.
‘못하겠다는 말을 참으로 길게도 하네.’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수 없지만 인력 낭비, 시간 낭비는 아니니 알아봐줘요.”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제가 무엇을 믿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이익이 없는 일에 제 노동을 투입하는 건 매우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지금 바로 돈을 투자하자는 것도 아닌데 되게 깐깐하게 구네.
하긴 로웨나의 평판을 생각하면 저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수익이 없는 일이라 하지 않겠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기대수익을 제시해 주면 될 일.
“이득이 있는 일이에요.”
“무엇인가요? 제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하겠습니다.”
“내 평판이 올라갈 거예요.”
매튜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쉬이 올라갈 평판이 아닙니다.”
“그러니 돈이 많이 들겠지요.”
매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길바닥에 돈을 뿌리자는 얘기는 아니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그럼,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제대로 설명해 보십시오.”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듯 올리브색 눈동자가 고집스럽게 빛났다.
“이리로 앉아요.”
매튜는 순순히 내 맞은편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