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현관문을 두드리자 지난번에 나를 데려다주었던 암갈색 머리의 사내가 나왔다.
그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서 오십시오.”
사내가 내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전하를 뵙고 싶어서 왔어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혹시나 사전 연락 없이 찾아왔다고 내쫓는 건 아닌가 싶어 잠시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순순히 안내해주었다.
마치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사내를 따라 정원으로 향하니 하얀색 가제보 안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대공이 보였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대공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찾아왔음에도 그의 얼굴엔 어떤 당황도 보이지 않았다.
“대공 전하,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직접 찾아오는 것 외에는 달리 연락드릴 방법이 없더라고요.”
“우선 앉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대공이 제 앞을 가리키며 턱을 까딱였다.
나는 자리에 앉기 전에 이곳까지 안내해 준 암갈색 머리의 사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지난번엔 저 사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평범한 마부 같지는 않았다.
나를 맞이한 것을 보면 이 저택을 총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매우 폐쇄적인 대공이 유일하게 고용한 사람이란 점에서 대공의 최측근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좋은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내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가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대공의 맞은편에 앉자 그가 바로 물음을 던졌다.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요.”
“그날 하지 않았나?”
“무려 생명의 은인이신데 어찌 말로만 인사를 드릴 수 있겠어요.”
나는 가지고 온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대공이 이게 뭐냐며 눈썹을 까딱였다.
“제가 직접 만든 사과파이에요.”
물론 9할은 주방장의 도움이었지만.
“전하께서는 모든 걸 가지신 분이라 무엇을 선물로 드려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 마음과 정성을 담았으니 약소하더라도 예쁘게 봐주세요.”
솔직히 어떤 선물을 해야 대공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었다.
고가의 선물이라면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다.
문제는 대공의 성격상 이딴 건 나도 살 수 있다며 관심도 두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 고민하다 문득 대공저에 사용인들은 물론 가족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다른 이가 요리해주는 음식을 먹어 본 지 오래되었을 것 같단 생각에 사과파이를 만들게 된 것이었다.
대공은 말없이 상자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손에는 긴장으로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상자를 느릿하게 제 앞으로 끌고 간 대공이 뚜껑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달큰한 사과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모양은 그럴듯하군.”
그야. 주방장의 도움이 9할이니까.
“한 번 드셔보세요. 드시고 있던 차와도 잘 어울릴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도 잘 맞춘 것인지.
운이 좋았다고 여기며 파이 한 조각을 꺼내려다 뒤늦게 접시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담을 접시가 없네.”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순간 테이블에 빈 접시와 포크가 나타났다.
“전하께서 하신 거예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력으로 이런 것도 가능해요?”
감탄 어린 물음에도 대공은 아무런 대답 없이 접시에 파이를 담았다.
파이가 담긴 두 개의 접시 중 하나는 내게 밀어준 뒤 그는 제 파이를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황제보다도 더 우아했다.
‘말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멋있긴 정말 멋있단 말이지.’
나는 대공의 미모에 감탄하며 오물거리는 붉은 입술을 쳐다보았다.
시식을 했을 때만 해도 맛은 자신 있었는데 막상 대공을 마주하니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다.
파이를 목 뒤로 넘긴 것인지 도드라진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고 붉은 입술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럼에도 대공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맛에 맞으세요?”
초조한 마음에 결국 내가 먼저 물어보았다.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사과파이를 응시하던 그가 내려놓았던 포크를 다시 들었다.
느리지만 차츰 줄어드는 파이를 보며 안도했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맛있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될 것을.’
칭찬에 참으로 인색한 남자였다.
대공 몰래 눈을 흘겨주고는 내 몫의 파이를 먹었다.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데다 사과의 식감과 달달한 필링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파이 한 조각을 다 먹은 대공이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계시몽은 또 받았나?”
파이에 대한 평가를 기대하고 있던 내게 대공은 전혀 다른 화제를 던졌다.
서운하긴 했지만 이 또한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주제라 착실하게 대답했다.
“아직이요.”
“앞으로도 가족들 몰래 다닐 생각인가?”
“그럴 순 없을 것 같아요. 지난번에 아버지께 많이 혼났거든요.”
퀘스트는 계속 주어질 텐데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진퇴양난이었다.
해결방법에 대해 많이 고민해봤지만 한 가지 외에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테이블 위에 두 팔을 기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전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대공이 말해보라며 눈짓을 했다.
“해머와 계시몽에 대해 아는 분은 전하밖에 안 계시거든요. 그러니 전하께서 좀 도와주세요.”
“어떻게 도와달란 거지?”
“계시를 받게 되면 제가 대공저로 찾아올게요. 아버지는 제가 대공저를 방문하는 걸로 아실 테니 걱정하지 않으시겠죠.”
“여기서 바로 폴루티아로 이동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서요.”
대공은 팔짱을 끼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제가 나쁜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국을 위해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데 좀 도와주세요.”
두 손을 모으며 최대한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좋다. 단, 계시의 내용을 내게도 공유하도록.”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퀘스트 지역과 마수에 대한 정보는 전해줘도 문제될 것이 없기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한 가지 더 있다.”
혹시나 곤란한 걸 요구하지는 않을까 싶어 긴장이 되었다.
“내게 훈련을 받도록.”
“네?”
이게 무슨 소리야. 훈련을 받으라니. 뭘?
“네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는 잘 알 텐데. 또다시 죽고 싶은 건가?”
그에 관해선 할 말이 없는지라 입이 다물어졌다.
분명 시스템은 레벨 5면 할 수 있는 퀘스트라고 했단 말이야.
아이템으로 주어진 슈트가 그리 쉽게 뚫릴 줄 알았나.
“다음엔 괜찮을 거예요.”
레벨도 올랐고 더불어 슈트도 업그레이드 되었으니까.
“네가 만났던 마수는 하위종 중에서도 최하위종이다.”
“매일 체력훈련을 하고 있어요.”
“체력만 늘려서 될 일이 아니야. 마수의 특징을 모르면 아무리 강한 자라도 당할 수 있다.”
“전하께서는 마수에 대해 잘 아신단 말인가요?”
“나만큼 잘 아는 이는 없을 거다.”
“어떻게요?”
100년 전에도 마수가 있었던가? 그보다 기사도 아닌 대공이 마수를 어떻게 잘 아는 거지?
“……상대를 많이 해봤으니까.”
찰나 대공의 금빛 눈동자에 뜻 모를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대답을 듣고 나니 궁금한 게 더 많아졌지만 묻지는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을 보니 설명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마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생각하던 참이라 대공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내겐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전하를 믿고 따라가 볼게요.”
“말이 나온 김에 오늘부터 바로 훈련을 시작하지.”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제가 지금 차림새가…….”
나는 치맛자락을 매만지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에게 잘 보이고 싶어 드레스며 구두며 모양 좋은 것들로만 차려입은 상태라 훈련은 무리였다.
느릿하게 나를 훑어본 대공이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동시에 가벼운 훈련복 차림으로 바뀌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상당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탐날 정도로.
‘이 능력이 있으면 매번 옷 갈아입는 번거로움도 줄 텐데.’
그뿐인가. 옷값도 절약할 수 있겠지.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에 빠져 있는데 대공이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뒤쫓아 갔다.
“그런데 전하, 아리파 산에는 무슨 일로 오셨던 거예요?”
천천히 걷고 있던 대공이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마수 처리하러.”
“왜요? 황실에서도 토벌을 하지 않는데 전하께서 나서실 이유는 없잖아요.”
“황실이 안 하니까.”
음, 애국심이 있는 건가? 의외네. 그럼 왜 제국을 멸망시킨 거지?
어째 알면 알수록 어떤 사람인지 더 모르겠다.
대공이 안내한 곳은 널따란 연무장이었다.
“하루에 한 종류의 마수에 대해 알려주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라이트’를 플레이하며 여러 종류의 마수를 상대해봤지만 여기선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다.
왜냐하면 게임은 무기 종류를 선택하고 공격을 클릭하면 자동 플레이되었기 때문이다.
마수의 약점에 대한 정보는 애초에 없었고 무기 중에 해머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2차원의 그림이 아니라 실전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랐지.’
게다가 포피룬은 게임에 나오지 않았던 마수였다.
이는 앞으로도 내가 모르는 마수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대공의 설명에 집중했다.
“이 마수는 아카라다.”
대공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멧돼지와 늑대를 섞어 놓은 듯한 마수의 형상이 나타났다.
붉은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신력으로 만든 것 같았다.
‘신력 운용력이 장난 아니네.’
고위급 마법사도 마력으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다.
“아카라는 송곳니에 독을 품고 있지.”
그가 가리킨 곳에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길고 뾰족하게 솟아난 두 개의 송곳니가 있었다.
아카라의 몸집은 일반 늑대의 5배 정도로 컸다.
“이놈의 약점은 목 뒤, 이 부분이다.”
대공이 아카라의 머리에서 목덜미로 이어지는 부분을 짚었다.
“검을 이용하면 그곳을 찌를 수 있지만 전 해머를 사용하잖아요.”
“그러니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겠지. 해머를 꺼내봐라.”
팔찌에 달린 해머를 터치하자 순식간에 실물로 변한 해머가 내 손에 쥐어졌다.
“네 해머는 신력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닿는 것만으로도 마기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마수의 신체를 조각내 버릴 수 있지.”
“지난번 마수는 닿자마자 가루가 되었어요.”
“하위종이라 마기가 약하니까. 상대적으로 네 해머가 가진 신력이 더 크니 단숨에 산산 조각나 버린 것이다.”
그 말은 곧 내 해머의 신력보다 더 강한 마기를 가진 마수를 만나면 단번에 쓰러뜨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대공이 해머에 손을 올리고 뭔가를 가늠했다.
“아카라는 단번에 처리하긴 어려울 것 같군. 두어 번 정도면 소멸될 것이다.”
듣고 나니 하루빨리 레벨을 올려 해머의 GP는 물론 등급도 올려야 할 것 같았다.
대공은 설명을 마저 이어갔다.
“이 송곳니를 먼저 공격해서 부수도록. 그래야 독에 당하지 않을 테니.”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못 미더워하는 것 같은 눈빛에 내가 자신감 있게 해머를 들어올렸다.
“걱정 마세요. 할 수 있어요.”
“아카라의 공격 방식은 빠르게 달려와 아래에서부터 위로 머리를 들이받는다. 실전이라 생각하고 움직여봐.”
대공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카라의 형상이 갑자기 내게 달려왔다.
설명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제대로 타격을 못했다. 덕분에 나는 뒤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