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 고양이를 아끼셨군요.”
대화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황태자의 이야기에 호응을 보였다.
“……온 마음을 다 바쳤지. 아마, 내 첫 사랑일 걸?”
황태자가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전하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고양이는 행복했겠네요.”
“행복했을까?”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그곳엔 보라색 히아신스 사이로 봉긋 솟아오른 흙더미가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는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의 고양이이니 호화롭게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잔디가 입혀진 것을 보니 고양이가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어쩐지. 이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에게서 음울한 분위기가 느껴지더라니.
‘황태자가 동물을 좋아했었던가?’
그가 애완동물을 키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고양이 때문인가?
문득 지난 회차 내내 그에게서 한 번도 이 고양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무척이나 좋아하고 아꼈던 고양이라면 지나가는 말이라도 했을 법 한데.
갑자기 입 안이 씁쓰름해졌다.
옛 애인에 관한 이야기도 아닌데 왜 내게는 하지 않았던 걸까?
도대체 이 사람에게 난 어떤 의미였던 거지? 우리가 진정 연인이었을까?
이러다간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댈 것 같아 얼른 상념을 털어버렸다.
이제와 이런 고민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억지로 입술을 움직였다.
“행복했을 거예요. 전하께서 마음을 주셨으니까요.”
입으로만 전하던 허상이 아닌 진짜 마음을.
미처 다 감추지 못해 흘러나온 자조가 공기 중에 나부끼며 흩어졌다.
“……마음 같은 것 보단, 오래 사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왠지 모르게 가라앉은 것 같은 목소리에 힐끗 고개를 드니 공허한 얼굴이 보였다.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장난스런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당신에겐 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군요.’
이름만 연인이었을 뿐.
실상 나도 황태자에게 온전히 나를 내보이지 않았으니 그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우리는 어쩌면 시작부터 서로에게 선을 그어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에게는 이만큼만.
아니면 그 모든 게 연기였을지도. 서로의 목적을 위한 연기.
‘내게 이 사람을 원망하고 비난할 자격이 있기는 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소리 내어 웃고 싶어졌다.
나는 혹여 웃음이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입 안의 살을 꾹 깨물었다.
생각에 젖어 있느라 너무 오래 시선을 둔 모양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초록빛 눈동자가 흔들린 것도 같았지만 너무 찰나의 일이라 확신할 순 없었다.
“이런, 내가 별 소리를 다했군. 그대가 이해해주게. 오늘 고양이 기일이라 내 마음이 울적했거든.”
과장되게 눈썹 끝을 늘어뜨린 황태자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녹안은 장난스레 빛나고 있었다.
“저도 강아지를 길러본 경험이 있어서 전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아니지만. 말하고 보니 우리 예삐가 보고 싶어졌다.
“다행이야. 미첼 경은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런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더군. 동지를 만난 것 같아 기뻐.”
언제 우울했냐는 듯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먹구름이 단숨에 사라졌다.
덩달아 그의 머리 위에 보이는 호감도 바가 깜박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호감도 5%.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늘 일은 그대와 나만의 비밀일세.”
황태자가 검지를 입가에 대며 속삭였다.
“내가 이리 섬세한 남자라는 걸 알면 여인들이 날 가만두려 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지금도 피곤하거든.”
그가 매우 곤란하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자랑질이라 무던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재수가 없었다.
나는 구겨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펴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 고마워.”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그래.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군.”
그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냉큼 몸을 돌려 빠른 속도로 회랑을 벗어났다.
‘피곤하다. 집에 가자마자 자야지.’
애런도 모자라 황태자까지 상대하느라 진이 빠지다 못해 두통이 일었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아이고, 힘들다.”
오늘도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 체력훈련을 다녀온 참이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이제는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훈련 중에 간간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아가씨, 씻고 누우셔야죠.”
“조이, 나 힘들어.”
침대하고 딱 붙어버린 것처럼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아가씨한테서 땀 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아세요?”
조이는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칭얼대는 나를 억지로 일으켰다.
“오늘 간식은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슈크림으로 준비해놨어요?”
“정말?”
“네, 그러니 얼른 일어나세요.”
슈크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입에 군침이 돌았다.
나는 끙끙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슈크림이 보였다.
나는 얼른 달려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역시 기분 전환에는 슈크림이 딱이지.”
슈크림 한 개를 집어 입에 쏙 넣자 슈가 부드럽게 뭉그러지며 달콤한 크림에 젖어 들어갔다.
“맛있다.”
연이어 슈크림 서너 개를 입속으로 집어넣자 입 안이 꽉 찬 느낌이 기분 좋았다.
당분을 보충하고 나니 남아 있던 피로마저도 싹 가시는 듯 했다.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 보상부터 확인해 볼까?
『실전훈련 과제를 완수하여 6포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분배되지 않은 포인트에 ‘6’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스탯에 분배하기 시작했다.
『로웨나 케인
레벨 : 8 명성 : -97
HP : 170 GP : 120
체력 : 87 근력 : 83
민첩 : 72 지성 : 35』
포피룬을 처리하면서 레벨이 올랐고, 매일 하는 체력훈련으로 얻은 포인트를 분배했더니 어느새 레벨 8이 되어 있었다.
“한동안은 훈련 보상으로 받은 포인트는 지성에다 써야겠다.”
꾸준히 올린다고 올렸지만 다른 스탯과 여전히 차이가 많이 났다.
지성이 오르면 마수를 상대할 때 효율적인 동선을 찾는 일이나 전술과 같은 지략적인 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다음 퀘스트는 언제 열리려나.”
모험 퀘스트 목록을 여니 레벨 10은 되어야 다음 퀘스트를 열 수 있었다.
‘그 사이에는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
레벨 업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가 대공의 호감도를 올리는 일이었다.
“여전히 먼저 연락을 하지 않네.”
이제 해머에 대한 의문이 풀려서 더는 관심이 없다는 건가?
아니지. 내가 어떻게 대공저 결계를 뚫을 수 있고 그를 깨울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잖아.
‘참 속내를 알 수가 없단 말이지.’
감정적이라 쉬이 파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파 산에는 무슨 일로 갔었던 걸까?’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꼼꼼히 따져보지 못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의문이 들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면 되지.’
마침 적당한 명분도 있으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나.
나는 따뜻한 차로 입가심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 * *
“아가씨,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방문 허가를 받으신 건 맞으시죠?”
난감한 표정을 지은 마부가 창문 너머로 알려왔다.
‘여전한가 보네.’
대공저 정문에는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문지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마부에게 직접 문을 열어보라고 했는데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 이외에는 문을 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응, 전하께서 내가 오는 줄 알고 계실 거야.”
방문 요청을 한 적은 없지만 그냥 그렇다고 둘러댔다.
결계 때문에 서한도 전할 수 없는 마당에 무슨 방문 허락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왜 들어갈 수가 없을까요?”
“제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부가 안절부절못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슐레만 경이 몸을 일으켰다.
포피룬을 처리하러 갔을 때 미리 알리지 않고 나갔던 터라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결국 말도 없이 나간 일로 아버지께 혼났고 호위를 데려가지 않으면 절대 외출할 수 없다는 엄명도 떨어졌다.
덕분에 대공저를 오는 데도 슐레만 경과 함께 와야만 했다.
나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슐레만 경을 지켜보았다.
자신 있게 정문으로 향한 그가 철문을 밀었으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지만 문은 절대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력을 이용해 잠긴 문을 강제로 열 순 없었다.
엄연히 무단침입이 되니까.
“아가씨, 문이 단단히 잠겨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아서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내게 돌아온 슐레만 경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인가.’
나는 곱게 포장된 상자를 손에 든 채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내가 해 볼게요.”
“대공가에서 일부러 문을 잠가놓은 것 같습니다.”
슐레만 경이 내가 해도 소용없다는 걸 에둘러 말하며 나를 만류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정문으로 걸어가 태연하게 철문을 밀었다.
“……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보곤 마부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슐레만 경도 눈을 크게 뜨고 나와 문을 번갈아 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문에 마법장치 같은 게 되어 있나 봐요. 나 혼자 다녀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줘요.”
“혼자 가시겠다니요? 문이 열렸으니 마차를 타고 함께 가시지요.”
슐레만 경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경이 먼저 들어가 봐요. 만약 경이 들어갈 수 있으면 같이 가요.”
나는 먼저 들어가 보라며 한 발 물러섰다.
슐레만 경은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활짝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이내 보이지 않는 뭔가에 걸음이 막혔다.
“……이게?”
그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문이 열린 자리를 더듬었다.
투명한 벽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그의 손이 허공에 가로막혔다.
“내가 말했잖아요. 여기 마법장치 같은 게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이런 건 처음 봅니다.”
나는 당황한 슐레만 경을 지나쳐 유유히 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아가씨……?”
슐레만 경과 마부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방문 허락을 받은 건 나 하나뿐인가 봐요. 여기서 기다려줘요. 혼자 다녀올게요.”
“하지만…….”
슐레만 경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했다.
“이런 장치가 되어 있는 걸 보면 대공저 내도 안전할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여전히 걱정스럽게 대공저 안을 살피는 슐레만 경에게 웃어준 뒤 몸을 돌렸다.
말끔하게 안개가 걷혀서 그런지 정문에서부터 저택까지의 거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멀게 느껴졌다.
“하아, 언제 현관까지 걸어가지?”
지난번 달리기를 했던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투덜거리며 한참을 걸어 현관 앞에 도착했다.
레벨 업으로 체력이 높아져서 그런지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걸을 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