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나는 입안의 살을 지그시 깨물며 의아한 표정을 가장한 채 뒤를 돌았다.
“저기 ……기사단 숙소랑 연무장에 가보지 않을래? 거긴 한 번도 보지 못했잖아.”
애런의 부드러운 눈웃음이 참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저 미소를 정말 좋아했었는데.
가만히 애런을 쳐다보다 그의 머리 위로 눈을 들었다.
호감도 바가 깜빡이는 게 보였다.
“……괜찮겠어? 대원들 다시 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 시간 있어.”
빙그레 웃은 애런이 에스코트를 위해 팔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다 살포시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익숙한 온기가 맞닿으며 마음이 울렁거렸다.
“당분간은 황궁 내에 있는 근위대 숙소에서 지내게 될 것 같아.”
이미 이유를 알고 있지만 계속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입술을 움직였다.
“왜? 근위대는 출퇴근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선배들이 그러는데 신입 때는 잠잘 시간도 부족하대.”
“그럼, 자주 못 보겠네.”
오히려 내겐 잘 된 일이었다.
“쉬는 날에 내가 놀러갈게.”
내가 아쉬워한다고 여겼는지 애런이 달래듯 내 손을 도닥였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 튀어 오르려는 손에 힘을 주었다.
“숙소로 편지 보내도 된대.”
편지 이야기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1회차 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숙소로 편지 보내도 되지?”
자주 만날 수는 없더라도 내 생각은 자주 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아 강구한 방법이었다.
매일 같이 편지를 보냈음에도 애런은 귀찮아하지 않고 꼬박꼬박 답장을 주었고 서로의 마음이 깊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는 편지를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음으로 나는 그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애런이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아마 평소 발랄하고 제멋대로인 로웨나가 얌전하게 구니 의아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쉬는 날에 여유 되면 연락해. 내가 밥 사줄게.”
연락하라는 말에 안심한 것인지 애런이 금세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런은 당분간 몇 달 동안 쉬는 날에도 나오지 못한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 당직을 설 수 없게 된 동료들을 대신하느라.
그렇기에 자신 있게 말한 것이었다.
이후 한참 동안 애런의 설명을 들으며 걷다보니 널따란 공터가 나왔다.
“여긴 단체 훈련을 할 수 있는 연무장이야. 개인 훈련을 할 수 있는 연무장도 있는데 거기는 미리 사용 예약을 해야 해.”
“정말 넓다.”
사방이 보호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둥그런 연무장은 한 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다.
“대원들이 많으니까.”
“너도 이제 여기서 훈련하겠네.”
애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여기로 가끔 찾아오곤 했었는데.’
애런을 만나러 오면서 근위대 간식도 챙겨와 상당한 호응을 얻었었다.
덕분에 로웨나의 평판도 쇄신하고 애런의 호감도도 올릴 수 있었다.
애런과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던 벤치, 애런의 대련을 보며 응원했던 나무 그늘 아래 등.
곳곳에 애런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묻어났다.
더는 보기가 힘들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는 애런이 보였다.
‘연민은 오늘까지만…….’
호감도를 올려야 한다는 핑계로 애써 합리화하며 신중하게 할 말을 골랐다.
“이곳에서 무엇을 이루게 될 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게 무엇이든 값진 성과가 될 거야. 네 노력의 결실이니까.”
애런을 격려하는 마음을 담아 싱긋 웃어주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는 마. 난 네가 다른 이들의 소망을 위해 네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는 타인의 기대에 스스로를 욱여넣으며 고통 받지 않기를. 더는 외롭지 않기를…….
‘너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넌 내게 게임 캐릭터일 뿐인 걸까?’
그래서 증오해도 모자랄 네게 연민을 가지는 것일까?
바보 같이.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 같아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런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연무장으로 길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친구에겐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던데. 정말이네.”
한참 만에 들려온 애런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작게 속삭인 말이 메마른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 * *
호감도 6%.
헤어질 때 봤던 애런의 호감도였다.
생각보다 많이 올랐다. 똑같은 이벤트가 열렸던 지난 1회차보다 더.
착잡한 마음을 접으며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원래대로라면 애런과 외궁 정원까지 보고 헤어져야 했지만 그곳에서 황태자와 만나는 이벤트가 있어 연무장에서 헤어졌다.
‘외궁 정원을 거치지 않고 마차 대기소로 가려면……?’
황궁 지리야 황태자를 공략하며 이미 꿰뚫고 있기에 거침없이 외궁의 북쪽 회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선택을 후회했다.
북쪽 회랑이 지나는 중정에 서 있는 어떤 사람 때문에.
익숙한 흑발의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중정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만나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만나게 된다는 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직 내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화창한 햇살이 탄탄한 어깨에 부서져 내림에도 널따란 등엔 음울함이 배어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에 마음이 쓰였지만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와 엮여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이미 회랑의 중앙까지 걸어온 터라 되돌아가기엔 늦은 터.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빠르게 지나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발꿈치를 든 채 살금살금 걷고 있는데 옆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미성이 들려왔다.
“이런. 여기에 도둑고양이가 있는 줄은 몰랐군. 그것도 분홍색 고양이가.”
‘망했다.’
정확히 분홍색이라고 지적한 터라 냅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들었던 발꿈치를 내리고는 삐거덕거리는 몸을 억지로 돌렸다.
“어머, 전하께서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바삐 길을 가고 있던 중이라……. 송구합니다.”
일부러 입을 가리며 놀란 척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머리를 숙였다.
정말로 몰라 뵈어 죄송하다는 듯.
“아~. 나를 보지 못했던 거군. 그런 줄도 모르고 상처를 받았지 뭔가. 일부러 못 본 척 하는 줄 알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황태자가 상처를 달래듯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녹음을 닮은 눈동자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말렸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태자는 내가 회랑에 드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지난 회차 내내 저런 장난질을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저 능글맞은 태도엔 덤덤해질 수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듯 울화통이 치밀었다.
‘끝까지 그랬지.’
연인이 되면 나아질까 했지만 황태자는 끝까지 가볍고 능청스럽게 행동했다.
덕분에 황태자에 대한 내 처세도 날이 갈수록 뻔뻔해졌다.
“그럴 리가요. 깊이 사색 중이신 것 같아 자리를 피해드리려 했던 것뿐입니다.”
나는 공손한 자세로 대꾸했다.
네 착각이라는 걸 강조하며.
“나를 배려한 행동이었다니. 내가 오해했나보군.”
황태자가 선심 쓰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싱글싱글 흘리는 웃음에 ‘네가 우기겠다면 그렇다고 해주지.’라는 뜻이 담겨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전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충심에서 흘러나온 행동이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지요.”
“아량을 베푸는 것도 군주의 덕목이니 그리 하지. 그보다 아직 그대 소개를 하지 않았는데.”
카지노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도 황태자가 나에 대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으, 저 악취미.’
여인들의 구애가 일상이다 보니 황태자는 일부러 상대를 모른 척 하며 안달 내도록 만들곤 했었다.
별 수 있나. 권력 앞엔 장사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케인 백작가의 로웨나 케인이라고 합니다.”
“아, 그 로웨나 케인.”
디안의 모습일 때 보였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반응에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나쁜 뜻은 아니니 오해는 말게. 그대와 하이먼 영식 사이의 일이 워낙 유명해서 그런 것이니.”
일부러 소문이 나라고 시내에서 이벤트를 벌인 것이긴 하지만 황태자의 관심은 달갑지 않았다.
“개인적인 일이 전하께 알려질 정도로 소문이 났다니 민망하네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오죽 유명했어야지. 그러니 이별 소식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겠지.”
“그렇군요.”
나는 적당히 이야기를 끊어냈다.
제페스에 관해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말해 봤자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밖에 안 되었다.
“본의 아니게 전하의 사색을 방해한 것 같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인사도 드렸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더는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눌 화젯거리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연히 만난 것뿐이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깔끔했다.
그는 여인들의 관심을 즐기면서도 질척대거나 매달리는 건 싫어하니까.
고개를 숙인 채 황태자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듣기 좋은 미성이 들려왔다.
“고양이 좋아하나?”
“네?”
뜬금없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는 팔짱을 낀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내가 요만했을 적에 말이지.”
그가 제 허벅다리쯤에 손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궁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었지.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곳이 여기였어.”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장난스럽게 굴긴 했어도 이렇게 헛소리를 늘어놓은 적은 없었는데.
나의 당황스런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그는 꽤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엔 주인을 찾아주려고 애썼는데 결국 못 찾았어. 그래서 내가 키우기 시작했지.”
황태자에게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충 흘려들었다.
“귀여운 녀석이었어. 도도하기는 또 어찌나 도도한지. 내가 주인인데도 제 몸에 함부로 손을 못 대게 했지.”
작게 흘린 웃음소리에 즐거운 기색이 만연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항상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정무를 논하며 대신들과 논쟁을 벌일 때조차도.
그 웃음이 모든 걸 가진 자의 여유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유일한 황자라 황위 경쟁을 벌일 일이 없었으니까. 서글서글한 성품도 한몫했고.
그런데 지금 그의 웃음은 여태 봐 왔던 웃음과는 어딘가 달랐다.
가까이에서 봐왔던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인지 미묘한 차이임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기쁠 때만 웃는 것이 아니다.
슬플 때도, 화가 날 때도, 그리고 짜증을 참을 때도.
다양한 감정이 웃음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동안 질리도록 봐왔던 그의 웃음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제야 그게 보였다.
왜냐하면 지금 웃고 있는 그는 진정으로 즐거워 보였으니까.
크지 않은 웃음에 그리움과 슬픔 또한 묻어나고 있었으니까.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당신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구나. 그래서 당신이 그 여자를 선택한 것이었을까.’
황태자에게 배신당한 것이 내 탓이라 여기는 건 아니다. 그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어느 여인보다도 가깝다 여겼던 생각이 실은 오만이고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고 나니 조금은 황태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알아주지 못해서.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내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던 것이 부끄러워져서.
대충 이야기를 흘려듣다 기회가 되면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마음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