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두 손을 말아 쥔 카이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눈동자는 잠잠해져 있었다.
“내가 깨어났다는 걸 그놈도 알고 있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카이스의 발밑에서부터 붉은빛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땅에 낮게 깔려 있던 붉은빛이 넓게 퍼지며 종국에는 아리파 산 전체에 퍼졌다.
그와 동시에 황량했던 불모지가 생기 있는 초록빛으로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들풀과 꽃으로 가득해진 땅을 보며 카이스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땅이 변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있던 필립의 검은색 눈동자에 경외의 빛이 떠올랐다.
“수없이 봐 본 장면이지만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새로 태어난 땅을 조용히 바라보다 이내 대공저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발의 사내가 같은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파릇파릇하게 바뀐 땅을 가만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재미있군.”
느릿하게 올라간 입가가 어느 순간 비틀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그의 발아래에 싱그러움을 뽐내던 들풀과 들꽃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그럴수록 그는 내딛는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럼에도 사내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우뚝 걸음을 멈춘 그가 뒤를 돌아 자신이 온 길을 확인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들풀들이 이리저리 꺾이고 짓물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뿐.
여전히 이 땅은 생명력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의 풀내음에 도자기처럼 매끈한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친우여, 내가 그리 보고 싶었던 건가?”
그렇다면 마땅히 재회 선물을 준비해야겠지.
기다란 인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근위대 입단식은 처음 와 봐요.”
나는 조이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황궁을 바라보았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외벽 위로 애런 그리고 황태자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장면장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곳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될 줄이야.’
1회차 때에는 애런 때문에, 2회차 때에는 황태자 때문에 자주 황궁을 들리곤 했었다.
입단식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2회차 때는 애런과 거리를 두느라 입단식조차 참석하지 않았었으니까.
“나도 처음이야. 애런 덕분에 좋은 경험하네.”
어수선해진 마음을 다독이며 씁쓸한 미소를 애써 감추었다.
입단식이 열리는 그랜드 홀은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맨 앞에는 입단식을 위한 단상이 놓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하얀색 제복을 입은 근위대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나는 그들 뒤편에 마련된 하객석에 앉았다.
초대된 하객의 동행인들은 홀 맨 뒤에 자리가 있었기에 조이와 슐레만 경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런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게임은 리셋 되었어도 입단식에서 그가 서 있는 자리는 항상 같으니까.
그는 단상 바로 아래에 다른 신입 기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데다 반짝이는 금빛 머리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하객석이 꽉 차자 그랜드 홀의 문이 닫히고 입단식이 시작되었다.
근위대 소개와 같은 자잘한 순서가 지나고 황태자 클로디안이 단상 앞으로 나왔다.
흑요석보다도 짙은 검은색 머리가 샹들리에 아래 요요하게 빛났다.
‘그래, 저게 본 모습이지.’
도자기같이 매끈한 피부하며 화려한 이목구비까지.
카지노에서 만났던 디안의 모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남이었다.
오늘은 애런뿐만 아니라 황태자와의 이벤트도 있는 날이라 동선을 잘 고려해야 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이대로 황궁을 나가고 싶지만 호감도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길게 숨을 내뱉어 보았지만 뭔가에 꽉 막힌 듯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부터 서임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신입 기사들이 한 명씩 단상 위로 올라가 황태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는 그들의 어깨에 황가의 보검을 차례로 대며 서임 절차를 진행했다.
“이번 선발 시험의 수석 합격자, 애런 하퍼. 앞으로!”
수석이라는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환호와 함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애런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황태자 앞에 선 애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단하고 넓은 등이 너무나 듬직해 보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체온과 남성적인 머스크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떠오르는 추억들을 막지는 못했다.
어리광을 부리며 등에 기대었던 일, 다리 아프다고 칭얼대면 업어주던 모습, 때때로 업힌 채 잠이 들곤 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두 발을 꽁꽁 붙들었다.
길게 뱉어내는 숨에 잔상으로 남은 추억들을 담아 흩어 보냈다.
“애런 하퍼, 황가의 검이 되어 적을 무찌르고 황가의 방패가 되어 모든 위협으로부터 황가를 지킬 것을 맹세하는가?”
귓가로 흘러든 황태자의 미성에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예, 죽는 그날까지 온몸과 마음을 다해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나, 클로디안 체바노 호엔 아카르트는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애런 하퍼를 근위대 기사로 임명한다.”
황태자가 황가의 보검으로 애런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친 후 거두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애런이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서임식이 모두 끝나자 황태자가 격려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올해 근위대 선발 시험의 경쟁률이 역대 최고였다고 들었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뽑혔다는 뜻이겠지.”
황태자가 단상 아래 서 있는 신입기사들과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기사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대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그대들의 어깨에 황궁의 안위가 달려 있음을 잊지 말고 그 책임을 다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신입 기사들이 오른손을 가슴에 대며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의 격려사가 끝나자 그 뒤로는 자잘한 안내들이 이어졌다.
“이상, 근위대 입단식을 마치겠습니다.”
사회자 멘트가 끝나자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관료들과 함께 단상에서 내려갔다.
“……?”
언뜻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지노에서 호감을 얻긴 했지만 이 많은 하객들 중에서 굳이 찾아내 쳐다볼 만큼은 아니었다.
더구나 황태자를 집중 공략했던 지난 회차에서도 그의 마음을 얻기까지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나.
카지노에서의 만남만으로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흔들 수 없다 확신할 수 있었다.
다시금 쳐다봤을 때 황태자는 관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역시 착각이야. 너무 예민해 있었나봐.’
간간이 휘몰아쳐대는 과거 기억들로 마음이 술렁이는 것도 모자라 두 사람과 또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오늘은 애런만 만나고 가야겠다.’
황태자는 다음 기회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애런에게 향했다.
그는 지금쯤 가족과 함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퍼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애런이 보였다.
나는 예전처럼 조금 거리를 둔 채 그를 기다렸다.
“근위대원이 되었다고 해서 해이해지면 안 된다. 가문의 선조들이 근위대장을 역임해 왔다는 걸 잊지 말거라.”
딱딱하고 고지식해 보이는 하퍼 공작이 애런의 어깨를 묵직하게 두드렸다.
“네.”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애런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부담감에 짓눌릴 것 같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굳은 얼굴을 하고 있겠지.
하퍼 공작은 늘 저런 식이었다.
공작에 대해 잘 모를 때는 무뚝뚝한 사람이라 애정 표현이 서투른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애런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하퍼 공작과도 자주 만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하퍼 공작이 애런에게 비뚤어진 부정을 쏟아붓고 있다는 사실을.
공작은 자신이 못 다 이룬 꿈과 야망을 애런에게 투영시켜 끊임없이 그를 몰아붙이고 질책했다.
하퍼 가문은 대대로 근위대장을 역임하고 소드 마스터를 배출해온 명망 있는 무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드 마스터가 나오지 않았고 근위대장직도 다른 가문에게 내준지 오래였다.
하퍼 공작은 과거 가문이 누렸던 명성과 권력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신이 기회를 내려주신 것인지 애런이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공작이 애런에게 집착한 것이.
하퍼 공작은 줄곧 애런에게 근위대장이 되어 가문을 부흥시켜야 한다며 세뇌하듯 말해왔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애런을 진심으로 대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하퍼 공작과 애런을 바라보았다.
끝끝내 축하 인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공작이 제 할 말은 다했다는 듯 바로 몸을 돌렸다.
공작부인과 공녀들은 애런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은 채 공작의 뒤를 따랐다.
몸을 돌리며 언뜻 보인 공작부인의 눈빛엔 증오와 경멸이 어려 있었다.
찰나에 드러났다 사라진 감정이라 다른 이들은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저들의 가정사를 아는 내게는 선명하게 보였다.
‘너는 ……여전하구나.’
간단히 축하 인사만 전하고 가려 했는데…….
애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그려져서 차마 매몰차게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애런은 공녀들과는 달리 현 공작부인의 소생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전 공작부인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외면적으로는 새어머니인 현 공작부인과 애런의 관계가 원만해 보이기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현 공작부인이 애런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공작부인은 제 소생이 가문을 잇기 원했으나 내리 딸만 낳고 아들은 낳지 못했다.
결국 손을 대지 말아야 할 위험한 약까지 복용하는 바람에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공작에겐 가문을 부흥시켜 줄 아들이 필요했기에 공녀들은 공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로 인해 가문 내 공작부인의 입지도 축소되었다.
공작이 애런에게 애정을 쏟으면 쏟을수록, 애런이 두각을 나타내면 낼수록 애런에 대한 공작부인의 미움도 커져갔다.
다만 그녀는 집안에서만 증오를 드러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애런.”
복잡한 심경을 숨긴 채 차분하게 그를 부르자 커다란 등이 움찔 놀라는 게 보였다.
애런이 표정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기 위해 걸음을 조금 더 늦추었다.
잠시 후 느릿하게 몸을 돌린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근위대 입단을 축하해.”
준비해 온 꽃다발을 내밀자 애런이 얼떨떨한 얼굴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네가 수석이라는 말 듣고 놀랐어. 왜 그건 말 안 했어?”
애런은 대답 대신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기만 했다.
“대단해! 수석이라니. 내가 다 우쭐해지는 거 있지? 네가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워.”
애런의 단단한 어깨를 가볍게 도닥이자 순간 웃고 있던 표정이 허물어져 내렸다.
꾹 다물린 입술이 뭔가를 참는 듯 보였다.
이미 1회차 때 봤던 모습임에도 마음 한 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애런은 나를 배신했어. 다른 여인을 위해 나를 버렸어.’
알아. 나도 안다고.
그를 용서한 건 아니다. 내가 착해서도 아니다.
애런을 마주하면 원망과 분노가 일면서도 이렇게 상처받은 모습을 마주할 때면 원망만큼 연민도 솟아올랐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어느 하나만 택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내 마음임에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가까스로 펴며 작은 미소를 억지로 덧입혔다.
“네 목표가 이루어져서 기뻐. 너 그동안 많이 노력했잖아.”
내 축하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런의 눈썹 끝이 힘없이 늘어졌다.
“동료들과도 인사 나눠야 하지? 난 이만 갈게.”
더는 표정 관리가 힘들 것 같아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로나.”
애런이 다급히 나를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