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보셨죠?”
의심으로 가늘어졌던 눈매가 조금 크게 벌어졌다.
“사실이군. 게다가 지난번보다 확실히 신력이 늘었어.”
그런 것도 알 수 있단 말이야?
순간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신력에 관해서는 거짓말도 못하겠네.’
만져보지도 않고 단박에 알아낸 걸 보면 대공은 신력을 감지하는 능력도 뛰어난 것 같았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죠?”
“아직 확인할 게 더 남았다.”
아니, 해머에 대한 설명을 했으면 됐지. 또 뭐가 남았는데?
슬그머니 짜증이 올라왔지만 웃음으로 감추었다. 대공은 공략캐이니까.
“궁금한 점이 더 있으신가요?”
“그곳은 어떻게 갔으며 이런 복장은 어디서 구했는지…….”
대공이 협탁 위에 놓인 찢어진 슈트와 침대 아래 곱게 세워진 부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 슈트가 저기 있으면 난 지금 뭘 입고 있는 거지?’
당황스런 마음으로 내려다보니 하얀색 침의가 보였다.
지난번에 대공저엔 아무도 없었는데. 설마…….
“전하, 제 옷은 누가 갈아입혔나요?”
“내가.”
“네에?”
“오염과 마수의 독에 노출된 상태라 갈아입혀야 했다.”
“아니, 아무리 상황이 급박해도 그렇지. 어떻게 레이디의 몸에 손을 대실 수가 있으세요?”
가슴을 가리며 파렴치한 보듯 바라보자 대공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몸엔 관심 없다.”
“관심이고 뭐고, 기본적인 매너는 지켜주셨어야죠.”
내가 계속 씩씩대자 대공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순간 그에게서 스멀스멀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나는 얼른 침대 끝으로 도망갔다. 이미 소환되어 있던 해머를 든 채로.
“네 몸에 손을 대지도, 네 몸을 보지도 않았다.”
간신히 짜증을 참고 있는지 그에게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말이 돼요?”
어디서 약을 팔아.
내 목을 내리누르던 대공이 떠올라 겁이 나면서도 분한 마음에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내 반박에 지그시 나를 노려보던 대공이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옷이 바뀌었다. 침의에서 하늘색 평상복으로.
“아…….”
가능하구나.
뻘쭘해져서 눈을 굴리자 대공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하, 하하. 진작 말씀해주시지. 이런 게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했잖아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해머를 팔찌로 귀환시켰지만 대공의 냉랭한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오해해서 죄송해요.”
“하, 살다 살다 치한으로 몰리다니.”
“아니, 그게. 평범한 제가 그런 게 가능할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전하께선 마법사도 아니시잖아요.”
“우리 사이에 신뢰가 없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군.”
“보자마자 목을 조르셨던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죠.”
나름 억울해서 불퉁하게 따지자 대공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이 모든 게 자업자득이다?”
“뭐,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책임이 아주 없으시진 않죠.”
“한 마디를 안 지는군.”
“억울한 건 못 참거든요.”
대공이 ‘뭐 이런 게 다 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절 구해주신 건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이왕 무릎 꿇고 있는 김에 절을 올리자 짜증이 어렸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너희 부모도 아나?”
“아니요.”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묻는지 알 것 같았다.
해머부터 시작해 폴루티아에 다녀온 것까지 모든 것을 묻는 거겠지.
“한두 번도 아니고. 폴루티아에 다니는 걸 계속 속일 수는 없을 텐데.”
“그래서 고민이에요. 폴루티아에 간 건 오늘 처음이거든요. 지금도 제가 갑자기 사라져서 찾고 있을 지도 몰라요.”
생각해보니 정신을 잃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200마리만 잡고 금방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그래서 말인데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한 가지만 더 대답해주면 돌려 보내주지.”
“물어보세요.”
한시라도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냉큼 대답했다.
“오염된 땅을 어떻게 정화한 것이지?”
“아, 그건…….”
하필 제일 대답하기 곤란한 걸 물어 볼 건 뭐람. 나는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해머로 내리쳤다고 할까?’
대공은 해머의 신력이 늘어난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땅을 정화할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알아챌 지도 모른다.
‘역시 핑계 댈 건 그것뿐인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할 말을 고른 후 입술을 움직였다.
“계시대로 마수를 다 처리하면 이 팔찌에 유리병 모양이 생겨요. 그걸 건드리면 해머처럼 쓸 수 있어요.”
“잠시 만져 봐도 되나?”
거짓말이 탄로 날까 겁이 나긴 했지만 여기서 빼면 대공의 의심을 받게 될 게 분명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팔을 내밀었다.
팔찌를 유심히 살펴보던 대공이 조심스레 팔찌를 만졌다.
잠시 팔찌를 쥔 채 가만히 있던 그가 이내 손을 뗐다.
“대답을 해줬으니 데려다 주지.”
별다른 추궁 없이 넘어가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대공이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저택 앞으로 이동했다.
“어?”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광에 입을 떡 벌렸다.
분명 지난번에 왔을 땐 불모지만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파릇파릇한 잔디와 풍성한 몸집의 수목들 그리고 알록달록한 꽃들이 정원을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향긋한 꽃내음과 함께 나비까지 날아다니고 있었다.
“전하,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에요?”
힐끗 나를 쳐다본 대공이 내 시선이 어디에 머문 것인지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가 깨어났으니까.”
“전하께서 깨어나신 것과 정원이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이곳은 내 결계에 의해 보호 받는 곳이라 모든 것이 나를 에너지원으로 삼고 있지.”
대공이 귀찮다는 듯 마지못한 투로 설명했다.
“에너지원이요?”
“내 신력. 그걸 흡수해서 저렇게 된 거야.”
아니, 아무리 신력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하루아침에 저렇게 자란다고?
신벌 때문에 사용에 제한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끝도 보이지 않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지상낙원이 있다면 이러할까? 마치 엘프들이 사는 정원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에 드나 보군.”
정작 대공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듯 말했다.
“갑자기 달라진 모습에 놀라긴 했지만 예쁘긴 정말 예쁘네요.”
“진작 정원을 보여 줄걸 그랬어. 그랬으면 여기에 머물겠다고 했을 지도 모르는데.”
“그럴 일은 없었을 거예요. 아무리 예쁘더라도 제 집이 아닌 곳에 머물 수는 없죠.”
단호한 대답에 대공이 가볍게 혀를 찼다.
“전하, 그럼 저번에 저를 치료해 주신 힘도 신력이었던 건가요?”
이미 시스템을 통해 알고 있지만 앞으로 수월하게 대화를 하기 위해 일부러 물은 것이었다.
“그래.”
“아, 그래서 제 해머에 신력이 있다는 걸 아셨던 거구나.”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어? 사용인을 고용하신 거예요?”
마차를 몰고 온 마부를 보며 묻자 대공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나를 마차에 태워버렸다.
“가라. 조만간 또 보지.”
그러고는 휙 사라졌다.
황당함도 잠시 나는 방금 본 호감도가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댔다.
분명 사라지기 전 대공의 머리 위에선 호감도 6%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단번에 5%가 올랐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지난 회차는 물론이고 바깥세상에서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올라간 적은 없었다.
‘이유가 뭐지? 역시 해머 때문인가?’
나는 창문 너머로 대공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 * *
“다녀왔습니다.”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버몬트 대공, 카이스가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의 앞에는 암갈색 머리를 짧게 친 사내가 서 있었다.
“케인 백작가가 맞았습니다.”
사내는 카이스가 묻지 않았음에도 그가 무엇을 물을지 안다는 듯 바로 보고했다.
“정말 가족들은 몰랐던 것인지 모두 그 여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카이스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필립, 가 봐야겠다.”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필립은 카이스가 가려는 곳이 어딘지 안다는 듯 말없이 뒤를 따랐다.
이내 두 사람의 인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로웨나가 마수를 처리한 아리파 산이었다.
그곳은 로웨나가 처음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진득하게 녹아내리던 검은 액체는 온데간데없고 말끔하게 황토색의 토양이 드러나 있었다.
비록 땅이 메마르고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지만 썩은 내도, 지면을 달구던 열기도 사라져 있었다.
아리파 산 전체는 물론이고 산자락이 이어진 곳까지 모두 정화된 것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마수도 더는 감지되지 않는군.”
잠깐 사이에 탐색을 마친 카이스가 말했다.
“평범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카이스는 아무런 대꾸 없이 로웨나가 정화해 놓은 땅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놈의 수하가 아닌 건 확실해.’
케인 백작가라면 황가와도 연관이 없었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사실 카이스는 로웨나가 한창 포피룬을 처리하고 있을 때 이곳에 도착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다.
작은 유리병을 열어 땅에 붓던 모습까지도.
마기에 오염된 땅은 오직 신의 권능으로만 정화시킬 수 있다.
‘그 여자가 가지고 있던 팔찌엔 권능이 담겨 있지 않았어.’
분명 순도 높은 신력이 흐르고는 있지만 권능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곧 로웨나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었다.
‘왜 그랬을까?’
마수를 처리하고 폴루티아를 정화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적이 아니었다.
굳이 편을 나누자면 그에겐 우군이었다. 그렇다 해도 미심쩍은 부분은 남아 있었다.
‘왜 나를 깨운 것일까.’
친구와 내기를 했다던가, 호기심에 깨웠다던가. 그런 허무맹랑한 말은 믿지 않았다.
사람은 제게 이득이 없는 일에 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안개가 둘러싸인 음산한 저택에 일부러 들어와 생존자를 찾듯 사람을 찾아다녔다는 건 그만큼의 수고를 들일 만큼 얻어낼 이득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를 깨운 일로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지.’
아무리 그가 위협적으로 대했다고 해도 은인이라며 대가를 요구할 만한데 로웨나는 저택을 나가게 해달라는 말만 했었다.
혹시나 해서 로웨나에 대한 뒷조사도 했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애초에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득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했다.
그가 동면에 빠져든 순간부터 이 세상에서 그의 존재는 깨끗하게 지워졌으니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카이스의 중얼거림에 필립이 힐끗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둠에 물들지 않은 자입니다.”
악에 물들어 있는 자, 어둠을 품고 있는 자는 영혼에서 악취가 난다.
로웨나의 영혼에선 싱그러운 풀내음이 난다. 그걸 필립이 맡지 못했을 리 없다.
확인해 보라고 일부러 마부로 위장시켜 따라 보냈던 것이니까.
“지켜봐야겠어.”
불현듯 로웨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제가 전하를 믿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말씀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카이스가 뒷짐을 진 채 아리파 산 너머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과거 어느 때의 시간을 더듬듯 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주군, 이곳은 어찌하실 겁니까?”
필립의 나지막한 물음에 그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직 그놈이 알아선 안 되겠지.”
누군가를 떠올린 금빛 눈동자가 활화산이 터지듯 거칠게 일렁였다.